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에서 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파도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극이 제목처럼 소록도라는 ‘섬’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동시에 무대 위 존재들과 객석의 나 사이에 보이지는 않지만 바다만큼 아득하고 함부로 건너기 힘든 경계가 있음을 문득 생각하게 한다. 음악극 <섬:1933~2019>은 육지에서 동떨어진 ‘섬’이라는 지리적 공간을 차별에 의해 사회에서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비유한다. 작품은 물리적 또는 사회적 섬에서 살아가는 1933년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 2019년의 장애아동과 그 가족의 삶을 이야기한다. 한센병 환자들은 병을 옮긴다는 오해와 외적인 증상에 대한 멸시로 철저하게 배척받으며 소록도로 이주했다. ‘지상낙원’이라고 불린 곳에서는 고된 노동과 권위에 의한 폭력이 자행되었지만 육지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멀어졌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쉽게 닿을 수 없었다. 2019년을 살고 있는 자폐 아동 지원과 그의 어머니 지선은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비난과 공공장소에서의 따가운 시선, 이유 모를 동정과 함께 살아간다. 지선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장애인들은 ‘장애도’라는 세상과 동떨어진 가상의 섬 속에 자신을 격리시킬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장애인의 삶은 가시화되지 못한다 말한다.
2019년 우란문화재단과 목소리 프로젝트(박소영 연출, 이선영 작곡, 장우성 극작)가 함께 개발한 음악극 <섬:1933~2019>가 2024년 정동극장에서 다시 공연되었다. 8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펼쳐지는 세 세대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은 시대를 거치며 그 모양새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이어져 온 차별의 양상과, 그 속에 피어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소록도를 찾아 편견 없이 한센병 환자들을 대하며 새 희망을 가져다 준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이야기가 있다. 차별을 넘은 연대의 세상으로 가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어떤 시설과 제도 이전에 선입견 없이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태도라는 지점을 마리안느와 마가렛으로부터 다른 두 세대의 이야기로 확장한다.
배우들은 모두 1933년부터 2019년까지 다양한 시대를 살아가는 서로 다른 인물들을 넘나들며 연기한다. 또한 무대에는 특별한 시대적 배경을 나타내는 구체적 장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는 배우의 연기에 따라 다양한 시공간을 연상시키면서 여러 시점을 유연하게 교차하며 진행하기에 용이하다. 소록도라는 한센병 환자들을 고립시키는 지리적 격리 공간의 운영은 사라졌지만, 심리적 차별의 기제는 여전히 남아 오늘날 일상적 공간 속에서도 약자들을 사회적 ‘섬’에 위치시킨다. 다른 시대의 다른 인물들이 결국엔 같은 무대에 서듯 소수자가 느끼는 고립은 달라지지 않았다. 동일한 공간의 유연한 활용은 관객 자신이 타인을 보아 왔던 태도를 깨닫게 하기도 한다. 어떤 특정 장소로도 설정되지 않은 무대를 소록도로 보든, 토론장으로 보든, 지하철로 보든 그것은 결국 관객의 판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배우들은 한센병 환자들의 외적인 증상을 조금의 분장과 행동으로도 재현하지 않는다. 다만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비하의 뜻이 담긴 명칭으로 물리며 쫓겨났다는 것이 드러날 뿐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모두가 같은 ‘사람’이며, 격리하고 차별하는 것은 개개인의 ‘인식’임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또한 배우들은 의상을 갈아입음에 따라 순식간에 한센병 환자에서 오늘날 지하철의 대중이 되기도 하고,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에서 한국의 장애아동 어머니가 되기도 하면서 그 지점이 적극적으로 강조된다. 결국 한 사람을 어떻게 정의하고 대할 것인지는 사람들의 자의적 인식에 의한 것이며, 인식의 변화에 따라 부정적 요인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라는 장소 그 자체도 ‘섬’일지 모른다. 객석과 무대 사이에는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있고 관객들은 무대 위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님을 안전하게 가정하고 ‘관람’할 수 있다. 