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en Mar 19. 2023

부재의 존재를 직면하다: 연극 <부재자들의 회의> 리뷰

2022 SPAF 초청작, 독일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의 문제적인 작품

    공연이 시작되고 관객을 맞이하는 것은 현실을 지워내는 암전도, 환상의 한복판으로 관객을 이끌고 갈 박진감 넘치는 배우의 목소리도 아니다. ‘부재자들의 회의에 오신 걸 환영한다’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기계로 조합된 듯한 여성의 음성은, 그 나름의 재치와 농담으로 관객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회의를 안내해나간다. 하지만 인간인 듯 인간이 아닌 이 목소리는 감탄사나 농담 등을 통해 인간처럼 ‘자연스러우려는’ 노력이 보일수록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것이 대리하려는 인간과 가까워지려 할수록 오히려 더 멀어지는 셈이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특정 환상에 빠져들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대리의 불가능성과 역설을 그 이유도 모른 채 머리보다 순간적인 감각으로 먼저 느끼게 한다.

    2022년 SPAF(서울 국제 공연예술제)의 초청작으로 공연된 독일의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의 <부재자들의 회의>(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2022.10.20.~10.23.)는 그 제목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작품을 하나의 ‘회의’로 규정한다. 무대에는 연설을 할 수 있는 연단과 커다란 스크린이 놓여 있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 발표를 하는 자들은 공연장으로 오지 못했다. 교통수단을 통해 해외 먼 곳에서 한국의 공연장까지 도달하는 행위가 환경오염을 가속화시키기 때문이기도 하고, 장애 또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작품은 무대로 올라가 그들을 대신해 줄 ‘대리인’을 객석에서 선발한다. 온라인 환경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당사자가 등장하지 않는 회의가 가능할지에 대한 실험을 한다는 안내 하에서 말이다. 연극 또는 예술작품이 아닌 ‘회의’, ‘실험’이라는 규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수동적 관람이 아닌 능동적 경청과 사고를 하게 한다. 재현적 연극에서 제 4의 벽에 가로막혀 극 속 상황에서는 거의 ‘부재자’와 다름없었던 관객의 주체성을 깨우고 무대 위에 존재시켰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연극 <부재자들의 회의> 무대, SPAF 공식 홈페이지 제공.

    대리인은 무대에 올라가 부재자가 남겼다는 활자 대본, 또는 그 활자 대본을 읽어주는 목소리가 녹음 된 헤드셋을 제공받는다. 각각의 수단을 통해 제시되는 대사는 그대로 발화하면 되고, 제시되는 지시문 역시 그대로 따르면 된다. 무대에 올라가기 위해 사전에 준비된 사람이 없다는 점은 다소 당혹스럽게 느껴진다. 뒤이어 공연이 진행됨에 따라 ‘부재자’들이 보내왔다는 대본을 난생 처음 읽으며 더듬거리는 사람들에게서 오는 이질감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그리워하던 것이 당사자 그 자체가 아닌, 훈련된 배우가 줄 수 있는 발화와 감정의 매끄러움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실 대다수의 연극에서 이미 이야기의 당사자가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관습으로, 모두에게 익숙하다. 관객들이 느끼는 어색함은 애초에 ‘부재자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배우라는 매개를 통해 드러나는 ‘준비된 대리 행위’의 부재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품은 코로나 이후 비대면 만남이 부쩍 늘어난 관객의 삶과 맞닿은 환경 속에서, 관습적으로 부재되어 왔던 관객의 주체성을 불러온다. 그럼으로써 공연에서 당연시되었던 당사자의 부재에 대한 인식의 기회를 제시한다. 그렇게 이 두 가지 부재를 동시에 활용하여 작품은 ‘누가 누구를 대리할 수 있는가?’, ‘대리란 가능한 것인가?’ 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관객 참여와 색다른 진정성

