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인물에게는 이름과 생김새와 행동이 주어진다. 그들이 내뱉는 말들은 구체적이고 확고한 활자로 기록된다. 검은 활자라는 수단이자 증거를 통해 인물의 세계가 선명하고 생생해질수록, 독자는 눈앞에 이야기 속 세상을 그려내고 그 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이러한 몰입이 깊어질수록 독자의 독서 경험에서 작가라는 이야기 외부의 존재는 점점 잊혀진다. 하지만 새삼스럽게도 책 속의 세계를 구축한 것은 작가다. 몰입 속에 물 흐르듯 읽어 내려가던 자연스런 문장 흐름을 끊어내고, 단어와 배경 하나하나를 뜯어내 그것이 왜 그 자리에 존재했어야 하는지 굳이 의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작가가 숨 쉬고 인지하는 세계가 비로소 보인다. 작가는 다른 인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지만, 거짓된 얼굴로 자신을 없는 셈 치지는 않는다. 독자가 그걸 들여다보지 못할 뿐이다.
무대 천장에는 세 조각으로 찢긴 소설의 페이지 같은 세트가 매달려있다. 관객 중 학창 시절 <제인 에어>나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을 들어보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또한 해당 소설들의 플롯은 수많은 형태로 변용되어 세상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무대 세트는 너무 많이 들어 다 안다고 생각했던 플롯과 문장들을 낯익음 속에 넘기지 말고, 한번 굳이 조각내 들여다보자고 제안하는 것 같다. 그럼 시대의 기준에 의해 가려지고, 소설의 익숙함 뒤에 감춰진, 브론테 가(家) 세 자매의 삶이 모습을 드러낼 테니.
뮤지컬 <브론테>(성재현 작, 양지해 작곡, 조민영 연출)는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극히 제한되었던 빅토리아 시대, 자유를 갈망하며 치열하게 글을 써 내려 간 세 자매의 이야기를 그린다. <제인 에어>의 저자 샬럿 브론테, <폭풍의 언덕>의 저자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대중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아그네스 그레이>의 저자인 앤 브론테가 그 주인공이다. 2023년 초연되었고, 당시 서정적이면서 중독성 있는 음악과 위로가 되는 메세지에 대한 호평을 받았다. 1년 만에 다시 관객을 찾아온 <브론테>는 2024년 6월 2일까지 대학로 링크아트센터 드림 1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가정의 반항아들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던 미래는 결혼, 또는 가정교사로 고용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둘 다 남편, 아들 또는 자신의 고용주가 집 밖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집 안’에서 가사노동을 하며 타인에게 헌신하는 삶이다. 이 시대 이상적인 여성상을 ‘가정의 천사’라고 부르곤 한다. 하지만 세 자매, 샬럿, 에밀리, 앤은 사회가 규정하는 ‘숙녀다움’에 쉽게 순종하지 않는다. 장례식을 위한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도 벌판을 함께 내달리며 사람들의 눈총을 살 정도로 자유롭고 당차다. 젖은 드레스 끝단도, 헝클어진 머리도 세 자매에겐 흉한 것이 아니다.
무대 위에는 자매들이 살고 있는 요크셔의 시골 마을의 집이 펼쳐져 있다. 자매들의 손길이 닿은 정갈함을 표현하듯 목재로 된 각 잡힌 책상과 책장, 계단들은 서로 균형 있게 놓여있다. 하지만 이와는 대비되게, 거칠게 깨어진 창문과 흔들리는 촛불들, 어지럽게 펼쳐진 흰색 천들은 엄격한 사회적 규율에도 차마 정돈되지 못한 세 자매의 열정을 드러내는 듯 하다. 동시에 깨어진 창문은 <폭풍의 언덕> 속 캐서린의 유령이 말을 걸던 창문을 연상시키고, 흰색 천들은 <제인 에어> 속 로체스터가 제인에게 선물한 결혼 베일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작품의 대사나 가사, 무대 곳곳에 녹아든 소재들은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을 연상시키며 무대 위 인물들이 ‘브론테 자매’라는 구체적 전제를 너무 직설적이지 않게 드러낸다. 그리고 무대 한 켠에 놓인 책장과, 책상 위에 이리저리 흩어진 종이들은 그러한 명작을 탄생시키기까지 세 자매가 얼마나 ‘글쓰기에 미친 인간들’이었는지를 증명한다.
