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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아리 현선생 Jul 23. 2021

출근 첫날의 장그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신규교사의 출근 첫날 이야기

군생활을 하면서 한번 파견을 다녀온 적이 있다. 나는 공군에 복무하고 있었는데 매년 열리는 '맥스 썬더'라고 하는 한미 비행훈련 행사에 통역 헌병으로 파견을 가게 되었다. 당시 일병이었던 나는 소대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매우 들떠있었고, 파견에 가서는 좀 편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큰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파견에 가서 다양한 소대의 사람들과 함께 같은 방을 쓰게 되었는데 모두 다른 소대이다 보니 계급 상관없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파견을 나오면서 소대에서는 세상 말로 '짬'이 낮아서 할 수 없는 것들을 많이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특히 지금도 추억으로 많이 남는 몇 가지 즐거운 기억이 있다. 근무를 마치고 같은 방을 쓰던 사람들과 함께 P.X에서 산 과자와 음료수를 먹으며 드라마를 보는 것이 파견 나온 우리들의 소확행이었다. 당시 우리는 iptv의 다시 보기 기능을 이용해 한 드라마를 정주행 했는데 그 드라마는 바로 사회 초년생의 직장생활 고군분투 생존기를 담은 <미생>이었다.


파견 첫날에 다 같이 친목도모를 위해 과자파티를 한다는 명목으로 과자를 한 보따리 사서 책상에 깔고 함께 먹으며 <미생> 1화를 처음 마주하였을 때의 숙연한 분위기는 지금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미생>을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잘 알겠지만 첫 화에 나오는 주인공 장그래의 모습은 불쌍하다 못해 측은지심이 느껴진다. 1화에서는 평생 바둑 말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장그래가 한순간에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대기업에 인턴으로 취업을 한 이야기가 나온다. 남들이 스펙을 쌓을 때 바둑 실력만 쌓은 장그래는 회사에 있는 어떤 업무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직장 내에서 업무를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함께 입사한 동료들마저 장그래를 낙하산 직원이라고 생각하며 따돌렸기 때문에 그의 모습을 보면 정말 안타까움의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이 때는 알지 못했다. 그 한숨을 내가 나 자신에게 쉬게 될 줄은.......




나는 작년 2월에 임용시험에 합격을 하였다. 나의 등수로는 당장 발령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당분간은 기간제 교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몇 군데 학교에 지원을 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조건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 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서 면접을 보았고 합격을 하여 기간제 교사 계약을 하였다. 나는 처음부터 담임을 맡으면 힘들 것 같아 과학전담교사로 교직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계약 공지를 보았을 때는 나의 업무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는데 계약서를 작성할 때가 되니 업무 분장표에서 나의 업무가 6개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었지만 교감선생님께서 간단한 업무들이라고 하셔서 나는 그 말을 믿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엄청난 시련을 마주하였다. 학교에 도착하여 나의 작업 공간인 과학실에 도착해 컴퓨터를 켜자마자 바로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다. 주무관님께서는 다짜고짜 인증서를 가져왔다는 질문을 하셨는데 인증서는 평생 인터넷뱅킹 공인인증서밖에 모르던 나였기에 급여 관련된 문제로 연락을 주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 저 신한은행 쓰는데요."라고 대답을 하시니 주무관님은 한숨을 푹 쉬시더니 "지금 당장 NEIS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교육부 인증서 새로 만드세요."라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합격한 지 2주밖에 안된 신규교사가 NEIS는 무엇이며 출근 첫날인 내가 담당자는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래도 군대에서 '모르는데 혼자 해결하려다 사고 치지 말고 모르면 털리더라도 물어보는 것이 낫다'라는 것을 제대로 배웠기에 바로 교무실에 찾아가서 물어보았다. 그래도 다행히 실무사님이 자세히 알려주셔서 나이스 인증서를 신청해서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나이스 인증서가 생각보다 빨리 나와서 업무포털에 들어가 보라는 말을 듣고 동학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접속해보았다. 접속하자마자 나는 컴퓨터 화면을 꺼버리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온 결재 기안이 6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의 상태를 간단하게 정리해서 설명해보자면 첫째로 나는 이전 업무 담당자로부터 업무에 대한 인수인계를 받지 못하였다. 둘째로 나는 NEIS, K-에듀파인 등을 처음 만져보는 상태였다. 셋째로 나는 문서 기안을 올리는 방법조차 모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업무에 대해서는 백지의 상태였다. 그래서 그날 나는 학교를 온종일 돌아다녀야 했다. 축구평론가 서형욱 님은 맨유에서 활동하던 박지성 선수를 보고 "박지성 선수의 발에 하얀 페인트를 묻혔다면 그라운드가 하얀색으로 바뀌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인용해 조금의 과장을 보태자면 그날 나의 발에 하얀 페인트를 묻혔다면 아마 학교 복도가 다 하얀색으로 바뀌었을 것 같다. 그날 나는 나의 이전 업무 담당자를 찾아가 업무를 물어보고, 교무실에 찾아가 교무부장님에게 K-에듀파인에서 기안 올리는 방법을 물어보고, 그 외에도 학년부장님과 동학년 선생님의 반에 수시로 찾아가 내가 작성한 기안이 잘 작성한 것이 맞는지 확인받아야 했다. 그렇게 학교 안에서만 10000보 넘게 걷고 나니 나의 힘겨운 출근 첫날은 마무리되었다.