    극의 진행에 있어서, 객석에서 대리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거나 하는 방식으로 의사를 표시한다. 많은 이들이 대리인이 되기를 희망할 시, 기계음 섞인 여성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조건은 단 하나다. “관객 분들이 알아서 정해주세요.” 처음에는 영문도 모른 채 단순히 ‘가위 바위 보’와 같은 간단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대리인 선발’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은 공연이 진행되면서 드러난다. 세 번째 대리인을 선발할 때, 회의를 진행하는 목소리는 대리인이 되기 위한 조건들을 제시한다. ‘인간 생명체라면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조건을 통해 자리에서 일어난 모든 관객들은, 연이어 제시되는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대학 학위가 없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등의 점점 까다로워지는 조건을 거치며 대다수가 자리에 앉는다.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자신이 곧 자리에 앉게 될까, 누군가 남게 될까 궁금해 하는 관객들의 사고에는 ‘어떻게 하면 빠르고 공정하게 대리인이 될 기회를 나눠가질까’라는 지원자의 권리에 관련된 질문뿐만이 아닌, ‘대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대리자가 적합한지’에 대한 질문이 끼어든다. 

    동시에 공연 내내 무대의 양 옆에는 공연의 진행과 음향 장비를 담당하는 스탭들이 앉아있고, 객석의 1열에서는 영상감독이 커다란 카메라로 무대 위와 객석을 촬영한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관객에게 그대로 드러난다. 스탭이 마이크를 설치함을 통해 발화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촬영하는 것이 실시간으로 무대 뒤 스크린에 비춰진다는 점에서 공연은 연극 결과물이 아닌, 연극이 만들어지는 각각의 ‘과정’을 해체하여 드러낸다. 그 과정 속에 대리를 준비하는 대리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포함되어 무대에 선 사람은 타인을 대리하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끝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 위로 스피커를 통해 얹어지는 ‘부재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는지’, ‘누군가를 대리하는 것이 가능한지’와 같은 질문들도 끊임없이 대리의 역할과 가능성에 대한 논점을 던진다. 

    그리고 이 모든 논점에 대한 사고는 온전히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목소리가 제시하는 까다로운 대리인의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없어 부재자의 발표를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거나, 혹은 그렇게 해서 대리인이 선발되더라도 앞선 대리인들과 마찬가지로 처음 보는 대본에 대한 대리의 미숙함을 보여주기에 '누가 누구를 대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의 결론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이 회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관객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 역시 한 군데에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곳곳에 달린 스피커를 객석 전반에 흩어지는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관객이 사고를 의탁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이 컨퍼런스의 구성에 있어서도 중요한 요소 하나가 빠져 있다. 바로 ‘발표자들의 토론’이다. 이는 발표자가 아닌, 발표자를 뽑기까지의 객석의 토론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작품 구성에서도 드러내는 것이다. 이처럼 관객 참여를 이끌어내려는 다양한 시도들과 동시에 무대 위에는 모든 활자에 집중하면서 부재자의 지시문과 대사를 그대로 따르려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실 이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주어지는 불이익이 없을뿐더러, 관객은 대리인이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턱이 없다. 하지만 늘 재현적 공연의 암전된 객석 안에 숨어있던, 극장의 권위 아래 ‘말 잘 듣는’ 관객의 모습이 무대에 제시되는 셈이다. 주체적 사고와 토론의 기회가 주어지면서 이와 대비되어 더욱 강조되는 관객의 ‘순응의 관습’은 관객이 매번 일어나는 ‘배우의 대리행위’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게 된 배경을 보여주는 듯하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역대 작업들 중에는 '당사자가 무대에 올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는', 즉 '연기의 전문가’가 아닌 ‘일상의 전문가'들이 공연을 한다는 점이 눈에 띄기도 한다. 전문적인 연기를 훈련받지 않았을지라도 사람들 모두가 누구나 자신의 삶에 있어서는 가장 전문가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매끄럽게 재구성된 ‘대본’을 통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대리인이기도 하다. 부재자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대리인인 셈이다. 무대에서 이야기하는 중 발생하는 그들의 실수나 예상되지 못한 휴지, 또는 어색한 말투 같은 정돈 속에 드러나는 비정돈은 관객으로 하여금 주체적으로 진실을 찾게 한다. 하지만 <부재자들의 회의>의 경우, 대리인들은 연기가 아닌 부재자들의 삶의 측면에서도 누구보다 '비전문가'이다. 첫 대리인이 무대에 오를 때 분명히 확인하는 조건 하나가 '당신은 이전에 이 대본을 접한 적이 없다는 것이 확실합니까?' 라는 점에서 그것이 의도임이 드러난다. 대리인들은 모두 생전 처음 접하는 낮선 사람이 쓴 낯선 문장들을 발화해야 하는 것이다. 주어진 활자를 읽느라, 음성을 듣느라 일정 시간을 두고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휴지는 정돈된 재현의 시도를 어색하게 만들고, 자신의 삶을 가지고 들어오는 대리인의 말하기는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오히려 부재자와 대리인 사이의 격차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부재자들의 회의>는 극단이 행해왔던 대표적인 방식에 대한 기대를 전복시킴에 따라 지금껏 쉽게 인지하지 못했던 ‘대리 행위’의 존재를 더욱 선명히 마주하게 한다.