채도 낮은 색감 때문인지, 창밖에서 황량하고 바람이 분다는 묘사 때문인지 무대 위의 집에선 통상적인 온기나 생기 대신 왠지 모를 한기가 느껴진다. 벽난로가 있지만, 그 속에 가두어져 타는 불은 너무 미미해 그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다. 얌전히 들어앉아 가사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사회적 의미의 ‘가정’은 브론테 자매에게 생명력 하나 없는 불편한 감각을 뿜어내고, 그런 곳에서 천사가 날아오를 수는 없다.
갑갑한 현실을 이겨내는 방법은, 가상의 주인공이 사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일이다. 상상 속 주인공은 자매를 대신해서 타인이나 사회에 내뱉지 못해 응어리진 말을 대신 소리쳐 준다. 마치 연극이 시작될 때 막이 열리는 것처럼, 자매들은 상상을 시작할 때 무대 위 흩어져있던 흰 천의 양쪽 끝을 서로 잡고 펄럭인다. 세 자매는 제인 에어의 베일과 닮은, 결혼의 억압을 약속하는 소재를 무한한 상상의 수단으로 뒤바꾼다. 삶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서 그들만의 주체적인 방법을 선택하겠다는 의지가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세 자매에게 현재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은 권위와 경제력이 있는 남성에게의 의탁이 아니라, 언젠가 원하는 삶에 도달할 수 있다는 공동의 희망이다.
세 자매는 이렇게 놀이로 시작되어 각자의 글로 번진 이야기를 함께 책으로 출간해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에 몰두하던 중 자매의 집에 도착한 의문의 편지는 흘러가던 일상에 혼란을 가져온다. 자매들이 어떻게 죽는지를 다 지켜보았다는 편지는 샬럿에게 ‘오만과 아집을 꺾을 것’을, 에밀리에게 ‘비난 속에서도 자신을 믿고 글을 쓸 것’을, 앤에게는 ‘당신만이 편지의 발신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을 이야기한다. 각자에게 상반된 내용을 전하는 정체불명의 편지는 서로에게 단단히 의지하던 세 자매가 서로를 질투하고 비난하게 만들며 자매들을 위태롭게 분열시킨다. 이때 등장한 편지의 발신인을 추적해나간다는 미스테리한 요소는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작품이 그저 실존 인물의 교훈적인 일대기로만 느껴지지 않도록 돕는다.
개성 있는 캐릭터와 매력적인 음악
어느 날, 에밀리에게 황야로부터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존재는 자매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준다. <제인 에어>의 제인이 한밤중에 로체스터의 목소리를 듣고 그에게로 향하듯,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가 창밖에서 죽은 캐서린의 목소리를 듣고 늘 문을 열어놓듯, 샬럿과 에밀리는 목소리에 대한 각자만의 응답으로 소설을 창작한다. 극의 제목은 자매들을 <브론테>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을지라도, 사실 자매들의 소설은 서로 너무나 다르다.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각각의 작품 속 인물과 문체가 풍기던 상반되는 인상은 극 중 샬럿과 에밀리의 상반되는 캐릭터와 그대로 연결된다.
