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는 2021년에 작성되었으며 타 플랫폼에서 브런치로 재업로드합니다.
2050년 달나라의 한 극장, 연극이 시작되고, 자신을 이 작품의 극작가이자 해설자라고 밝히는 톰은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2021년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코로나 4차 대유행으로 경제가 붕괴되고 전 세계가 혼란 속에 빠졌던’ 바로 그 시기를. 톰은 2021년, 자신을 비롯한 성북동 비둘기 단원들이 관객 하나 찾지 않는 극장에서 신작 연극 <유리동물원>을 준비하던 이야기를 무대 위에 펼쳐놓는다.
올해 5월 7일부터 6월 3일까지 뚝섬 플레이스에서 공연된 극단 성북동 비둘기의 <유리동물원 (김현탁 각색, 연출)>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원작 위에 오늘날 연극인들의 애환을 덧씌운다.
원작에서 1930년대 경제대공황 시기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은 팬더믹 상황에서 공연계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연극인들이 되었다. 오늘날, 예기치 못한 바이러스로 인해 관객 수는 줄어드는데, 객석 거리두기마저 시행되며 많은 작품들이 조기 폐막 되거나 개막하기도 전에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에 따라 작품에 참여하는 수많은 이들은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기도 했다.
성북동 비둘기의 <유리 동물원 (遊離動物園, The Isolated Menagerie)>과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 (琉璃動物園, The Glass Menagerie)>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의미를 가진 제목들이지만, 언뜻 보면 같아 보인다. 두 작품의 제목만큼이나, 오늘날 연극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는 대공황 시기를 살아가던 소시민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에 극단 성북동 비둘기는 ‘遊離’라는 표현을 통해 연극이라는 것 자체가 대중의 관심에서 철저히 고립된 구체적인 상황을 더하고, 이 시대에 연극을 한다는 것이 어쩌면 현실과 동떨어진 꿈이 아닐지 의문을 제기한다.
- 고전의 현대적 확장, <유리 동물원(琉璃動物園)>과 <유리동물원(遊離動物園)>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 속 윙필드가 식구들은 2021년, 관객이 아무도 극장을 찾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의 <유리 동물원> 각색본을 공연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성북동 비둘기 극단 식구들이 되었다. 아만다, 톰, 로라는 각각 극단의 연출, 작가 지망생, 그리고 배우이다. 아만다가 기다리는 ‘신사 방문객’은 객석을 채워줄 관객이 되고, 동시에 수많은 이들의 청혼을 받았던 남부 블루 마운틴의 추억은 코로나 이전 공연에서 관객으로 꽉 찬 객석을 맞이하던 추억으로 변모했다. 아만다에게 청혼한 자들 사이에 있었던 ‘재력가 청혼자’들은 ‘연극계의 유명한 평론가’들로, 그가 좋은 조건의 신랑감 후보들을 거절하고 그의 남편을 선택해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대사는 대표적 오픈런 상업극 레퍼토리에 퇴짜를 놓았다는 대사로 바뀜으로써 아만다가 지속적으로 회귀하려는 추억이 과거 연극의 흥행과 연관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다리를 절며 수줍음이 많고 현실에서 동떨어져 유리 동물원의 세계에서 사는 로라는 원작과 비슷한 성격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연기를 형편없다고 생각해 남들과 섞이지 못하는 배우로 그려냈다.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를 밤마다 영화관에서 해소하는 톰 역시 그 성격을 차용하면서도 영화 대신 넷플릭스를 보는 모습을 통해 현대성을 더했다. 이처럼 오늘날의 시대상을 드러내는 장치들과, ‘뚝섬 플레이스’, ‘성수동 성당’ 같은, 관객의 위치와 맞닿은 지명의 사용은 극 중의 상황에 대한 현실감을 더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원작에서 그대로 차용된 인물들의 이름은 2021년의 한국인들의 이름이라기엔 다소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는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연극을 계속해서 올리려는 인물들이 현실 논리와는 묘하게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극장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한 회차에 총 다섯 명 밖에 되지 않는 관객들이 객석이 아닌 무대 위 따로 마련된 좌석에 착석하도록 안내받는다는 것이다. 극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관객들은 자신이 무대 위 주요 소품, 로라의 ‘유리동물원’으로 기능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로라는, 그리고 극중 딱 한번 톰도, 그 유리 동물들을 보며 과거 극장을 찾았던 관객들에 대한 생생한 환영을 마주한다. 이러한 원작 속 상징의 차용과 변화는 이 힘든 시기 인물들의 관객 유치에 대한 환상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허황되고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지를 드러낸다. 동시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인물들의 관객에 대한 간절함이 전해지기도 한다. 다섯 명밖에 되지 않는 소수의 관객들은 ‘보장되지 않은 흥행’, ‘내일은 관객이 오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과 위태로움을 자아내며 유리의 ‘깨지기 쉬운’ 속성과 더욱 효과적으로 맞물리면서 동시대 연극인들이 처한 현실을 실감하게 하고, 모종의 안타까움 역시 느끼게 한다.
