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들어서면 빈 무대엔 빈 의자 네 개가 놓여 있다. 객석 쪽을 마주보고 놓인 짙은 갈색 의자 네 개. 그리고 당연히, 관객이 앉는 쪽에도 객석이라는 의자가 놓여있다. 무대 이쪽과 저쪽은 거울을 보듯 닮은 채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지난 6월 16일 개막한 극단 여행자의 연극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김도영 각색, 이대웅 연출)은 1905년 발표된 나쓰메 소세키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고양이의 시점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세상을 바라보고 풍자하는 것이 주된 설정이다. 극을 시작하기에 앞서 배우가 대놓고 언급하듯 ‘작품이 너무 방대해’ 원작의 모든 내용을 다 담아낼 수는 없었던 연극 작품에서는, 영어교사인 구샤미와 그의 제자 간게쓰, 그리고 미학자 메이테이를 중심으로 인간이 내세우는 귄위와 지식, 예술의 허상성에 초점을 맞춘 듯싶다. 지난 공연 이후 5년만에 재공연되었다는 작품은 여전히 극단 여행자만의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재해석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연극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포스터
공연에는 총 네 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그 중 일부 배우들이 장면 안에서 배역을 연기할 때, 나머지 배우들은 무대 뒤 의자에 앉아 장면 속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곤 한다. 관객의 전유물이던 ‘관람’ 행위가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게다가 배우들은 객석 가까이에서 관객들을 향해 말을 걸듯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제 4의 벽’을 뚫고 긴밀한 소통을 시도한다. 실제로 관객에게 원작 도서를 넘겨주며 극 중 등장해야 하는 문장을 관객이 직접 발화하도록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오히려 객석 바로 앞에 위치해야 할 ‘제 4의 벽’이 무대 뒤 의자 쪽으로 밀려난 느낌마저 준다. 통상적인 관객의 행위와 배우의 행위, 관객의 위치와 배우의 위치를 전복시킴으로써, 관객으로서 가장 익숙했던 행위를 가장 낯설고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시선은 어쩌면 극 중 우리 인간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시각과 맞닿아있을 지도 모른다.
허상성을 비판하는 자의 허상성
공연의 시작은 배우들이 너무도 명확하게 이 작품이 ‘연극’이고 그들이 연기하는 것이 ‘배역’임을 고지하는 것에 있다. 특히나 배우들은 고양이 역을 맡을 때, 자신이 ‘고양이’임을 명확하게 재현해내기 위해 분장이나 움직임으로 애를 쓰지 않는다. 단순히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마주하던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어투와 겉모습 속에, ‘나는 고양이’라고 말하는 대사 또는 노래 가사로 자신을 정의할 뿐이다. 이는 인간 배우와 고양이 사이의 일치의 불가능성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배우가 취하는 행위들에 대한 표면적인 익숙함을 통해 그 지점을 쉽게 잊도록 만든다.
공연은 관객들을 극 중 등장하는 ‘인간’들 보다는,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고양이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듯하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 고양이의 경우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어투로 관객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준다. 그래서 관객은 그들의 이야기를 ‘이질감 없이’, ‘의심의 과정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작품 속 이야기의 대다수는 전적으로 고양이의 시점이며, 그들은 이야기를 서술하며 객석의 관객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관객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고양이가 바라보는 ‘인간’들, 구샤미와 메이테이, 간게쓰 역을 연기할 때 배우들은 오히려 과장되고 양식화된 연기 방식을 선보임으로써 이들을 ‘어색한’, ‘우스꽝스러운’ 존재, 즉 우리와 다른 존재로 만든다. 이에 더해, 새로운 인간 등장인물이 처음 관객에게 보여질 때, 예상하지 못한 난데없는 분위기의 음악이 등장하며 웃음을 유발하고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 인물들을 쉽게 풍자하고, 비웃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도 한다. 또한 그들은 고양이가 서술하는 이야기 속의 인물로, 고양이의 서술을 한 번 거치기에 객석의 관객들과는 일정 정도 이상의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관객들이 느끼기에 무대 위 ‘인간’ 들은 자신과 구분되는 타자로. 쉽게 비판하고 풍자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극에 등장하는 예술적, 학문적인 권위, 지식을 가진 인간들은 세상에 실재하지 않는 것을 대단한 것인 양 지어내고, 그것에 권위를 부여하고, 믿는다. 극은 초반부 부터 이렇게 인간이 거들먹거리며 믿고 추구하는 것의 허상성을 지적한다. 특히 미학자 메이테이가 그림에 대한 거짓된 정보를 말해줌으로써 발생한 허상의 생성 양상이 또한번 미학자를 통해 반복되는 것은 예술을 향유하는 인간의 모습을 명확한 하나의 비판점으로 두는 것 같다.
