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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 OFF Jung Sep 08. 2021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가지러 가는 것

지금 시작하는 여행스케치




적어도

꿈에서 깨었을 때 그때의 기분 좋음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음 좋겠다.

적어도

사진 너머의 세상이 갈증 나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음 좋겠다.

그래서

여행은 가슴 가득 채워지지 않는

쓸쓸한 중독이다. 







옛날 어르신들은 여행을 매우 사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시곤 했다.

여행은 금전적, 정신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떠나는 것이라 여겼다.

통장 잔고가 바닥이었던 학생 시절부터 늘 여행을 다니던 나는 

그럼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스러웠던 아이였을까?

분명한 건 여행은 그저 떠나고 즐기러 가는 것이 아니라 

터진 부위를 채우러 간다는 사실이다.


-지금 시작하는 여행스케치-

2013 / 오은정 / 안그라픽스



알프스 산을 넘을 때 내비게이션에 떴던 길



코로나가 터지기 전 마지막으로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던 것이 2018년 여름이었다.

한창 책을 만들고 있던 나는 멀리 나갈 시간적 여력이 없었지만 매 년 외국에 나가서 새로움을 느끼고 오자던

나의 다짐이 있었기에 그 약속을 지키려 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인 2019년엔 작업을 마무리할 것인가, 나갈 것인가 엄청나게 고민을 했고 빨리 책을 마무리하고 실컷 싸돌아 다니자 나 자신을 위로했다. 그리고 그것이 터진 것이다. 3년간 붙잡고 있던 그림책을 2020년에 출간했지만 소위 '마감 샤워'를 제대로 하진 못했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천공항에 종종 가서 원고를 집필했던 난,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공항과 외국은 기약 없이 마음속에 남았다.



여행을 다니며 우연히 만난 전시는 단비와도 같다


짝꿍의 조카는 2020 학번이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코로나 학번이 된 것이다. 정말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 미술대학 새내기가 되었건만 학교 실기실에서 그림조차 그릴 수가 없다. 요즘 시대에 해외여행은 국내여행만큼 흔해졌는데도 코로나 때문에 나갈 수 조차 없다. 젊음이 부럽다며, 대학 새내기가 부럽다며, 응원했던 나도 더 이상 뭐라 말해 줄 수가 없다. 백신 이후에 해외여행은 안정화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인종차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할까? 동양인에 대한 나쁜 인식이 생겼을까 봐, 마음 놓고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된다.



유럽 전역을 캠핑하며 만 키로 이상을 운전했다


인터넷엔 여행을 회상하는 이야기들이 넘친다. 물론 국내 여행은 조심스럽게 다녀볼 수 있지만 해외는 무용담이 되어 버렸다. 백신을 맞고 벌써부터 움직이는 이들도 있지만 글쎄... 코로나는 여전히 퍼지고 있고 심리적 안정은 시간이 더 지나야 가능하지 않을까. 



뉴욕을 하루 종일 거닐었지만 어떤 나라든, 시간은 늘 아쉽다.


만일 내가 자녀가 있다면 가장 먼저 돈을 써야 할 곳은 여행이다. 이런 결론을 내린 이유는 이 나이까지 살면서 내 인생의 분기점은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나에게 도피나 떠남 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지러 가는 것이었다.

짧은 여행도, 긴 여행도, 언제나 나를 성장케 했다. 그다음은 책을 읽었던 건데, 여행과 책 중에 무엇이냐 묻는다면 단연코 여행이 앞선다. 여행은 관광지에서 인증샷을 찍는 걸 말하지 않는다. 여행지를 선정하고 그 나라의 문화를 알아보고 비행기를 예약하며 동선을 체크하고 공항에서부터 시작되는 낯선 문화의 경험들이 죽어있던 세포들을 알알이 깨워버린다. 쓰지 않던 근육을 쓰듯 내 몸속 구석구석의 세포와 감각을 다시 재생시키고 활기를 준다.

그런 내가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땐?



음식 경험도 여행이다. 이 손은 짝꿍의 손.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땐, 문득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내 자리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객관적이고 분명하고 또렷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이건 참 희한한 경험이긴 했다. 멀리 다녀온 후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결국 내가 나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주 약간의 단서들을 얻고 오는 것이 여행이었다. 그러니 조카나 자녀나 후배들에게 여행을 권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테니 이것도 매우 주관적인 생각이라는 전제하에)



에어비엔비에서 그 나라의 문화를 가까이 접할 수 있다


나 혼자 여행을 다닐 땐 아무래도 안전과 모험을 두루 챙겼다면, 짝꿍과 다닐 땐 좀 더 모험적인 것을 택할 수 있었다. 굳이 여행지의 취향을 고른다면, 나는 그 나라의 문화와 미술전시를 볼 수 있는 곳을 택했다면, 짝꿍은 대자연을 원했다. 우리가 장기 여행을 떠났을 땐 그 두 가지를 적절히 분배하여 루트를 짰는데, 의외로 매력적인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캠핑장에서 캠핑을 하다가 현대미술관으로 전시 관람을 가는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도 대자연과 문화 경험을 동시에 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는 도심에 산이 있어서 이 부분이 더 쉬울 수도 있겠다.




만년설은 멀리 봤을 때와 가까이 봤을 때가 너무 다르다

그 당시엔 아찔한데, 훗날 기억에 많이 남는 건 역시 길을 잃어서 자연 속을 헤맬 때였다. 내비게이션에도 안 찍혀버리는 구역을 잘못해서 들어가는 바람에 밤이 되어서야 관리원 분들께 도움을 받고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자연 속을 다니다 보면 여러 가지 변수들은 비일비재하다. 관광지가 아닌, 그냥 우리가 가고픈 곳으로 구석구석 다니다 보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가 있었다. 어느 나라건, 퇴직 후 세계일주를 해보겠다는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고 그래서인지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할머니 여행자도 많이 만났다. 자전거를 타고 알프스 산을 오르는 건 그들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 곳곳을 여행하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뻥뻥 뚫린 고속도로로 국경을 넘나들기


그땐 몰랐다. 당장이라도 원하면,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책을 마무리하고 나가려던 계획은 한번 무산되었고, 그다음 책을 또 마무리해서 올해에 출간을 했는데, 이 역시 '마감 샤워'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면서 지난 여행 기억들이 루비에서 다이아몬드로 바뀌려는 참이다. 



그래도 남는 건, 사진과 여행스케치다.

한 번은, 짝꿍과 재미로 여행을 고프로(액션캠)로 주구장창 촬영한 적이 있다. 시시콜콜한 밥 먹는 장면까지 찍어두었는데, 물론 우리끼리 소장용으로 남긴 것이다. 그 당시엔 재미로 한 거라서 그 이후엔 그냥 귀찮다고 안 했다.

지금은 그때 영상이 다이아몬드 급 자료로 느껴진다. (얼마나 흔들면서 찍었는지, 영상 소스로도 쓰기 어려울 정도) 마구 흔들렸어도, 시시콜콜한 대화까지 틈틈이 남겼던 여행 기억을 가끔 꺼내본다. 


외국 여행을 추억하고 있는 지금을 

언젠가 다시 추억하기를 바라며. 나도 할머니 라이더가 되고 싶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래는 다이아몬드 기억을 모았다.

https://youtu.be/MkIg5a6kqTw

여행이 나에게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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