원작에서 가정을 이끄는 존재이자 가정의 경제적 중심, ‘가장’의 부재를 나타냈던 ‘아버지의 초상화’는 작품의 원작자인 ‘테네시 윌리엄스의 초상화’로 바뀌었다. 그는 작품의 원작 텍스트를 창작한 인물로, 성북동 비둘기 <유리동물원>의 중심을 잡고 공연의 주된 흐름을 이끌어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많은 연극인들에게 귀감이 되며 그들을 이끌어온 현대 연극계의 거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미 죽은 사람이고, 초상화라는 일종의 잔상으로만 남아 실질적으로 무력화된 존재이다. 그럼에도 테네시 윌리엄스가 남긴 텍스트를 통해 공연을 어떻게든 올리려는 인물들의 모습과, 관객이 올 거라고 기대를 할 수 없는 현실의 대비는, 눈앞에 펼쳐지는 성북동 비둘기의 연극, 그리고 더 나아가 연극이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이미 죽은 존재의 잔상들을 붙잡고 있는 부질없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게 한다. 짐의 캐릭터성은 이러한 ‘연극’이라는 예술의 특성과 맞물린다. 짐은 일상적인 어투를 쓰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과장된 몸짓과 대중들이 흔히 ‘연극 투’라 놀리는 예스럽고 과장된 말투를 사용한다. 그는 과거 모두가 알아보는 스타 연극배우였고,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코로나로 인해 ‘별 볼일 없는’ 신세로 전락한 존재이다. 그는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실제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에서 ‘짐’ 역할을 맡았다는 전사가 있다. 또한, 그가 무대 위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며 무대를 가득 채우는 존재감을 뽐내는 순간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초상화 뒤에 서서 조명을 받는 순간이다. 이러한 연극적 표현들을 살펴볼 때, 그는 과거의 영광을 지녔으나 내리막길을 걷게 된 ‘연극’의 인간적 형상화라 볼 수 있겠다. 원작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서 그려졌던 짐이 가장 현실과 동떨어지고 과장된 인물로 그려진 것에서 차이를 느낄 수 있겠으나, 이렇게 ‘낡고 우스꽝스러운’ 짐의 인상이, 대중들이 가진 연극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인상일 수 있다는 것이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극의 막바지에 짐 역시 결국은 극장을 나가 영화 산업계로 떠나는 모습은, 이 시대 연극이 가진 무력감과 무의미함을 실감하게끔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작품은 유명 해외 고전을, 그 인물과 상징을 섬세하게 차용하여 현대의 문제로 확대했다.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의 이야기를 미래의 관점에서 조망한다는 관점이 독특하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어떻게든 관객을 찾아 공연을 올리려는 인물의 억척스러움에 거리를 두고 우스움을 느끼게 하다가도, 그것이 위태로운 연극을 붙잡고 향유하려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자조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게끔 한다. 웃음과 쓴웃음을 넘나들도록 하는 시점은 너무 무겁지만은 않게 관객들이 몰입과 거리두기를 교차하며 우리가 마주한 연극계의 현실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
- 연극의 환상과 연극을 하려는 환상
전통적으로 연극이란 현실의 논리에서 벗어난 환상을 창조하는 예술이라 생각되어 왔다. 밝은 객석등이 꺼지고 암전 속에 관객들이 속한 현실은 지워진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관객들은 뒤이어 조명이 켜진 무대 위의 환상에 몰입하게 된다. 또한, 무대 위에서는 현실의 논리로는 불가능한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대사 한 마디로 순식간에 시공간의 비약이 일어나기도 하고, 테이블을 분수대라고 일컫는 순간 분수대가 되기도 하고, 무대 위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도 배우의 마임 등을 통해 있는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연극은 모든 비현실적인 ‘가정’들이 일어날 수 있는 환상 그 자체인 것이다. 하지만 연극은 결국 끝이 나게 되어 있고, 객석등이 다시 켜지는 순간 관객들은 연극 속의 환상에서 현실로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 어찌 보면 허망하기 그지없다.
