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이 시작되기 전, 무대는 뒤쪽 벽이 열린 채로 관객을 맞이한다. 무대 뒤로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그 순간의 대학로 풍경이 훤히 드러난다. 무대 위에 가상 인물의 삶과 어느 다른 시공간의 환상 대신에, 현재 진행 중인 나의 오늘이 올라간다는 것은 낯선 일이다. 연극의 관습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자연히 검은 벽이 내려와 암전과 함께 오늘의 풍경을 지우고, 그 위로 극 중 세계의 환상이 덮어씌워지기를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그 기대를 배반한 채, 무대를 정비하러 온 주인공 오루는 객석 통로를 가로질러 뒷벽이 여전히 열려 있는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간다. 거기에 있을 거라던 배우와 스태프들 대신, 오루는 서툴게 나는 법을 연습하는 아기 새 한 마리를 만난다. 그리고 그 새는 난데없이 오루를 그의 다섯 살 시절로 데려간다.
2020년 초연된 극단 즉각반응의 연극 <새들의 무덤>(하수민 작, 연출)이 2021년 재연을 지나, 2024년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작으로 다시 한 번 관객들을 만났다. 작품은 ‘오루’라는 한 인물의 일생을 통해 그 속에 녹아든 1968년부터 오늘까지의 한국 근현대사를 들여다본다. 한 인물의 일생으로 집약되어 접하는 해방 이후 상황과 군부 독재, IMF 속 소시민의 비극은 그 방대함과 무거움에 쉬이 범접할 수 없다 느낀 역사의 순간들을 관객 주변의 일로 가까이 끌어 온다. 그리고 격동의 시간을 지나 세월호로 딸을 잃은 아버지의 애환으로 도달한 이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여전히 우리가 해결되지 않은 역사의 비극을 마주하고 있음을 생생하게 체감하게 한다. 관객은 더 이상 역사의 관찰자가 아니며, 이제 그 흐름 속에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고민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새를 따라간 오루가 차례로 마주하는 그의 성장의 기억 파편들 속에서 가장 인상깊은 건, 역사의 반복성이다. 각 시대를 살아가던 오루와 주위 사람들은 매번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는 더 잘 살기 위해 또다른 부조리함을 낳아 왔다. 끊임없이 누군가는 지배자가 되고, 누군가는 피지배자가 된다. 그리고 결국 그 끝엔 비극적인 희생이 초래된다. 극 중 인물들은 슬픈 입체성을 보인다. 격동적인 시대를 살아내며 점점 타인의 희생에 점점 무감각해며, 피지배자는 지배자가 되어 다시 한번 자신이 겪은 양상을 반복한다. 그리고 인물도, 관객도 그 역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 반복성을 실감하며 섬찟함을 느끼게 된다.
인물들이 여지껏 역사를 대해 온 태도는 ‘새섬’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드러난다. 오루가 예전에 살던 마을에서는 ‘새섬’이라는 섬이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새섬에 바다에서 죽은 이들이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산 사람은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이라 여겨 그곳으로 배를 타고, 또는 헤엄쳐 나가려는 이들을 강하게 제지한다. 동시에 부모님의 죽음에 서러움과 의문을 느끼는 오루에게 '죽은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새섬에 있으니, 그곳만 보고 살라'고 말하기도 한다. 상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그렇다고 제대로 마주보지도 못하고 섬처럼 육지에서 동떨어진 외딴 기억으로 고립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상실로 인한 죄책감과 아픔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이고, 죽음에 연루된 집안의 해묵은 과오와 수치가 드러날까 두렵고,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은 대상에 대한 생각을 중지하기로 한 무언의 약속이 '새섬'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새'와 '섬'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새는 자유롭게 날아가야 하지만, 섬은 육지에서 고립되어 누구와도 자유롭게 닿을 수 없다. 작품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인 오루의 딸 도손에게 새의 모습을 투영하며 비극적인 역사와 희생자들에 대한 생각을 추방하는 것이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를 이야기한다. 어린 새가 나는 법을 연습하는 과정은 오루가 자신의 역사를 하나하나 마주하는 과정이다. 오루의 과거 환상이 시작되며 무대 뒤 벽은 닫히고, 암전과 함께 무대 조명이 들어온다. 관객의 환상도 같이 시작되는 셈이다. 오루가 새를 따라 과거의 환영으로 들어가듯, 관객도 오루를 따라가며 연극적 환상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아픔을 가지고 비틀거리며 부모의 죽음부터 딸의 죽음까지를 마주해 나가는 오루는 관객을 이끄는 또다른 불안정하고 어린 새이다. 오루와 관객들은 오루의 기억 속 묻혀 있던 사건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지켜본다. 그리고 매 사건의 끝에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서로 대립하고 미워하던 사람들도 함께 손을 잡고 제의를 하듯 춤을 춘다. 오루가 힘겹게 딸의 죽음까지 마주하고 받아들인 이후에, 오루의 기억속 사람들은 다같이 새가 날아가는 몸짓을 하며 오루를 에워싸다 퇴장한다. 마주함을 통해 아픔과 희생의 역사를 하나하나 애도하며 새섬에 묶인 새가 날아가도록 비행을 완성시켜나가는 것이다.
날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떠나보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에 '기억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직접 만질 수는 없어도 많은 이들의 시야 속에 자유로이 모습을 드러내며 공존한다. 도손의 말대로 기억한다면 무덤은 새가 될 수 있다. 관객을 이끄는 새로서의 오루에게 있어서도 날아감의 완성은 의미를 가진다. 되돌아보지 않음으로 인해 역사 속 부조리를 반복하며 살던 섬과 같은 작은 삶의 범위에서 벗어나, 비로소 다른 내일을 찾아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다시 한 번 무대 뒤 벽이 열리며 익숙한 대학로의 지금이 펼쳐진다. 하지만 이제 관객은 그 풍경이 가리워지고 환상이 대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연극 무대에서 마주해야 하는 것은 결국 어떤 도피처로서의 서사가 아니라, 환상 이후에 달리 보이는 우리의 삶일지 모른다. 섬에 갇힌 이야기와 새들을 마주한 관객은 이제, 무대 너머 현실 속에서 어느 곳으로 어떻게 날아오를 것인지를 고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