모두가 돌아간 자리
행복한 걸음으로 갈까
정말 바라던 꿈들을 이룬 걸까
밀렸던 숙제를 하듯
빼곡히 적힌 많은 다짐들
벌써 일어난 눈부신 해가 보여
또 하루가 가고
내일은 또 오고
이 세상은 바삐 움직이고
그렇게 앞만 보며 걸어가란 아버지 말에 울고

-미생 OST, 한희정 <내일>


시간이 지나서 같이 졸업한 친구들을 술자리에서 만나 물어보니 나만 출근 첫날 이런 하루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 역시 모두 방식은 다르지만 우왕좌왕하는 하루를 보냈다고 하였다. 우리는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코로나로 인해 졸업식에서 학사모는 던지지 못한 세대이지만 그래도 모두 카톡방에서 "앞으로 꽃길, 비단길 같은 교단길만 걷자!"라고 서로를 축하하였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알지 못했다. 꽃길은 원래 비포장도로고 실크로드는 험난한 사막길이라는 사실을...... 이와 같이 많은 신규교사들이 출근 첫날에 혼돈의 카오스를 겪는다. 지금은 웃으며 넘어가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반골기질 가득한 나로서는 왜 신규교사는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먼저 신규교사가 학교 현장에 나가기 전에 이런 업무 처리 절차를 제대로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매년 임용시험 합격자 발표가 나고 얼마 안 있어 각 시, 도 교육청에서는 신규교사 직무연수를 약 일주일간 제공한다. 하지만 이 일주일의 시간만으로 학교 업무 처리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다른 직업군과 비교를 해보아도 이 연수 프로그램이 얼마나 허술한지 알 수 있다. 의사의 경우에는 한 의사가 제대로 된 의료활동을 하기 전에 본과 3학년부터 1년 이상 PK실습을 돈다. 그리고 전문의가 되기 전에 인턴-레지던트와 같은 도제식 교육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한 의사가 의료활동을 하면서 겪는 여러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변호사의 경우에는 변호사 시험 합격 후 법무법인과 같은 법률기관에서 수습 변호사로서 6개월 간 수습생활을 마쳐야 비로소 소장에 자신의 이름을 기재하고 재판에 입회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전문직이 아니더라도 일반 사기업의 경우에도 신입사원이 입사하면 보통 몇 개월간의 OJT 교육과정을 거친 후에 각자 직무 현장으로 신입사원들을 배치한다. 하지만 교사의 경우에는 발령을 받으면 바로 1인분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이나 학부모님이 무언가 물어보았는데 "제가 아직 발령받은 지 며칠 안되어서 업무를 잘 몰라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설령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런 교사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무책임하고 무능한 교사로 낙인이 찍힐 것이다. 게다가 부임하자마자 담임을 맡으면 바로 학생 생활지도와 학부모 대응 등의 다양한 업무도 맡아야 해서 부담이 가중된다. 교대에서 교생실습을 할 때에는 수업시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업무나 학생 생활지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수업만 잘하면 된다. 그래서 교사는 수업만 잘하면서 아이들과 행복하게 일상을 보내면 된다고 나름의 환상을 품게 된다. 하지만 업무나 생활지도에 대한 아무런 지식을 가지지 않은 채 교육현장에 투입된 신규교사는 출근 첫날부터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시행착오를 막기 위해서는 시간을 좀 더 들여서라도 보다 내실 있는 신규교사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신규교사는 업무분장에 참여할 수 없는 시스템 때문이다. 신규교사는 보통 첫 학교에 발령을 받으면 발령받은 당일이나 다음 날에 학교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 그리고 교감선생님에게서 학년 배정과 업무 배정을 받는다. 이때 신규교사의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업무 분장표를 보면 다른 학년과 업무들에는 기존의 선생님들과 관외 전보 오신 선생님들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고, 신규교사는 그저 빈자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때 신규교사가 처음부터 상대적으로 힘든 학년이나 업무를 맡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모든 학년과 업무에는 다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편한 학년이나 업무는 기존의 선생님들께서 가져가고 기피하는 업무만 남아서 이를 신규교사가 맡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첫 발령을 받은 학교에서 업무가 없고 상대적으로 괜찮은 학년을 맡게 되었다면 이 글을 빌려 미리 축하한다. 당신은 배려와 사랑이 넘치는 좋은 학교에 발령 났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이 신규교사는 그저 주는 업무와 학년을 받아서 어떻게든 1년간 꾸려나가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는 방황을 할 수밖에 없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1학기를 준비하기 전에 다소 분주할 수 있어도 신규교사까지 모두 발령이 난 후에 모든 교사가 참여한 환경에서 공평한 업무분장이 이루어지면 좋을 것 같다고 내심 소망해본다.


