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 리뷰
극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무대 모서리를 둘러싸는 얇은 기둥들이 보인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인 기둥들은 신전의 기둥 같기도 한 동시에, 감옥의 철창을 연상시킨다. 그 너머에 의자들이 객석 쪽을 바라보고 놓여있다. 저 의자에 앉을 사람이 갇힌 것인지, 반대로 그들이 누군가를 가둔 것인지 그 경계는 모호하다.
기둥이 만들어내는 키 큰 직선을 따라가다 보면 시선은 자연히 무대 바닥에 그어진 바둑판무늬 직선들에 닿는다. 그 좁은 바닥에서도 착실히 구역을 나누겠다는 듯, 바닥에 그어진 직선들은 일정한 크기의 직사각형을 여럿 만들어내고 있다. 무대 위 배우들은 어디를 향해 움직이든지, 누가 왜 그어놓았는지도 모를 그 직선 경계 안에 자신도 모르게 갇히게 된다.
그러한 경계는 무대 밖의 커다란 세상에도 존재한다. 바로 국경이다. 모두는 누가, 왜, 언제 어떤 이해관계 아래에서 그 선을 그었는지 모르는 채로 일단 태어난다. 하지만 탄생의 순간부터 그 선은 개개인이 어떤 삶을 영위하게 될지를 결정짓는다. 마치 신탁을 내리듯. 누군가는 안정적인 환경 속에 성장하고, 누군가는 내전과 가난, 기후 위기 속에 기본적인 안위와 권리마저 보장받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적인 삶을 찾아 넘어간 국경 너머 세상에서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 4월 13일부터 21일까지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한현주 작, 손원정 연출)는, 소포클레스의 작품 속 오이디푸스가 받았던 신탁을 이민자들의 선택이 아니었던 삶에 비유한다. 오이디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역시 자신도 모르게 그 운명을 따라간다. 다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면, 오늘날 사회에서는 인간이 만든 촘촘한 사회의 위계질서가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신이 내린 운명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갖는다. 하지만 인간이 내린 운명은 아니다. 작품은 형식적으로 인간이 내린 신탁의 권위에 도전한다. 모든 배우들은 일인 다역을 연기한다. 단속을 피해 숨어 지내는 불법 이민자 역을 맡은 배우는 다음 장면에서 난민을 수용하지 않기 위해 강압적으로 문서를 조작하는 권위자가 되기도, 난민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활동가가 되기도 된다. 권력과 선악, 국적은 한 사람 내에서도 변화한다. 그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투와 자세를 보여주는지에 따라 관객은 같은 사람을 다른 존재로 규정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외부인’이라는 규정은 그 절대적 권위를 의심받는다. 어떤 기준으로 중심점을 잡는지에 따라 모두는 외부인도, 내부인도 될 수 있다. 극 중 이민자들이 닿고자 하는 국가는 신성한 콜로노스로 비유된다. 동시에 이민자가 떠나온 고향 역시 콜로노스로 묘사된다. 특정 집단의 경계 내부에 있는지, 외부에 있는지에 따라 누군가를 신성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로, 또는 그렇지 않은 존재로 규정하는 논리는 그 정당성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규정은 절대적이지 않을지라도 거기서 나오는 결과물은 절대적인 위협이 되기도 한다. 극 중 출입국사무소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불법 체류자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문을 열어주지 않아 많은 이들이 대피하지 못하고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은 사건이 언급된다. 불법 체류자를 ‘존중해야 할 인간’이 아닌 순전히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의 죄에 대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결정되고 벌어진 일’이라 항변한다. 극 중 등장하는 불법 체류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 역시 항변으로 작용한다. 돈을 벌어야 했고, 정권에 반하는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할 위기에 놓여있기도 했으며, 기후 변화로 인해 삶의 터전이 침몰하고 있기도 했다. 인간다운 삶을 찾아 난민 지위를 얻고자 했으나, 최소한의 경제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또는 심사 과정이 조작되어 신청이 기각되었다. 그렇게 ‘불법’ 체류자가 된 이들이다. 작품은 정치적, 경제적 측면부터 기후 위기 문제까지 이민자들이 겪는 다양하고 일상적인 상황들을 폭넓게 다루며 난민 수용의 현주소와 가까운 미래를 논하려 한다. 난민과 불법 체류자에 대한 피상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으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이민자 개개인은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들을 쉽게 ‘외부인’, ‘외국인’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는다. 배우들이 처음 무대에 등장할 때, 모두가 동등한 초록색 점퍼, 등에 ‘Foreigner’라는 글자가 적힌 점퍼를 입는 것은 이 점을 상징하는 듯하다. 인물들은 ‘외국인’, 즉 이 세계에 속할 수 없는 ‘외부인’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다. ‘외지인’이라는 정체성과 ‘큰 죄를 저질렀다’는 선입견으로 경계의 시선을 받던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오늘날 이민자들의 이야기와 병치되어 제시된다. 이 구성은 저 멀리 기원전 고대 그리스로부터 오늘날까지, 사회의 변화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난민 수용 문제는 어제오늘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구성은 누군가를 명확한 타자의 이름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이야기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외국인’이라 불리는 이상, 인물들의 이야기는 관객이 사는 세상의 것이 아닌, 고대 그리스만큼 먼 곳의 이야기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우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와 객석 사이에 놓인 경계, 제4의 벽을 부수고 관객들에게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속 대사들을 말하기 시작한다.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가까이 귀 기울이다 보면 먼 이야기는 어느새 나의 눈앞에 당도해 있다.
원작의 오이디푸스는 그의 시신을 가진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번영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의 아들들은 그 이유로 아버지를 자신이 모시겠다 다툰다. 국가들이 난민 신청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들의 이유도 그와 같다. 난민의 수용이 경제적인 이익, 사회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범위인지를 따진다. 그렇기에 이들은 철저하게 구분되고 계산될 대상일 뿐,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인간의 형상을 하지만, 그 권리를 존중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유적인 의미의 시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계산은 ‘타자’의 구분을 더욱 확실하고 견고하게 만든다.
먼저 국경을 넘어 떠나간 아버지를 찾으러 온 딸의 이야기가 극의 중심부에 제시된다. 잘 지내고 있는 줄만 알았던 아버지는 불법 체류자가 되었으며, 출입국사무소의 화재로 목숨만 겨우 부지하는 중이다. 병원비를 벌기 위해 공장이든, 막노동이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던 딸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속 늙고 눈먼 오이디푸스를 정성으로 돌보던 안티고네 같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안티고네가 아닌 또 다른 오이디푸스임을 밝힌다. 이 문제의 당사자 중 누구도 중심인물과 주변인으로 나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조금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오이디푸스의 시신이 국가의 번영을 가져온다면, 정치적 싸움과 구분, 계산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희생자들과 안티고네인 줄만 알았던 오이디푸스는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고, 전쟁은 영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 오이디푸스가 죽지 않는다면, 권리를 보장받는 생명력 있는 인간으로서 어디에서든 살아간다면, 그래서 시신이 나오지 않는다면, 싸울 이유가 없어지지 않을까? 오늘날의 신탁은 신이 아닌 인간이 내리기 때문에, 인간이 거기에 대항하여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본 리뷰는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으며, 문화초대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