성북동 비둘기의 <유리 동물원>은 이러한 ‘연극의 환상’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여전히 연극을 한다’는 것에 대한 환상을 표현해낸다. 극 내내 복합적인 이유로 관객이 극장을 찾지 않는 현실 속에서 과거와 같이 연극을 올릴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가정이고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시선이 제시된다. 작품은 시작 부분부터 시종일관 밝은 객석등을 극장 전체에 켜 두고, 관객을 관객석에 앉게 하지 않음으로써 객석이 비어있음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연극이 진행 중이라고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하지만 극중 짐이, 심지어 과거 연극계 스타가 성북동 비둘기의 <유리동물원>의 관객으로 등장하기로 하면서부터 아만다의 ‘연극을 계속할 수 있겠다’는 환상은 심화되고, 그 때부터 객석등의 암전, 관객, 무대 조명 등 보편적으로 연극을 완성하는 요소들이 하나씩 갖춰진다,
극 중 짐이 객석에 착석하고, 공연이 시작되자, 극장의 전기가 나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공연 시작 전 일어나는 ‘암전’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라 볼 수 있겠다. 이후 짐이 어두운 무대 위 홀로 남은 로라에게 촛불을 가지고 감에 따라 객석이 아닌 무대 위에만 조명이 들어온다. ‘연극의 시작’ 인 것이다. 그 시초를 알리는 짐의 촛불은 테이블 위에 우산을 펼친 것을 ‘촛불’이라 가정한 것으로, 그 환상의 시초를 알린다고 할 수 있다. 짐은 로라와 야외, 정확히는 야외로 가정되는 무대 위 공간을 함께 여행한다. 그 과정에서 짐은, 자신을 남들과 다른 ‘일각수’, ‘푸른 장미’라 지칭하며 자신감을 잃은 로라에게 ‘남들과 다르기에 아름다운 면모’를 일깨워주며 다시 자신감을 되찾고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희망을 심어준다. 아만다와 톰은 이 모든 모습을 객석에 앉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연극의 환상에 몰입하는 관객들처럼. 그리고 그 희망이 최고조에 도달하는 두 사람의 춤 장면에서,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객석으로 이동하도록 안내받는다. 관객이라는 최종적인 요소가 갖추어지며 온전한 ‘연극’ 이 완성된다. 그들이 춤을 출 때 영화 <라라랜드>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라라랜드(La La Land)’가 ‘꿈과 환상의 나라’를 상징하는 단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이는 다분히 상징적이다. 이때 무대 위에서 객석으로 이동한 관객들의 시선 변화는, ‘현실 속 환상을 위태롭게 구축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던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들의 환상을 온전히 공유하게끔 한다.
짐과 로라는 키스를 하며 연극의 클라이막스를 견고히 유지해나가는 듯 싶지만,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희망에 찬 아만다가 짐을 극단에 섭외하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의 개봉 일정이 있다며 황급히 극장 밖으로 떠난다. 그렇게 아만다가 부서진 환상에서 고개를 돌려 비참한 현실을 다시 인지하는 순간, 극장의 전기가 다시 들어와 객석의 작업등이 모두 켜진다. 촛불이고, 분수대였던 테이블은 명백히 테이블로 윤곽을 드러낸다. 공연장의 객석을 포함한 모든 구조들이 드러남에 따라 관객들은 다시금 ‘무대 위의 것은 모두 연극’이었을 확인한다. 연극은 사라지고 모두에게 현실이 밀려든다. 이렇게 극 중 공연을 가능케 하던 단 한 명의 관객이 퇴장함에 따라 순식간에 깨어지는 연극의 환상을 경험하며 관객들은, 관객 유치가 어려운 이 시기에 ‘연극’이라는 예술의 지속 역시 깨지기 쉬운 ‘유리 동물’인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코로나 시대 관객이 연극인들에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유리동물인 것처럼, 그에 따라 관객에게 있어서도 ‘연극이 제공될 기회’가 위태로워졌다는 현실을 은유하고 직접 느끼게끔 한다. 이처럼 연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도입과 소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연출은, 연극 무대에서만 시용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연극계의 현실을 관객에게도 가까운 문제로 닿을 수 있도록 확장시킨다.
