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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n Dec 31. 2024

은유와 여백이 주는 감동:2025 그림책이 참 좋아展

2025 그림책이 참 좋아 展 리뷰

동물들과 냉장고 속 음식들도 우리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며 크고 작은 문제들을 직면한다. 부엌의 식기들도 자기들만의 개성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살며 그 안에서 우정과 가족의 사랑 등 일생의 중요한 가치들을 깨닫는다. 오늘 하늘에 펼쳐진 날씨는 사실 구름 공장에서 일하는 구름들이 열심히 설계하고 만들어낸 것이다. 그림책 속 세상에서 우리 주위의 일상적 풍경들은 낯섦과 특별함의 옷을 입는다. 



 국내 그림책 작가들 20여 명이 직접 그린 원화를 통해 그림책의 은유가 선사하는 특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전시, <2025 그림책이 참 좋아 展>이 2024년 12월 20일부터 2025년 3월 2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진행된다. 전시는 누적 판매 800만 권을 기록한 (주)책읽는 곰의 '그림책이 참 좋아' 시리즈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최숙희, 윤정주, 김영진, 유설화 등 국내 유명 그림책 작가들뿐만 아니라 시드니 스미스, 구도 노리코와 같이 2024년 권위 있는 아동 문학상을 받은 해외 작가들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전시에는 유설화 작가의 <슈퍼 거북>, <슈퍼 토끼>를 각색한 뮤지컬 공연과 놀이형 체험 프로그램이 연계되어 있어 어린 관람객들에게 동화책의 즐거움을 온전히 느낄 기회를 제공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책 원화 옆에 붙은 섬세한 캡션들과 함께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조금 더 성장한 청소년기 관람객, 또는 성인 관람객들 역시 일상 속 숨어있던 삶의 심오한 원리를 깨닫고 자신 내면에 위로를 따뜻한 위로를 건넬 수 있다. 그 점에서 연령층에 상관없이 즐길 수 있는 전시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전시장에 들어서면, 어린 자녀와 성인 보호자로 이루어진 관람객만큼이나, 그림책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감성을 찾아온 성인 관람객 무리 역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전시된 그림책의 소재들은 대부분 일상적인 사람 또는 사물들이다. 그림들은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가족 또는 친구의 하루를 가늠하게 하고, 그들과 맺은 소소하고 따뜻한 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 몰래 이루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주변 사물들의 속삭이는 대화들을 유추해 보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가다 보면, 내가 오늘 학교에 가고, 소풍을 가고, 저녁엔 테이블에 여럿이 둘러앉아 짝이 잘 맞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이용해 밥을 먹는 그 모든 행동이 사실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 일인지를, 얼마나 많은 마음과 순간들이 모여 비로소 가능한 일인지를 문득 느끼게 된다. 실제로 전시가 시작되는 첫 섹션의 제목은 "잊지 마, 네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이다.


 전시는 그림책에 등장하는 피자 조각을 확대하여 전시장 벽면과 바닥에 위치시켜 그 위로 어린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올라갈 수 있게 하며, 벽면에 실제보다 거대한 냉장고 그림을 설치해 관람객들에게 그 안에 있는 재료들의 일원이 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는 익숙해서 놓치고 있던 일상의 사소한 부분들을 새로운 감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그림책다운' 상상력의 발현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장치이다. 또한 그림책에서 발현되었지만 그림책 '전시'이기에 가능한 매력적인 코너들이기도 하다. 


윤정주 작가의 <꽁꽁꽁> 시리즈에 나오는 냉장고가 벽면에 거대하게 구현되어 있다.


그림의 여백을 채워나가다 보면

 전시장의 중간에는 관람객들이 바닥에 앉아 전시에 등장했던 그림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공간의 벽면에는 그림책의 가치에 대해 말하는 작가 또는 편집자들의 말들이 적혀있다. 그중 필자의 기억에 가장 남는 문구는, "책의 여백 속에서 뛰놀며 자란 어린이만이 세상의 여백을 자신의 색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였다. 이 여백은, 단순히 그림 작품 속의 빈 곳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상이 깃든 그림책의 세상과 실제 현실, 그 사이에는 간극과 괴리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둘 사이에도 필연적인 '여백'이 존재한다. 


성인이 보기에 어려운 어휘가 덜 쓰인다는 이유로, 또는 여백 없는 견고한 논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동화를 향유하는 어린이는 주로 성인에 비해 주체적이고 체계적인 사고 없이 타인의 지식을 답습하는 데에 불과한 존재로 격하되곤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빈틈이 거의 없는 논리적 지식을 알아가는 과정은 타인이 해석하고 서술한 가치와 의미를 내 속으로 들이는 과정이다. 내 외부에 있는 타인의 발견을 마주하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논리의 여백이 가득한 세계관을 가진 그림책들은 이해의 과정에서 읽는 이가 자신의 경험과 기반한 유추를 불러와 창의적으로 여백을 채우는 과정을 수반한다. 결국 여백에서 궁극적으로 마주하는 것은 자기의 삶과 그 안의 가치인 셈이다. 지식 습득이 타인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그림책의 향유는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마주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림책에 담기는 것은 이야기의 서사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뿐만이 아니라 독자가 삶에서 발견하는 의미이다. 


유지우 작가의 <구름 공장>


 전시된 작품 중, 유지우 작가의 <구름 공장>이라는 작품은 하늘의 구름을 만드는 공장에 강아지 한 마리가 뛰어들며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 구름을 의인화한 서사를 통해 소중한 존재와의 영원한 이별 이후 물리적 분리를 받아들이되 기억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는, 이별의 순리를 이야기한다. 이를 자연 현상 속에 은유함으로써 그것이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임을 암시하며 위로를 주기도 한다. 구름들이 자아와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공장 안에서 일한다니,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 명확히 규명할 수 없는 세계관을 구체화하기 위해 독자들은 자신이 겪은 크고 작은 이별 전후의 경험, 그리고 이별의 대상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이별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을 보듬을 수 있을 것이다.


