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역 폭행사건을 접하고
1.
이십 대. 늦은 밤 술을 마시고 택시에 타면 남자 기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시부렁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난 알았다. 그게 누구 들으라고 한 말인지.
- 새파랗게 어린것들이 이 늦은 밤에 술냄새 팍팍 풍기고.. 어느 아버지가 술 처먹고 다니는 딸년을 가만 두냐? 말세야 말세.
왜? 가만 안 두면 네가 내 아비 행세라도 해서 한 대 패려고? 그러면 나도 가만 안 있어 속으로 욱 했지만... 참았다.
이제는 나이 먹어서 이따위 거지 같은 성희롱은 안 당할 줄 알았는데 웬걸. 남자 기사는 이렇게 주절댔다.
- 아줌마... 남편이 겁나 성격 좋으신가 봐. 이 시간까지 술을 마시게.
저 새끼, 주둥아리. 아예 목을 따버릴까. 술김에라도 정말 심각하게 고민한다.
2.
오래전 일이다. 이태원에서 친구들과 파티가 있는 날. 택시를 잡으러 도로에 서 있었다. 그날따라 할로윈데이라 좀 차려입었다. 검은 가죽잠바에 검은 레깅스 검은 가죽부츠를 신고 온통 검정으로 치장한 밤. 지나가던 갑자기 자가용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뭔가 싶어 쳐다봤더니 웬 남자가 운전석에서 차창을 내리고 얼굴을 내밀었다. 어쩔? 뭐야? 이 미친놈은? 남자는 씩 웃더니 말을 툭 던졌다.
- 얼마야?
소월길에는 길가에 서서 매매춘을 하는 여성들이 있다. 이 남자가 날 그리 착각한 모양이었다.
- 저 택시 기다리거든요. 잘못 아셨습니다. 그냥 지나가시죠.
욱... 치밀어오는 화를 한 박자 참고 공손하게 답해줬다. 남자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차문을 올렸다. 그런데 차가 자리를 뜨는가 싶더니 한 바퀴 돌아 다시 내 앞으로 왔다. 뭐야, 이 새끼. 또 왔어? 다시 차창이 내리더니 남자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 야, 빼지 말자 응. 얼마냐니까?
아 놔.... 그 순간 내 인내심이 바닥났다. 이 새끼가 얻다 대고 계속 반말이야. 남자란 것들은 좋게 친절하게 말해서는 도대체 알아듣질 못한다. 이해력이 빵점인 건지 여자를 우습게 보는 건지. 둘 다다.
- 아, 씨발. 야!!! 아니라고 했잖아! 나 장사하는 거 아니라고! 택시 잡는데 방해되니까 꺼져 이 새끼야!
우다다다 쌍욕을 하고 나서야 흠칫 놀란 남자가 황급히 차창을 올리더니 붕~~~ 차가 떠났다.
이런 남자에게는 친절이 필요 없다. 욕 밖에 답이 없다. 여자가 예의 바르게 거절하면 귓등으로 듣고 화를 내면 자기 좋아서 웃는 줄 안다. 정말 성나서 욕이라도 하면 남자 자존심을 건드렸네 감히 남자를 무시했네 어쨌네 하면서 방귀 뀐 놈이 더 지랄한다. 참 답 없는 종자들이다.
3.
대학생 때. 캠퍼스에서 점심 먹고 담배를 물고 가다가 생판 모르는 어느 늙스구레 예비역에게 얻어맞을 뻔했다. 이유는 여자가 길에서 대놓고 어딜 담배를 피워?
1학년 새내기 오리엔테이션 갔을 때 일이다. 늦은 밤 술자리 한판이 벌어졌고 교수 앞에서 담배 폈다. 왜냐고? 얼큰하게 취하신 교수님께서 흐뭇한 표정으로
자자, 이제 다들 성인들인데... 신입생 중에 담배 피우는 사람 있으면 펴. 어이 담배들 피지? 하고 담배를 건넸기 때문이다. 나도 냉큼 손을 내밀었다. 교수가 흠칫 놀란 표정으로 내게 담배를 건넸다. 마지못해 건넨 거겠지. 음~~ 담배맛이 꿀맛이었다. 그때 주위에 둘러앉은 남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 쏟아졌던 걸 기억한다.