각자의 시선 안에서

    극 중 몇몇의 부재자들은 사회적 약자이다. 러시아에 속한 ‘사하 공화국’에 살고있는 ‘사하인’ 타마라는 사하의 언어가 있음에도 학교에서는 ‘공용어’로 러시아어를 배우고, 직장에서는 러시아인 아래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사하인이 아닌 ‘러시아인’이라 불린다. 판트케는 장애로 인해 회의장까지 올 수 없었고, 유대인인 샐리는 히틀러 정권 아래 목숨을 구하고자 자기 자신을 독일인으로 속이고 살았다. 바하티는 ‘국가 이전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유럽의 보호소에 발이 묶여 있는 난민이다. 란달은 남성 중심적인 우주 비행사의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여성으로, 우주에서의 여성의 몸을 연구하러 떠났다. 이 점에서 관객이 부재자와 '같은 위치'에서 대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기도 한다. '당신의 주변에서 반유대주의를 경험한 적이 있나요?'라는 샐리의 질문에 객석의 누구도 손을 들지 않는 것에서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자신이 모르는 단어나 잘 들리지 않는 문장에서 얼굴을 찌푸리거나 말을 더듬는 대리인들의 모습, 발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된 부재자의 이름이나 부재자가 속한 사회 속의 어느 명칭을 발음하기 위해 주저하는 대리인의 모습은 부재자와 대리인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다른 사람임을 드러내지만은 않는다. 연극은 '극장 안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제공되어야 하기 때문에 부재자의 모든 말들은 ‘한글’ 변역으로 통일되었다. 한글로 쉽게 접한 단어가 아니면 불편함을 드러내는 대리인의 모습은 타마라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들 기준에서 낯선 ‘사하인’이 아닌, 익숙한 ‘러시아인’으로 불렸던 상황과 연결된다. 극장 안의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발음이 비슷한 ‘터키어’가 아닌 ‘사하어’임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타마라의 소망을 한국어로 읽는다. 난민 바하티가, 자신의 기억 속 극장에 관한 좋은 기억을 '백성들의 믿음 끝에 독재자가 마음을 새로이 가지게 된다'는 내용의 연극을 본 순간으로 정의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작품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극장이라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사람들끼리의 계약과 소통이 극장에 부재하는 이들과 극장 밖 사회까지 연결될 수 있는지를 묻기도 한다. 극중에는 대리인과 객석의 관객들이 함께 소통하는 감각적이고 감동적인 순간들이 있다. 판트케의 원고는 관객에게 일어서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라 명령한다. 그러다 일정 시간이 지나고 음악이 뚝 끊기면 관객은 자리에 그 순간의 자세 그대로 멈춰야 한다. 판트케에게 돌연 찾아온 마비의 감각을 관객이 신체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다. 그는 후에 멀리의 자신에게도 전해질 수 있도록 관객에게 타이밍을 맞춰 발을 굴러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한다. 한 번에 수십 명의 관객이 발을 구름으로서 발생하는 극장 전체의 진동은 전율로 다가오며 지구 반대편의 판트케와 닿았을 것만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하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앞서 언급한 샐리의 질문에 몇 명이나 손을 들었는지 기록한 엽서를 샐리에게 전해줄 것이라는 말이 대리인을 통해 전달됨에 따라 그 전율은 의의를 의심받는다. 부재자와의 소통은 ‘극장 밖’을 여행할 엽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인지되며 관객 내면의 시선은 극장 밖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리인을 선발한 과정, 대리인을 통해 부재자와 소통한다고 믿었던 모든 과정은 결국 극장 안 사람들만의 관계맺음이라는 것이 실감됨에 따라 극장 안에서 실제 인물을 '대리'한다는 것이 가능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작품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리인의 원고와 헤드셋을 통한 소리를 관객은 보거나 들을 수 없다. 무대 위 대리인의 더듬거리거나 찡그린 채 주저하는 말들은 대리인이 부재자의 말을 제대로 옮기고 있는 것인지 때때로 의심을 품게 한다. 또한, 부재자가 전해주었다는 대본은 실제 부재자의 말 그대로라기에는 심하게 정돈되어 있고, 이는 대리인의 더듬거리는 낭독과 대비되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애초에 대리인을 통해 전달받는 것이, 대리인에게 전달된 대본이 진정한 부재자의 말이 맞는지 그 진위여부 역시 의심되는 것이다. 작품의 후반부 한 부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 마지막에 '사실이 아니었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이 점에 있어 가장 강렬한 부분은 작품의 마지막 부분이다. 모든 대리인의 발표가 끝난 후, 마지막 부재자인 레스 나이트가 보내온, 그의 대리인을 거치지 않은 ‘진짜 목소리’라는 것이 관객에게 제시된다. 하지만 그 역시 스피커로 녹음된 음성이 들려나오는 것일 뿐, 관객은 그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다. 그렇게 대리를 위한 공간인 극장 안에서 제공 받는 것들 중 ‘확고한 진실’은 사라지고 만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가진 매력적인 점은 '대리 행위'와 대리행위를 바탕으로 하는 연극 자체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작품이 시작할 때 스피커를 통한 목소리는 ‘여러분이 없으면 이 극이 진행될 수 없다’라는 조건을 분명하게 한다. 난민 바하티는 자신의 이름과 목소리를 내는 것에서 정치적 위협이 있을까 두려워 대리인 한 명과 그를 대리해 줄 또 한 명의 대리인을 이중으로 구한다. 바하티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데 있어 대리를 통한 ‘은유’가 절실한 것이다. 레스 나이트가 자연을 위해 인류의 멸종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인간인 대리인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할 수 있다는 모순적 이미지는, 대리의 필연성을 확연히 드러낸다. 관객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필연성 속에서의 대리의 태도이다. 녹음된 목소리가 트랙에 녹음된 만큼만 사람을 대변할 수 있듯, 대리인이 대리할 수 있는 영역에도 그가 볼 수 있는 시선만큼이라는 한계가 있기에.