하지만 무대 위 뿐만 아니라 객석에도 '예술'을 향유하는 인간이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관객이 ‘고양이’를 익숙하고 친밀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는 모순적이게도 그가 가장 ‘인간스러운’ 어투와 움직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고양이’ 역을 네 명의 배우가 서로 교대하면서 맡거나,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며 객석에 조명을 비추어 객석의 존재를 드러내는 부분들, 극 중 시대상과 맞지 않는 현대의 유행어, 밈 등을 활용해 웃음을 유발하는 부분들은 극 중 곳곳에 삽입되어 관객이 극 바깥으로 시선을 넓힐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고양이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며 ‘자신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어 인간과 소통할 수 없다’고 하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모순과 이질감은 역으로 고양이 역의 배우가 너무도 인간의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인간들을 비판하는 관객 역시 인간이며, 관객 역시 ‘가정’을 통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허상’을 만들어내고 그의 말을 믿으며 연극을 관람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극 중 인간을 비판하던 시선은 관객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또한, 내용적으로도 인간의 일화들과 고양이의 일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서로 유사한 양상을 취함으로써 구분이 어려워진다. 교사의 고양이 역시 다른 고양이에게 ‘선생님’이라 불리는 것,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간게쓰와 사랑하는 고양이, 미케가 있는 서술자 고양이를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점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고양이가 인간의 행위를 보며 그들이 열중하는 것의 무의미함과 우스꽝스러움을 비판하던 구조는 후반부에 고양이가 아닌 인간인 간게쓰가 말도 안 되는 주제의 박사눈문을 거창한 말들로 수식해 읽어내려갈 때, 인간인 구샤미와 메이테이가 그 장황함과 허무맹랑함을 견디지 못하는 구조로 이어진다. 인간으로서 비판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 되어 사고가 촉발되는 경험을 형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의 맞물림으로 촘촘하게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고양이의 시간, 연극의 시간
극 중 고양이는 말한다. 자신의 수명은 인간의 수명보다 짧다고. 그래서 고양이의 일상에는 생각하고, 다른 이의 권위 행사에 억울해하고, 사랑하고, 감정을 느끼는, 인간의 일상과 다름없는 삶의 요소들이 나열되는 것 같지만, 그 사이에 자신과 주변 요소들의 '죽음과 소멸'에 대한 인지가 끼어든다. 인간이 미처 가까이 인지하지 못하고 오늘의 이 순간을 살아가는 동안 서술자 고양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고양이 미케를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의 죽음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다.
