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본을 푸는 일
올려 묶은 머리카락과 드러난 목, 움직일 때마다 살며시 흔들리는 치맛자락, 더운 곳에서의 옷차림은 가볍다 몸통에 끈만 달아 묶는 원피스는 등과 어깨가 드러나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시원하다
아침을 먹고 올드타운의 거리를 걷고 있으면 홀터넥이라고 부르는 옷차림의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홀터넥원피스는 입고 벗기에도 무척 편하고 헐렁하게 묶어 입는 옷이라 체형과 상관없이 누가 입어도 아름답다
여행이 끝나가던 날, 짐을 다 챙겨 호텔에 맡겨두고서 설렁설렁 걷고 있는데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누군가 원피스의 리본을 풀어버린다면 어쩌지?
입기 쉬운 만큼 홀터넥은 말 그대로 목에 걸린 리본에 옷전체를 의지하고 있어서 리본만 풀어버리면 중력에 의해 옷이 툭 떨어져 벗겨진다 리본은 한쪽끈만 잡아당기면 풀리기 때문에 눈 깜짝할 새 봉변을 당할 수 있다
당연히 아무도 그런 짓을 하지 않기에 옷을 입는 사람의 마음은 자유롭다
당연히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너무나 ”당연한 “ 믿음으로 입은 옷이 자연스럽지 않은 사회란 어떨까란 생각이 왜 들었는지 모르겠다 저녁엔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지역에서 가장 큰 대학병원 앞에서 쓰러진 이가 응급실을 찾지 못해 목숨을 잃고 무더위에 에어컨을 설치하다가 쓰러진 노동자가 그대로 방치되어 삶을 더 이상 이을 수 없고 억울하게 우리의 삶을 빼앗겼던 시기의 우리의 국적과 땅의 이름을 다르게 말하는 기막힌 일들이 벌어지는 곳에 곧 도착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으려나
119를 부르면 구급차가 달려오고 가까운 병원에 가 치료를 받는 당연한 일, 무더위에 노동자가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최소한으로나마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하고 혹시나 작업 중에 쓰러지거나 다치면 방치한 채 사진을 찍어 가족들에게 지병여부를 묻지 않고 바로 조치하는 일, 길을 넓힌다는 이유로 가로수를 함부로 베지 않는 일, 누군가 사람 많은 길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왜 그래야 했는지 묻고 고치는 일, 이런 당연한 일들이 적동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걱정하지 않고 의식하지도 않고 당연히 믿었던 약속이 깨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들어서였다
지금 나는 홀터넥의 리본끈을 누군가 마구 풀고 숨는 사회를 경험하고 있다
당연했던 약속이 눈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깨지는 사회, 뻔뻔하게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는 사회, 혹은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회
나의 피로는 이런 사회로부터 온다, 설마 했던 일들이 자꾸만 벌어져 분노가 일상이 되고 분노하는 일이 익숙해져서 하찮고 귀찮아지는 일에서부터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안 입으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게 당연해질 무례한 사회가 나는 싫다
#지하철에서
#이맘때면가을이올줄알았던당연한기대도 무너지고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