    이는 어쩌면 무대 그 자체에서부터 드러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공연의 시작 부분에서 녹음된 음성은 공연의 무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새로운 소품 제작으로 발생하는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극단은 독일에서 필요한 소품과 무대장치의 리스트를 작성했고, 공연이 진행되는 각지의 프로덕션에서는 리스트에 적힌 항목들에 알맞은 것들을 당시 공연이 되고 있는 극장 창고에서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리 양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리미니 프로토콜 측에서 처음 리스트에 적은 ‘소파 눈앞의 대학로 예술극장 무대 위에 있는 소파가 완전히 같은 것일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 극장에서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내에서 그에 상응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가져와 작품을 구현한 것이다.



    관객을 통해 대리의 가능성과  기능을 엿보는 <부재자들의 회의>  회차 관객이 달라짐에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는 공연이다. 때로는 ‘가위 바위  과열된 경쟁이 문제시되기도 하고, 선발 과정을 무시하고 무작정 무대 앞에 나가 대리인을 자처하는 관객의 태도가 지적되기도 한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연극 전공생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대리인 경쟁 뛰어든 나머지 비재현의 발화에서 의미를 찾는 부재자의 대본들이 완벽한 연기술이 가미된 재현적 모노로그로 변모해버린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 대리인을 결정하는 방식은 누군가가 명령한 것이 아닌, 실제  자리의 관객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점이다. 작품은 우리 사회에서 예술을 통한 ’대리' 다루는 태도를 어느 정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면이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누군가는 부재자를 대리하는  있어 대리인으로 무대에  기회를 얻을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누군가는 대리 행위를 통해 지켜보며 흥미를 얻을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도 있다.  밖에도  없이 많은 태도와 생각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태도들이 뒤섞인 군상을 마주하는 관객들의 불만은 결국 관객 사회와 자기 자신에 대한 되돌아봄으로 이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로라의 촛불을 마주하며: 연극 <유리동물원>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