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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로 Oct 05. 2022

터를 잡다

억수같이 비가 내린다.

땅이 찢어지라 세차게 내린다.

땅을 때린 빗방울은 분무기에뿜어진 것처럼 잘게 부서져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아~, 시원하다. 그때도 이렇게 비가 왔는데..."

비에 엮인 기억들 중 하나가 떠오른다.

나를 여기에 가둔 그날 그 비가....


그 해 오월은 예년 월 같이 더웠다.

사람들은 오월의 후덥지근한 날씨를 배달된 짜장면같이 그러려니 여기고 있는 듯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초저녁.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더니 비구름을 몰고 와서 세차게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빗줄기는 점점 더 세차 졌다.

비를 피하듯 우린 시장 골목에 접해 있는 2층 상가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비에 젖은 깃털을 는 새처럼 우린 옷에 묻은 빗방울을 털어내고는 천천히 옥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퍼붓는 비로 인해 옥상은 빗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고, 우리가 마주 보는 곳에 허름하고 낡은 컨테이너 조립식 건물이 보였다.

빗물로 흥건한 바닥엔 깨진 벽돌들이 그 건물 쪽으로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었고 그 벽돌들은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이 어딘지 말해주고 었었다.

그 벽돌은 불규칙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고 발을 디딜 수 없을 만큼 작았다.

우린 퍼붓는 비와 바닥에 흥건한 빗물을 피하기 위해 물수제비처럼 물 위를 폴짝폴짝 뛰어서 조립식 건물 안으로 잽싸게 뛰어 들어갔다.

사무실은 5~6평의 공간에 구닥다리 철재 책상들과, 습기를 머금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오래된 곰팡내가 코를 찔렀고, 천장엔 긴 원통형 형광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그 공간을 구석구석 밝히기에는 부족했다.

마치 사건의 발단이 될 만한 영화의 첫 장면처럼 음침한 분위기가 우릴 맞이했다.


깡마르고 광대가 뚝 불거진 검은 얼굴, 먹다 남긴 과자 봉지를 고무줄로 칭칭 맨 것 같이 허리가 큰 바지를 허리띠로 꽉 쪼여 입은 칠십 대 노인과, 160cm 조금 넘는 신장에 머리숱이 듬성듬성한 사십 대 사내와 언쟁을 하는 것을, 우리 부부는 안쓰럽고 답답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건너편 사무실 책상 앞에선 노인네 직원으로 보이는 오십 대 아줌마가 모니터 너머로 우릴 힐끗힐끗 엿보고 있었고, 가끔씩 우리와 눈이 마주치면 눈을 모니터 아래로 돌리며 딴청을 했다.

그녀는 마치 적에게 우리의 동태를 상세히 무전으로 타전하듯 컴퓨터 자판을 요란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따닥 따다 따닥.”

볶듯이 자판기는 울어댔고 사무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절묘한 화음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이 아줌마는 여자로서 꾸밀 수 있는 최소한의 것도 하지 않았다.

측중선 머리 위에 놓여 있는 분홍색 머리띠가 여자로 보이게 했고 그게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매너인 듯했다.

여자로서 호감은 전혀 느낄 수 없는 이 여자는 신분을 숨기고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미녀 스파이가 아닐까 하는 영화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참 열변을 토하던 사십 대 중개업자는 지친 듯 포기한 듯 외마디 한숨을 내뱉고는 소파에 등을 파묻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잠시 냉랭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그 공간을 사무실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메우고 있었다.

“미스 킴, 다 됐으면 가져와봐.” 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노인네가 깼다.

그녀는 “네” 하고 대답하고는 잽싼 몸놀림으로 서류를 노인네 앞에 들이밀었다.

서류를 받아 든 노인네는 본인이 보고 싶은 것만 힐끗 훑어보고는 중개업자에게 툭 던지듯 내밀었다.

중개업자는 한 부를 우리에게 건네주고 차근차근 읽어 내려갔다.

서로 틀린 그림을 찾듯 소리 없이 눈만 좌우로 굴리며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우리가 두 장으로 된 서류 중 앞 장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었을 때쯤 중개업자가 입을 떼었다.

“부장님?”

“계약서 끝 부분에 중개업자 란이 없어요?”

“이거 넣어주셔야 하는데요?”라고 말을 했다.

우리는 그제야 그 노인네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왜 그게 필요하지?"

"우리랑 저분들이랑 계약하는 건데.”

“중개업자는 중개만 하면 되지.”

“우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렇게 계약한 적이 없어.”하고 부장은 말했다.

“아~  부장님,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없으면 안 돼요. 이걸 안 넣으면 우린 벌금 물고 영업 정지당한다고요.”

“안돼요.”

“우린 계약 안 하면 안 지 그렇게는 못해요.”

“본사에서도 이해 못 해.”

“그러면, 부장님 본사 가는 건 이대로 하시고, 한 부만 맨 밑에 한 줄만 넣어주세요.”

“안 돼.”하고 부장은 손사래 치며 얼굴을 돌렸다.