실제 샬럿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 속 주인공 제인은 평범한 외모의 고아이다. 하지만 자신과 신분 차이가 확고한 사촌 또는 고용주 로체스터에게도 자신의 권리와 소망을 당차게 주장한다. 마음속에 들끓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위해 안정적인 직장과 혼처를 떠나 주체적으로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제인이 이뤄낸 자유의 중요한 기반은 삼촌으로부터 상속받은 유산이었으며, 자유의 종착지가 로체스터와의 ‘결혼’이라는 점에서 한계점을 지적받는다. 제인이 당시 시대상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행했을지라도, 제도권 안에서 다소 안전하게 현실과 타협했다는 이유이다. <브론테> 속 샬럿도 그렇다. 샬럿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집을 떠나 더 넓은 세계의 자유를 꿈꾼다. 그리고 그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여성이 글을 쓰는 것에 적대적인 시대임에도 브론테 자매의 책을 출간하겠다는 의지를 당당히 밝히고 실행에 옮긴다. 하지만 경제적 목표가 있는 만큼 샬럿은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데 있어 현실과 타협해야만 한다. 당대의 제도권 안에서 훌륭한 작가로서 인정받고 책을 잘 팔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샬럿은 자매가 창작물을 모아 공동으로 책을 내고자 할 때, 남자의 가명을 쓸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들을 부정적으로 ‘낙인’ 찍을 수 있는 에밀리의 야성적인 플롯과 문장들을 제한하고 통제하려 한다. 그것이 아무리 에밀리의 심장에서 우러나온 말과 이야기일지라도.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에서 언쇼 가문의 양자로 들어온 히스클리프 역시 신분 차이에 따른 멸시에 고통받는다. 하지만 히스클리프는 언쇼 가문의 친딸인 캐서린에게 격렬한 사랑을 품는다. 이후 캐서린의 죽음을 전해 듣고는 대를 걸친 복수를 실행하며,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면서까지 유령이 된 캐서린을 기다리는, 사랑을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를 창조한 둘째 에밀리는 ‘악마를 삼켰다’고 불릴 만큼 어둡고 사나운 문장들을 마음이 시키는 대로 써 내려간다.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도 집필을 갈망하는 에밀리에게는 히스클리프의 광기와 같은 애정이 보인다.
하지만 누구보다 인상 깊은 건 자매 중 셋째 앤이다. 앤 브론테의 소설은 샬럿과 에밀리의 소설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극 중에도 앤의 소설인 <아그네스 그레이>에 대해, ‘그런 소설이 있었어?’라고 평가하는 대중의 목소리가 삽입되고, 심지어 소설은 작가의 앤의 이름이 지워진 채로 발간되기도 한다. 앤의 소설을 읽은 이들은 ‘비유가 없다’, ‘학술 서적 같다’는 비판을 쏟아낸다. 극 중 샬럿과 에밀리는 황야에서 들려온, 아득히 멀고 낯선 목소리로부터 영감을 얻어 소설 집필에 파묻힌다. 소설 속 이야기는 실재하는 세상의 비유로서 존재하며, 집필에 매달리면서부터 샬럿과 에밀리가 기반을 두는 건 소설 속 비유적 세상이다. 하지만 앤의 경우 조금 다르다. 앤은 에밀리가 들은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로부터 영감을 얻지도 못해 속상해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성격과 지향점 탓에 갈등하는 샬럿과 에밀리 사이에서 유일하게 양쪽의 입장을 듣고 중재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황야의 낯선 목소리 대신, 일상 속 자매들의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진심으로 이해하는 인물인 셈이다. 샬럿과 에밀리가 소설을 쓰며 현실을 닮은 환상의 세계와 극한의 인물들을 볼 때, 앤은 늘 곁에 존재해 온 소소한 행복과 자유로움의 가치를 종이 위에 이야기한다.
뮤지컬 <브론테>는 자매들이 이뤄낸 소설이라는 성취와 그 안의 비유적 세상을 넘어 소설을 쓴 자매들의 삶을 들여다보기를 제안하고 있다. 그 점에서 관객이 극을 보는 시선을 형성하는 데 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당대의 사회적 기준 속에 크게 인정받거나 화제가 되는 인물만이 후대에까지 전해진다. 그 기준으로 브론테 자매를 알기에 관객의 시선 밖에 놓이곤 했던 앤 브론테는 뮤지컬 <브론테> 안에서 누구보다 가까이 관객과 맞닿는다. 시대의 기준에, 소설의 익숙함에 가려졌던 자매의 일생을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본다는 작품의 의도를 어느 순간 가장 크게 와 닿게 하는 캐릭터는 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선명한 개성을 가진 캐릭터들의 매력을 배로 살려주는 것이 음악이다. 세 자매가 서로가 있음에 온전하다는 점은 그들의 화음이 돋보이는 곡들에서 전제된다. 또한 그 속에서 샬럿과 에밀리를 표현할 때 사용되던 현악기의 부드러운 선율과 에밀리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거친 드럼의 비트는 화합 속에서도 돋보이는 세 자매 각각의 개성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직관적으로 심장 박동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드럼의 활용이 아무래도 가장 와닿는다. 드럼의 비트는 글을 써서 꿈꾸던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세 자매의 설렘을 표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긴박하게 표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는 인물들이 가진 입체적인 정서를 효과적으로 객석까지 확장한다. 또한 클래식한 악기와 화음 위로 얹어지는 현대적인 드럼의 느낌은 자매들이 살던 과거와 관객의 현재가 맞닿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더불어 ‘써 내려 가’와 같이 짧고 핵심적인 가사의 반복과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맞물린 넘버들은 서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관객들의 머릿속에 중독성 있게 각인된다.
