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틀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되었던 극단 핸드스피크의 <사라지는 사람들>이 온라인 공연으로 중계되었다. '핸드스피크'는 청각장애인 배우들의 중심으로, 청각장애인 배우와 비장애인 배우들이 함께 소속되어있는 극단이다. 극단은 수어 공연으로 시작하여, 수어와 음성 언어의 결합을 통한 공연을 창작해나가고 있다. 올해 공연된 <사라지는 사람들>은, 서로를 구분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을 전쟁 상황에 은유한 두 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수어와 음성 언어, 움직임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혐오의 끝에 결국은 자신마저 파멸하고 사라지고 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구분과 적대시, 혐오를 비판하는 공연의 내용과 더불어, 형식에 있어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 수어와 음성 언어의 구분과 위계를 지우기 위한 시도가 눈에 띈다. 작품은 소외받고 차별받던 사람들과 언어를 무대의 중심부로 가져온다. 또한, 극장에 접근 가능한 이들 중심으로 제공되던 공연을 유튜브라는 온라인 매체를 통해 공연이 더 많은 이들에게 노출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공연을 하는 이와 보는 이 모두에게 주어진 다양한 위계를 지우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연극 <사라지는 사람들> 포스터
장애는 단순히 정신능력이나 신체기관의 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사회문화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일반적’ 또는 '정상적'이라고 일컫는 하나의 인간상을 설정하고 그 밖의 특성을 '장애'를 가졌다고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장애를 가진 이들은 항상 주류가 아닌 주변부의 사람으로 구분되곤 한다. 작품은 그 점을 지적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 수어와 음성 언어의 위계를 지우려고 시도한다. 작품에 포함된 두 가지 이야기는 모두 구분과 혐오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인 '주인 없음'의 묶은 머리 사람들과 풀은 머리 사람들은 서로를 적대시한다. 어떤 절대적으로 부여받은 특성이 아니라 머리를 묶었는지, 풀었는지 여부에 따라 서로를 내 편이 되고, 적이 될 수 있는 시대상을 보여준다. 특정 사람들만 머리를 묶거나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누구나 머리를 풀 수도, 묶을 수도 있다. 또한, 머리를 묶든, 풀든 본질적으로는 동등한 사람이고, 사고 속의 기준을 넘으면 서로 화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집단은 서로를 적대시하다가 결국 모두 파멸하고 만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을 정도로 강렬한 증오의 기준이 정말 보잘것없고 손쉬운 행위인 '머리 묶기'에서 기인한다는 점은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가져온 사회적 차별과 혐오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장치이다. 두 번째 이야기인 '달빛 도망'에서는 영문도 모른 채 적의 습격을 받아 끝없이 도망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사람들은 위기 속에서 잔혹함을 드러내며 서로를 살해하고 만다. '주인 없음'이 적대의 형성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어지는 '달빛 도망'은 적대의 고착화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혐오가 어디서 기인했는지도 모른 채 상황 속에 놓여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다시 다른 사람들을 혐오하게 된다.
이처럼 사회적 기준으로서의 구분과 적대시를 지적하는 작품의 내용은, 무대 위 등장하는 사람들의 그분과 위계를 없애기 위한 형식과 맞물린다. 청인의 말과 수어는 무대 위에 동시에 공존하며 서로를 돕는 독자적인 언어이다. 어떤 하나의 것이 다른 것에 종속되지 않게 하기 위한 시도가 돋보인다. '주인 없음'에서는 음성 언어와 수어가 아닌, 모두가 감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인 '움직임'을 주요한 이야기 전달 수단으로 사용한다. 익숙하고 명시적인 이성의 언어를 넘어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같은 것을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감각된다. 전쟁 장면에서 사용되는 커다란 북은, 음성으로도 박진감을 주지만, 연주할 때 사용되는 커다란 몸짓 역시 긴장감을 부여하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도 공통적인 정서와 감각에 다가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인 없음’에서 한 언어가 다른 언어에 종속되지 않게 유지하면서도 주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을 임시했다면, '달빛 도망'에서 보여주는 것은 서로 다른 문화의 독자성의 유지와 화합이다. 두 에피소드의 중간에 등장하는 'V.V', 즉 수어표현예술은 수어 역시 하나의 독자적인 언어이며, 그 고유한 문화를 가졌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수어와 음성언어가 공존하며,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 수어를 사용하는 배우가 중심이 될 때에는 음성언어의 통역이 뒤따르고,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배우가 중심이 될 때에는 수어를 사용하는 배우의 통역이 뒤따른다. 이러한 화합을 통해 무대 위에서는 수어를 사용하는 배우와 음성 언어를 사용하는 배우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관객들은 어색함 없이 이를 이해한다. 또한, 한 인물을 표현할 때 제시되는 수어의 목소리를 가진 배우와 음성 언어의 목소리를 가진 배우는 서로 성별도, 모습도 다르지만 같은 것을 표현한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작품은 서로의 고유한 문화와 특성을 희생하지 않고 유지하면서도 차이를 넘어 화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극 중 교사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에는 완전히 닮은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력을 통해 서로의 정서에 공감할 수 있다. 작품은 '일반적'이라고 여겨지는 연극의 특성을 넘어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요소를 주류 문화로 끌고온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일반적’이라고 부르는 연극 역시 그 안에 너무 많은 다른 특성을 가진 연극이 존재하기에 하나로 정의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의 두 에피소드 사이에 'V.V'가 삽입되어 서로 다른 이야기를 잇는 형식은, 다양한 요소들의 독자성을 인정할 때 하나의 연극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은유한다.
작품은 내용적으로나 의미적으로나 다각도로 구분과 위계를 지우고 화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하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 주제 전달에 치우친 나머지 우화적이고 교훈적인 특성에 갇혀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 없음’의 경우, 이는 움직임 언어를 도입하는 데 있어서의 한계일 수도 있다. 움직임은 언어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들에게 이해가 가능하고, 훨씬 풍부한 감각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만큼 명시적 언어에 비해 세밀하고 구체적인 내용의 표현을 놓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렇다보니 이야기는 가장 단순화된 줄거리의 제시로 이루어지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서로 사랑하는 세상에서 살게 해달라'는 다소 직설적인 교훈 제시로 끝맺는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빛 도망'의 경우, 우화적인 색채를 조금 덜어내도 좋지 않을까 싶다. 각 인물들은 '오만함', '선함', '이기심' 등을 전형적인 방식으로 과장되게 표현하는데, 이러한 점이 오히려 인물들을 관객이 사는 현실과 멀어지게 한다. 작품 속 내용들을 실제 삶과 관련이 없는, '이야기'로만 느끼게 하며, 객석을 나가면 더 이상 그에 대해 생각할 필요성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사라지는 사람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화합에 있어, 한 쪽의 희생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 사회에 존재하는 위계 자체를 지우고 서로가 존중하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방안을 찾는다. 그렇게 많은 고민을 통해 도출된 방안들이, 작품의 내용적인 완성도와도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