마지막으로 상대적으로 수평적인 교직문화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직문화가 수평적이면 좋은 거 아냐?'라고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나도 그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시대가 변할수록 많은 직장에서 점차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교직은 교장과 교감을 제외한 나머지 교사는 모두 교사라는 직책으로 근무를 하기 때문에 다른 직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수평적인 조직문화에는 나름의 맹점이 존재한다. 이 맹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기업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일반적인 기업에서의 조직을 보면 사원-주임-대리-과장-차장-부장-이사-상무-전무-부사장-사장이라는 위계가 뚜렷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입사원이 모르는 것이 있다면 주임에게 물어보고, 주임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대리에게 물어보는 등 각자 자신의 사수에게 모르는 부분을 질문하며 업무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각 직책에는 자신의 아래 직책의 후배들에게 업무를 가르쳐줘야 한다는 나름의 암묵적인 불문율이 존재한다. 하지만 교직의 경우 교장과 교감과 같은 관리자를 제외한 나머지 교사들은 각자 다른 업무를 한다. 즉, 신규교사에게 있어서 자신의 업무를 바로 알려줄 사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학교라는 조직에서도 업무 편의를 위해 부장은 존재하지만 부장에게는 부장의 업무가 있고 신규교사의 업무와 공통점이 없는 경우가 많다. 다른 선생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각자 맡고 있는 업무가 따로 있다. 그래서 선배 교사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이전에 신규교사의 업무를 해보지 않았다면 쉽게 먼저 찾아가서 조언을 해줄 수 없고, 신규교사의 질문에 대해서도 선뜻 대답을 해주기 쉽지 않다. 그리고 일반 기업에서는 사원이 실수하면 그 과정에서 함께 검토한 주임과 대리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교직에서는 각자 맡은 업무가 다르기 때문에 교사 개인의 실수는 개인의 책임이다. 이와 같은 수평적인 조직문화로 인해 신규교사는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어디 가서 쉽게 물어보기도 쉽지 않고 끙끙 앓다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배울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1년 차 교사에게는 업무를 분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1년 정도는 병원에서의 인턴과 같이 다양한 업무를 맡으신 선생님들을 찾아가서 돌아다니며 다양한 업무에 대해 작게나마 체험해보며 실무를 배우는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나마 소망해본다.




그래도 다행히 드라마 <미생>의 경우 회를 거듭할수록 보통의 사회 초년생들에게 나름의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준다. 장그래는 처음에는 회사생활에서 고전하다가 바둑으로 단련시킨 그의 탁월한 두뇌를 이용하여 사내에서도 다양한 업무에 금방 적응해낸다. 그리고 계약직이지만 인턴에서 사원으로 전환도 하였고, 영업 3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피엔딩으로 드라마가 마무리가 된다고 해도 나와 같은 반골기질 뚜렷한 사회 초년생 신규교사에게는 뭔가 찝찝함이 남는다. 어쩌면 우리 교직에서는 모든 신규교사가 장백기, 한석율, 안영이와 같은 척하면 척 알아듣고 뭐든 다 해내는 인재이기를 바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는 것만으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대에서 4년 간 교사로서의 소양을 갖추고 졸업을 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초임교사가 장백기, 안영이, 한석율처럼 처음부터 어벤저스와 같이 모든 일을 착착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배운 것보다는 배울 것이 더 많은 미생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생'은 바둑에서 집이나 대마가 아직 완전하게 살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신규교사라는 미생이 앞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펼쳐나가는 완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교직사회의 많은 배려와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모든 것이 무너져있고
발 디딜 곳 하나 보이질 않아
까맣게 드리운 공기가 널 덮어
눈을 뜰 수 조차 없게 한대도
거기서 멈춰있지 마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그대로 일어나 멀리 날아가기를
얼마나 오래 지날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견딜 수 있어 날개를 펴고 날아

-미생 OST, 이승열 <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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