 전시는 이러한 '여백'이라는 측면을 더 구체적으로 활용한다. 전시장에 걸린 원화들은 모두 원작 그림책의 본문과 대사가 지워진 여백을 추가적으로 포함한다. 그림 속 상황의 서술과 인물의 말들까지도 보는 이가 직접 자신의 상상으로 채울 기회를 주는 것이다. 또한 그림자극과 관련된 작품 앞에는 관람객이 직접 인형들을 들고 그림자극을 만들 수 있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게 관람객은 그림책과 전시가 제공하는 여백 속에 자신의 서사를 넣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예술 작품처럼 바라보며 이를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동화에 대한 동화

 필자가 이번 전시를 보며 가장 인상 깊게 실감한 점은, 바로 '이야기는 고여 있지 않고 끊임없이 흐른다'는 것이다.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이야기들이 전하는 메시지도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와닿았다는 뜻이다. 

 노인경 작가의 <아니사우루스>는 늘 누군가의 제안에 '아니'라고 말한다는 이유로 가족과 친구에게 꾸지람을 듣는 공룡의 이야기이다. 필자가 어릴 적 접한 '동화의 흐름' 상, 결말부에는 아니사우루스가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며 '네'라고 말함으로써 공동체에 편입하는 흐름을 기대했고, 그에 대한 구체적 전개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작품의 캡션에 달린 설명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림책은 아니사우루스가 '아니'라고 말함으로 인해서 결국에는 공동체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야기는 부정과 저항의 가치를 말하고 있었다. 착한 순응뿐만이 아니라, 다수의 의견에 주체적으로 의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떻게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개성과 당당함의 시대답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다수 의견에의 긍정을 강요받던 필자의 어린 시절 경험에 따스운 위로가 되어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아예 잘 알려진 이야기를 비틀어 '추구해야 할 가치의 변화'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유설화 작가의 <슈퍼 거북>과 <슈퍼 토끼>가 대표적이었다. 이 두 작품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의 뒷이야기를 상상해 덧붙인다. 경주에서 승리한 이후,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기대에 거북은 자신이 가진 느린 걸음 속도를 교정하고자 매일 빨리 달리는 연습을 한다. 그 결과 다른 이들을 실망시킬까 긴장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피로해지고 만다. 또한 경주에서 한 번 졌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슈퍼 토끼'는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 좌절감에 달리기의 '달'자만 들어도 치를 떨고, 어떤 상황에서도 달리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한다. 그토록 좋아하는 달리기인데 말이다. 거북과 토끼가 경쟁을 넘어서서 자신에게 진짜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과정은 놀랄 만큼 단순하지만 명쾌하고 허를 찌른다. 원작의 이야기가 경기의 승패를 강조하며 마무리되고 이긴 이에게는 성실함과 노력이라는 긍정적 가치를, 진 이에게는 게으름과 자만이라는 부정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경쟁에서 이기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면, 유설화 작가의 두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그 뒤에 경주를 떠나 자신만의 가치를 찾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어감으로써 승패가 누군가의 인생을 설명하는 데 전부가 아니라는 저항적인 시각을 던진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대다수가 토끼와 거북이의 원작 이야기를 강조하며 너에게 경쟁만을 부추길 수 있지만, 삶도 이야기도 거기서 끝나지 않아. 진짜 소중한 것을 잃지 마'라고 속삭이는 다정한 비밀 친구가 되기도 한다.


 한편, 존재하는 이야기를 대하는 주체적 태도 자체를 말하고 있는 작품도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채인선 작, 배현주 그림으로 탄생한 <숲에서 만난 이야기>는 한 소녀가 숲속에서 동물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이야기에 푹 빠진 동물들이 이야기에 나오는 폭력성과 권력관계까지 똑같이 답습해 재현하려고 하자, 소녀가 스스로 책 속 이야기를 고쳐 들려준다는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존재한 이야기라고 해서 꼭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스스로 옳다고 여기거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주체적이고 용감하게 찾아나가며 낡은 사회적 가르침을 바꿀 수 있는 태도 그 자체를 역설한다. 


그림책의 그림 하나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이야기의 변화 속에서 필자가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게 언제든 그림책이 주는 메시지가 절대적 정답일 수는 없다. 이야기는 늘 불완전하고, 사회가 변하며 긍정적으로 여겨지는 가치도 바뀌면서 이야기 또한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지만 그 변화는 작가들이 달라지는 시대 속에서 매 순간 최선의 가치를 포착해 담으려고 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림책에 드러난 이야기의 변화 속에서 어떤 시대에 살든, 자신 안의 어린이에게, 또 자신 곁의 어린이에게 당시의 가장 좋은 지혜를 주고 싶은 어른의 마음을 읽는다. 전시에는 원화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과정들도 섬세하게 드러나 있는데, 이를 보다 보면 어떤 방식으로 그려진 그림이든 정말 최대한의 정성을 담아 그려지지 않은 것이 없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전시의 초입부 설명글은, 어린이들이 그림책을 통해 인생의 많은 부분들을 두루 경험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래도 삶은 살아 볼 만한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거라 말한다. 그림책을 통해 삶이 살아갈 만한 곳임을 느끼는 이유는 어린 독자들의 '인생 선배'로서 품은 각 저자의 단단한 마음이 시대를 막론하고 페이지마다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본 리뷰는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 ) 문화 초대의 일환으로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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