중개업자는 난처한 눈으로 우릴 쳐다보고는 도움을 청하듯, 대안을 얘기하듯 눈을 찡그리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우린 잽싸게 그 눈빛을 낚아채고는 부장에게 넌지시 중개업자의 편을 들었지만 한마디도 먹히지 않았다.

“아유~~, 부장님! 그럼, 알겠습니다. 그리고 계약일자는 6월 1일로 해주시고 임대료는 계약일자로부터 발생하는 걸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임대료는 임차인이 5월 말까지 정산하기로 했는데 괜찮으시죠?”하고 중개인은 애원하듯 말을 건넸다.

부장은 “임차인이 없는데, 임차인 말을 들어봐야지. 관리비도 정산이 안됐고……. 임차인 없인 안 돼.”하고 벽을 쳤다.

“부장님 제가 오늘 오후에 임차 인하고 통화하고 녹취했는데 이걸루 안될까요?”

“한 번 들어 보세요.”하고 핸드폰에 녹취된 파일을 재생시켰다.

녹취를 다 듣고는 “그래도 본인이 있어야 돼.”하고 부장은 고집을 부렸다.

중개업자는 고구마 천 개를 한꺼번에 다 삼킨 듯 답답한 가슴을 움켜쥐고 사무실 바닥을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듯했다.

이번엔 중개업자의 포기는 빨랐다.

더 이상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럼 제가 전활 해서 임차인을 부를게요.”하고 전화를 걸었다.

“네, 네. 그럼 얼마나 걸리나요?”

“네. 알겠습니다.”하고 전화를 끊고는 “퇴근하고 한 시간 정도 걸린다니까 8시 반에서 9시쯤이면 여기 도착하겠답니다.”라고 말했다.

우린 허기진 배와 어색해서 불편한 자리, 눅눅하고 습한 공간, 그리고 긴 기다림의 고통까지 느끼며, 창살 없는 구치소에 갇힌 죄수처럼 앉아있었다.

빗줄기는 여전히 변함없이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간혹 울리는 핸드폰이 어색한 정적을 깼다.

전쟁의 출전을 알리는 인디언들의 북소리처럼 비는 세차게 조립식 지붕을 요란하게 때리고 있었다.

예정된 시간이 되었지만 임차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1분 1초가 괴롭기 시작했다.

모두들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고 느껴질 때쯤, 100m 달리기를 끝낸 선수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임차인이 들어왔다.

“아~. 안. 녕. 하. 세요?”하고 생선을 토막 내듯 말을 잘라내며 인사했다.

우리도 인사를 건네고 임차인과 부장을 번갈아 보며 순조롭게 이어지는 다음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러나 순탄하게 그려진 우리의 상상은 거기까지였다.

부장은 “왜 그렇게 전활 안 받아요?”라고 우리의 상상과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임대료랑 관리비도 몇 달씩 밀리고…….”

“사람이 전활 받아야지.” 부장은 임차인을 죄인처럼 몰아붙였다.

“부장님 보증금이 있잖아요.”

임차인도 서운한 듯 톡 쏘아붙였다.

임차인은 날카롭고 까칠한 첫마디가 초면인 낯선 이에게 미안했는지 눈길을 돌려 옅은 미소를 우리에게 보였다.

다소 냉정하게 보이는 삼십 대 후반의 임차인은 우리가 모르는 서운함을 토로하듯 짧지만 깊은 한숨을 쉬었다.

부장은 그녀에게 자리도 내어주지 않았다.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을 하며 우리는 옆으로 조금씩 몸을 움직여 그녀에게 앉을자리를 내어주었다.

임차인은 아직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관리비랑 임대료는 보증금에서 정산하면 되지?” 하고 부장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생각이 없다는 듯 까칠하게 말을 다.

“네.”하고 임차인은 대답했다.

“그리고 사장님, 아까 오후에 말씀드린 임대료를 5월 말까지 내시는 것 맞죠?”하고 중개업자는 임차인에게 확답을 받듯 물었다.

“네.”하고 임차인이 말했다.

“그럼, 부장님 이제 정리된 것 같으니 계약서 쓰시죠?”하고 중개업자는 재촉했다.

“미스 킴, 계약서 수정해서 가져와.”

그렇게 우린 수정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아쉬움도 마련도 없이 출소하는 죄수처럼 구치소 같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비는 여전히 똑같이 내리고 있었다.

중개업자는 우리에게 비밀스러운 말을 하듯 나지막이 소곤거렸다.

“저 부장 때문에 임차인이 올 초에 계약 못하고 지금까지 저렇게 골머리 썩었어요.”

“뭣 땜에요?”

“중개업자 명기 안 된다고 우겨서 다른 중개인이 중개를 포기했어요.”

중개업자는 미숙한 중개를 변명하듯 능숙한 중개를 자랑하듯 말을 했다.

우린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전히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순간 이 비가 아니면 지루하고 답답한 이 공간을 수십 번도 더 뛰쳐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훅하고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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