- 로라의 촛불을 끄지 ‘않을’ 수 있다면
극중 행동과 선택 양상에 있어서 원작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인물은 로라라고 할 수 있다. 원작의 로라는 짐이 약혼녀에게로 떠나려고 하자, 자신과 동일시되던, 뿔이 깨진 유리 일각수를 짐에게 건넨다. 사회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잃은 자신의 상처를 회피하고 다시 환상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북동 비둘기의 각색에서 로라와 짐이 함께 춤을 추던 과정 중 실수로 일각수의 뿔이 깨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로라는 일각수를 짐에게 주지 않고, 짐이 떠난 후에도 그에게 받은 용기와 희망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무대에 남는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 의자를 쌓아 촛불을 만든다. 이는 비현실적인 연극의 환상의 문법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것, 즉 연극을 계속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은 주로 톰의 시각을 따라가게끔 하는 원작과는 다르게, 관객을 유리동물원으로 배치하여 로라의 시선을 따라가게 유도하면서 로라의 의지에 더욱 공감하게 한다. 하지만 2050년 연극을 하는 장소가 현실에서 동떨어진 허상의 상징인 ‘달나라’라는 것을 볼 때, ‘2021년으로부터 연극을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원작 속 유리동물원의 세계에 버금가는 ‘현실과 고립된 환상’일 수도 있다. 또한, 극 중 일각수의 뿔이 깨어지자, 일각수의 자리에 로라가 대신 앉는 장면은 환상으로의 회귀를 암시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로라가 원작에서보다 더욱 주체적 의지를 가지고 그 세계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더 비극적인 모습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연극인들의 미래에 대한 자조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성북동 비둘기의 <유리 동물원>에서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를 차용한 부분 중, 가장 돋보이는 ‘원작의 비틀기’는 톰의 마지막 독백의 일부이다. 원작에서 가정을 떠난 것과는 다르게, 극단을 떠나려다가 결국 떠나지 못하고 2050년까지 연극을 계속하고 있는 톰은 극의 마지막 부분에, ‘로라의 촛불을 끄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말한다. 원작에서 로라의 촛불을 ‘끌’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며 과거의 죄책감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톰의 모습과는 다르게 사뭇 의지적이다. 그가 말하는 로라의 촛불이란 앞서 로라가 의자를 쌓아 만든 ‘연극적 환상’이다. 톰은 그 의자 더미 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촛불이 바람에 날려 꺼지지 않게 하겠다는 듯, 또는 자신도 또 하나의 상징적인 불을 더하겠다는 듯 우산을 씌워준다. 그렇게 연극이라는,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을 계속 지켜나가겠다는 뜻을 연극적 언어를 통해 밝힌다. 물론 이 또한, 달나라라는 공간적 배경과 맞물려 원작의 톰처럼 현실세계로부터의 더욱 강하게 도망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작품에서 드러나는 ‘연극하기’의 부질없음을 읽어내다 보면 찾아오는 의문이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연극의 지속하는 것이 그토록 허상적이라면, 대체 이에 대한 자조 섞인 연극을 만드는 이도, 그 작품을 공연하는 이도, 공연장을 찾아 관람하며 연극의 미래에 울적함을 느끼는 이도, 애초에 그러한 연극을 왜 만들고, 왜 보러 갔을까? 성북동 비둘기의 작품의 제목 <유리동물원(遊離動物園, The Isolated Menagerie)>은 대중의 관심에서 철저하게 고립되었지만 그럼에도 동물원의 동물들처럼 극단과 연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떠날 수 없는’ 현재의 연극인들의 모습 또한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모두가 사실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도 연극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제쳐두고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로라의 촛불을 끄지 않으려고 이렇게 연극을 만들고 공연하고 관람했던 것이 아닐까. 지금보다 더 나아졌다고도, 나빠졌다고도 함부로 확신할 수 없는 2050년의 달나라에서 보내는 메시지는, 극의 마지막 부분에 삽입된 음악의 가사, ‘Fly Me to the Moon’, 즉, 나를 달나라에 데려다 달라는 문장과 어우러지며 우려와 막막함 가운데에도 모두에게 의지와 희망을 남긴다.
달나라에서 우주복을 입고 무대 위로 등장한 로라는 손전등으로 무대 위쪽에 동그랗게 걸려 있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초상화를 비춘다. 어두운 가운데 원형으로 빛나는 그림은 그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달’의 형상과 유사해 보인다. 극장에 모인 모두는, 지금은 생존해있지도 않은, 사라져버린 테네시 윌리엄스에게 여전히 감동을 받고 연극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