제인 에어의 완성, 이야기를 넘는 이야기
물론 세 인물 모두가 매력 있지만, 극의 구조상 샬럿의 서사가 전체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작용하는 느낌이 든다. 극의 마지막까지 남아 자매들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인물이자, 극의 핵심 요소인 편지의 실체를 정리하는 인물이 샬럿이기 때문이다. 샬럿의 삶의 태도뿐만 아니라, 무대 위 표현되는 그녀 일생의 구조 역시 <제인 에어>를 닮았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로체스터 소유의 손필드 저택을 떠난 제인은, 고난 끝에 진정 소중한 가치를 찾아 다시 손필드로 돌아온다. 하지만 제인을 기다리는 것은 불에 타 폐허가 된 손필드의 광경이다. 극 중 샬럿 역시 동생들에게 모진 말을 남긴 채 자신의 삶을 찾아 요크셔의 저택을 떠나지만, 결국 자매들에겐 서로가 가장 소중했음을 깨닫고 다시 돌아온다. 그런 샬럿의 눈 앞에 펼쳐진 건 앓으며 죽어간 동생 에밀리와 뒤이어 세상을 떠난 앤이다. 심리적인 폐허가 아닐 수 없다.
샬럿은 세 자매의 일생에 자신이 ‘악역’이었다 표현하며 고통스러운 자책 속에 빠진다. 샬럿의 후회가 나타나는 동안 무대 전체는 조명 빛으로 새빨갛게 물든다. 마치 소설 속 손필드를 태운 불길이 요크셔의 집마저 집어삼키듯. 샬럿은 극의 초반부터 ‘확 불태우고 싶다’며 집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다. 샬럿에게 만큼이나 <제인 에어>에서 ‘불태움’은 중요한 요소이다. 소설 속 로체스터는 난폭함을 보이는 아내 버사 메이슨을 ‘광인’이라 낙인찍고 집의 깊숙한 방에 감금한다. 버사는 저택에 불을 질러 로체스터를 무력화시킬 때 비로소 로체스터의 통제를 상징하는 방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녀의 죽음이다.
자매들을 잃은 샬럿은 자신이 안정적인 성공을 위해 기존 가부장적 사회의 관점으로 에밀리의 욕망을 광기로 낙인찍고 억압했음을, 즉 자신이 오만한 로체스터였음을 깨닫는다. 편지가 자신을 향해 경고한 ‘아집과 오만함’의 의미 역시 이때 밝혀진다. 불같이 맹렬한 후회는, 샬럿의 의식 속에 존재하며 샬럿 자신과 에밀리, 앤의 행동 또는 사고 범위를 통제했던 작은 방 전체를 태운다. 그렇게 샬럿은 자신 안의 로체스터를 무력화시킨다.
하지만 <제인 에어>가 샬럿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소설 속 버사는 화재 이후 죽음을 맞았지만 샬럿은 상징적 화재 이후 살아남아 스스로 <제인 에어>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샬럿은 자신의 진정한 자유가 기성 사회로부터의 인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매들과 함께 꿈꾸던 순간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샬럿은 자신의 자유의 근간과 종착지를 삼촌의 유산 상속이나 로체스터와의 결혼이 아닌, 자매들 간의 연대로 설정한다.
모두는 독자이자 필자이다
작품에서 기억에 남는 점 하나는, 안내방송에서부터 관객들을 ‘독자’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그 위에 호명되는 ‘독자’라는 다른 이름은 자연스레 ‘독자’라는 명칭의 의미를 고민해보게 만든다.