하지만 동화와 같은 배경 사이로 불쑥불쑥 뚫고 나오는 다큐멘터리 같은 구성의 장면들은 무대 위 이야기가 단지 관객과 동떨어진 ‘섬’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극이 처음 시작할 때, ‘자탄가’와 1933년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듯 발화하던 배우들은 천을 펼치며 소록도에서의 이야기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록도와 서로에 대한 기록을 읽으며 자료를 낭독하듯 이루어지는 배우들의 대사는 곧 소록도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이는 소록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 관객과 가까운 눈앞의 사건 보다는 ‘설화 또는 이야기’로 느껴지는 유도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소록도 장면에서 순수한 감성을 자극하는 수선과 해봉의 전형적인 이야기가 강조되고, 옷과 천을 이용한 상징적 움직임이 많이 가미된다는 점에서 더욱 예술작품에 가까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중간중간 끼어드는 2019년 지선과 지원의 이야기는 오늘날 일상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 듯 현실적이다. 더 나아가 소록도 해설자 역할의 배우가 역사적 자료를 펼쳐놓고 ‘죽어도 놓고’ 바위와 ‘수탄장’을 설명하는 장면과, 특수학교 건립을 두고 찬성과 반대 측 토론을 하는 모습은 창작된 이야기보다는 ‘실제 발생한 일을 기록한’ 사료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보던 이야기에서 갑자기 거리를 좁히고 들어온 현실은 관객에게 ‘불편함’을 준다. 소록도 장면에서는 인물들이 주로 무대와 객석이 닿을 수 없다는 듯 객석을 인지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이야기하지만, 장면이 현대와 가까워질수록 객석이 바로 그들 눈앞에 있다는 듯 인물들이 객석에 대고 대사를 하는 장면이 많아지기도 한다. 이는 이야기와 현실의 감각을 교차하기 위한 형식적 장치이다. 장면 교차에 따라 발생하는 이러한 대비가 주는 불편함은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이전까지 자신이 무대 위 이야기를 ‘타인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관람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연극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확고하게 긍정의 대답을 하지는 못하겠다. 오늘 사람들이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울고 웃었다고 해서 극장을 나가면 세상이 바뀌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극장을 나간 이후로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인지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극 <섬:1933~2019>는 그 자신이 공연으로서 해야 할 사명감을 스스로 너무도 공손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표명하고 있는 듯하다. 지선은 지하철에서 사람들 사이를 달려가던 아들 지원의 이야기를 객석을 향해 들려준다. 지원이 뛰어가기 시작했을 때 모두가 지원을 쳐다봤지만, 그저 5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자신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불편한 시선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저 익숙해지기 위한 5분이 필요했다고. 지선이 말했듯 음악극 <섬:1933~2019>은 ‘심리적인 바닷길로 인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이 여기 살고 있다’ 라는 가시화를 실현한다. 작품은 자폐아 ‘지원’을 독립된 특정 인물로 등장시켜 재현하지 않으며, 누구든 ‘지원’이라는 이름이 적힌 모자를 쓰며 지원의 위치를 나타내곤 한다. 이는 사회적 섬에 고립되어 가시화되지 못했을 뿐, 소수자는 일상 어디에나 있음을 알려준다. 극장을 나간 사람들의 세상에는 이전에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소수자들이 구성원으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닌,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하기에 따가운 눈총을 넘어선 다른 것들이 뒤따를 것이다.
소록도의 인물들이 그들의 삶의 흔적이 물든 옷과 닮은 천을 이용해서 파도와 같은 움직임을 만들어내던 장면들이 생각난다. 파도는 섬과 육지를 구분하는 물살이다. 양쪽의 사람들은 파도가 무서워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하지만 음악극 섬은 그 파도를 넘어설 자신만의 파도를 만든다. 파도는 물이 고여있지 않고 움직인다는 증거다. 무대 위 삶들이 일으킨 파도는 작품의 이야기를 극장에 고여 증발하게 두기보다는, 객석까지 번져나가게 할 것이다. 대부분의 음악들이 합창곡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각자의 모습으로 화음을 이루는 일상을 상상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