난 다른 여자 선배들처럼 화장실에 숨어 동아리방에 틀어박혀 담배 피우고 싶지 않았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왜 그래야 하는데? 담배를 피우고 안 피고는 개인사정. 개인의 선택이자 취향일 뿐. 그날 이후 학과에선 소문이 파다했단다. 나에 대해서. 교수 앞에서 담배 피운 발랑 까진 년 싸가지 개판인 년으로.
복도에서 계단에서 교정에서 담배 물고 지나가는 나 때문에 조교가 교수에게 욕 내리 처먹고 제대로 화난 조교가 내 남자동기들을 불러 모아서는 계집애 하나 제대로 조지지 못한다며 사내 새끼들이 군기가 빠졌다고 줄버터를 내리쳤다는 이야기도 후일 동기생들이 모인 술자리에게 들었다. 우리가 그때 너 대신 맞아준 거야. 네가 여자라서 우리가 지켜준 거야. 이걸 후일담이라고 자랑스럽게 비밀을 털어놓는 남자들. 헉, 소름 끼쳤다. 그리고 한없이 슬펐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이 나라. 남성들이 남자답기 위해 여혐을 실천하는 남초 세상 대한민국.
그리고 대학교에서 결국 나의 그 여자답지 못함과 싹수없음을 손 봐주겠노라 하는 남자들 모르는 남자들에게 소위 민주투사이며 진보라는 운동권에게 선배가 후배 교육시킨다는 미명하에 '맞아도 싼 년'이 되어 정말 맞았다. 여자라서 희롱당하고 여자라서 욕먹고 여자라서 맞았다.
4.
사춘기 때부터 서른 이후 내내 짧은 스포츠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바지만 입고 살았다. 여자가 왜 그러고 다니냐고 남자냐 비웃음도 많이 받았다. 여자에게는 화장해도 야하다고 지랄 안 하면 안 한다고 또 지랄인 세상. 성형하면 성괴라고 모욕하고 성형에 다이어트 안 하면 그 상판에 그 몸매로 배짱 좋다고 조롱하는 남성들이 판치는 대한민국이다.
어제도 오늘도 여기저기에서 여자들이 머리 짧다고 화장 안 해서 해고당하고 남자에게 스토킹당하고 폭행당하고 이별을 통보했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대한다. 숨이 막힌다. 부르르 떨린다. 과거 쇼트커트에 화장 없이 대충 티셔츠에 바지만 입고 다니며 담배 물고 길거리를 휘젓고 다닌 내가 해고 안 당하고 안 맞고 안 죽은 건 그저 운이 매우 좋았던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남자들에게 전혀 모르는 타인이라도 여자는 내 맘대로 가지고 놀아도 되며 함부로 취급해도 되며 간섭하고 참견하며 폭언할 수 있는 심지어 주먹을 써도 되는 전매특허라도 프리패스라도 준 모양이다. 여성의 의사와 권리와 여성의 주체성과 무관하게 남성 자신의 잣대로 생각하기에 상대 여성이 맞아도 싼 년이라는 그 관념. 그런데 아는가.
그게 바로 여성혐오다.
5.
살면서 아버지를 비롯하여 정말 죽이고 싶었던 남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셀 수없다. 모르는 여자에게도 제 맘대로 이래라저래라 말할 자격이 있다고 여자에게 심지어 폭력을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한국 남자는 발에 차고 넘친다.
어, 잠깐! 그런 식으로 한국 남자를 평하는 건 남혐이 아니냐고? 쓴웃음이 나온다. 이런 남성은 인간으로서 혐오할 만하다. 여성을 자신과 같은 동등한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고 발싸개쯤으로 여겨 폭력을 휘둘러도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 말종을 말종이라 여기는 것이 남자 혐오라면? 난 뭐 계속 혐오할 생각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꼴을 당해보지 않아서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대한민국에서 네가 남자라서, 가랑이 사이에 불알 달랑 달고 나온 덕을 여태껏 겁나게 보고 산 줄 알아라. 그게 바로 기득권이라고 하는 거다.
아아, 대한민국에서 성별 젠더 불문 '여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모욕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남성을 사랑하는 그 인내심과 참을성, 인도주의적 마음만으로도 이미 보살이다. 죽어서 성불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