독자는 늘 한 발짝 늦는 사람인 것 같다. 글은 이미 출간되어 있고, 그 후 그 행간을 추론하는 사람이 독자이다. 그리고 어떤 의견이 있든 간에 소설을 보는 동시에 소설을 수정할 수는 없다. 브론테 가에 도착한 의문의 편지에 대해, 자매들은 ‘독자’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주어진 말들은 고칠 수 없는, 이미 내려진 어떤 선고 같다.
하지만 후에 밝혀지기로, 의문의 편지는 샬럿이 미래에서 보낸 것이다. 결국 샬럿은 자기 자신의 독자였던 셈이다. 미래는 내다볼 수 없는 시간이고, 누구에게나 불안하게 다가온다. 미래는 막연한 희망을 선물하는 시간이자, 그 자리에 원하던 성공이 없을 것이라는 불안함과 조급함을 부여하는 시간이다. 불안정한 미래는 개개인을 독자로 만들어버린다. 자신에 대한 어떤 선고가 이미 선명하게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고, 현재의 나는 그것에 얽매여 ‘지금 이 순간’을 희생한다. 하지만 자신의 편지에 자신이 고통받는 샬럿의 모습처럼, 그 모든 선고와 집행은 개인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자의적 판단으로 인해 벌어진다. 사회가 금지한 행동에 모든 것을 쏟던 세 자매에게 미래가 주는 불안 또는 희망은 더욱 극대화되어 다가왔을 터이다.
극의 마지막 부분, 편지의 필자가 미래의 샬럿이라고 밝혀지는 순간은, 독자라고 생각한 존재가 사실 필자임이 밝혀지는 전환의 순간이기도 하다. 편지의 주인을 알고 난 샬럿의 곁에는 세상을 떠난 에밀리와 앤이 찾아온다. 그들은 어릴 때 함께 하던 상상의 역할놀이를 다시 함께 한다. 이전과 그 내용은 조금 다르다. 이번엔 자신을 비난했던 평론가와 독자들에게 조목조목 속 시원하게 맞서는 역할놀이다. 수많은 기성 권력층과 비평가들이 던지는 평가의 수동적인 독자였던 이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써 가는 필자가 된다.
책이 세상에 한 번 나오면, 원래 없던 것처럼 삭제하고 다시 수정할 수는 없다. 그건 독자에게도, 필자에게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독자로서 기존의 소설을 읽고 남겨둔 채, 필자로서 다시 새로운 글을 써 내려 갈 수는 있다. 그것이 역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며, 사람들이 역사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제인 에어>는 수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샬럿은 이를 남겨둔 채 스스로의 삶을 통해 더 발전된 <제인 에어>를 새로 썼다. 실존 인물인 브론테 자매의 삶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 나중에 추가될 수는 없으며, 죽은 자를 되살릴 수도 없다. 하지만 자매의 삶은 극장에서 하나의 텍스트, 하나의 소설이 되어 관객이라는 독자들에게 읽힌다. 샬럿이 어떻게 ‘끝난 이야기’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쓰는지를 함께 지켜보았던 든든한 독자들에게.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세 자매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남아 자신과 비슷한 상황의 이들에게 닿기를 기원한다.
<브론테>는 일찍 세상을 떠난 브론테 가의 다른 자매들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샬럿과 에밀리, 앤의 장례식은 끝내 행해지지 않는다. 자매의 일생을 읽어낸 관객이라는 독자들이 이야기에서 얻은 용기와 희망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의 필자가 된다면, 브론테 세 자매는 독자의 마음속에 되살아나고 그들의 삶과 연결되며 영원히 상징적으로 살아 숨 쉬게 될 것이다.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무대 천장에 매달린 찢겨진 페이지의 조각들이 세 개라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기존 사회가 당연하다는 듯 부여한, 여성으로서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서사를 자매들은 반항적으로 찢어냈다. 그리고 온전한 한 페이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세 조각이 맞춰져야만 하는 것처럼, 그들이 써 내려 간 새로운 삶의 이야기가 온전히 전해지기 위해서는 세 자매의 연대가 필요했다. 그렇게 남아 전해진 이야기는 ‘브론테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된’ 수많은 관객들과 또다시 연대하게 될 것이다. 그 이후에는 또 어떤 삶의 이야기들이 나오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