그 두 존재가 느끼는 소멸의 인지에 따른 시간의 차이는 인간과 고양이의 이야기 서술 속도의 차이에서 직관적으로 보여진다. 인간 인물이등장해 이끌어가는 상황들은 주로 특정 상황의 재현이며, 서로간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 비교적 길고, 그 순간의 세부적인 상황에 자세하게 집중하게 만든다. 반면에 고양이의 서술은 제 삼자로서의 대략적인 서술로, 상황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는 요약적이고 속도감있다. 고양이 서술자의 역할을 하는 배우들이 계속 바뀌는 것도 인상깊다. 교사, 미학자, 그리고 교사의 제자 역할을 하는 배우는 대부분 고정되어있는 반면, 고양이의 역할은 모든 배우가 돌아가며 맡는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각각의 역할이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지만, 고양이의 시선은 이처럼 형식상으로도 소멸을전제한다. 그렇게 인간과 고양이의 두 시선은 분리된다. 하지만 인간을 연기했던 배우들이 최소한 한번씩은 고양이 역할을 맡음으로써 그 인간의 안에도 결국은 소멸이 내제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런데 모든 게 끝난다는 걸 알고있는 고양이의 시선만이 인간이 지금 추구하는 것의 허상성을 감지하고 비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사색적인 고양이에게는 이름이 없다. 인간이 아직 지어주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이렇게 소멸의 필연성을 전제로 하는 시선이 자신에게도 내제되어 있고, 주변에 늘 존재해왔음에도 인간들이 주요한 관심을 가지고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어쩌면 다 같은 운명 속 특정 직위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의허무함을 드러내며, ‘고양이’ 라는 더 큰 범주로 정의되는, 작아 보이지만 오히려 더 본질적인 시선을 가진 누군가를 제시하기 위함일 지도 모르겠다.
극 중에서는 사계절이 흐른다. 그 사계절을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연극의 러닝타임은 110분 남짓이다. 공연 시작 전 안내사항에서도 공연의 러닝타임을 정확히 공지하고 있다. 또한 본격적인 극을 시작하기 앞서 배우들이 원작에 대한 정보와 극의 진행 방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그들이 인물이 아닌 배우로서 기능하는 세상이 있음을 드러낸다. 이와 더불어 관객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연극임을 알려주는 다수의 장치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110분이 흐르면 무대 위 모든 세계가 끝나고 배우들이 역할 밖으로 나오며 한 세계가 소멸될 것을 인지하게 한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무대 위 인물들이 겪는 순간 그 자체만을 보기보다는 한발짝 밖에서 배우들과, 관람하는 자신이 행하는 행위의 의미를 돌아본다. 존재의 유한함을 알고서 인간군상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시선은 끝날 줄 알고도 무대 위 인물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닮아 있다.
극의 마지막 부분, 네 명의 배우는 무대 앞쪽에 나란히 서서 한 고양이의 대사를 나누어 발화한다. 이는 ‘대놓고’ 이 모든 것이 ‘역할’을 연기하는 ‘연극’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진지하게 마음이 동하는 것은 허상의 옷을 입고서라도 극장의 모두가 ‘고양이’의 시선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 아닐까. 작품의 마지막 대사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다. ‘작품의 제목’을 상기시키고, 배우와 배역의 불일치를 보여주며 이 세계의 명백한 소멸을 인지시키는 요소이다. 그와 동시에, 인간 안에 각인된 고양이의 시각을 상징적으로 일깨워주며, 익숙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극장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한다.
극단 여행자의 연극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연극이 가정과 상상력, '불신의 중지'를 통해 진행된다는 그 익숙한, 너무 익숙하기에 잊어버리고 했던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관객 개인에게 가장 익숙한 세계와 그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는 하나의 ‘경험’을 탄생시킨다.
공연의 첫 시작 부분, 배우들이 반주에 맞추어 ‘나는 고양이’ 라고 자신을 정의하는 일반적인 뮤지컬의 ‘아이엠송’은 배우들이 허구를 만들어내기 위한 시작점이다. 마지막 부분에도 같은 노래가 나오는데, 이번엔 외부에서 미리 녹음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배우들은 그 목소리를 따라 노래를 부르다가 결국은 자신만의 가사없는 노래를 부르게 된다. 이는 연극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제공하는 연극적 환상을 따라가다가 결국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될 기회를 얻고 극장을 나가는 관객의 태도를 상징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