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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샘추위 May 08. 2024

저는 알코올중독자의 딸입니다.

54 아버지는 삼겹살이 먹고 싶다 하셨어.

"아빠가 삼겹살이 먹고 싶다고 퇴원하면 먹게 사다 놓으란다."

"할머니, 아빠가 삼겹살만 먹고 싶겠어요?"

아빠가 삼겹살을 먹고 싶다고 했다는 말이 나에겐 삼겹살에 소주로 들리는 마법.

아빠의 겨울 외투를 가져다주기 위해 할머니 댁을 찾으니 할머니는 김치를 담그고 계셨다. "아빠가 퇴원하면 삼겹살이랑 햇김치를 좀 먹여야지. 너희 아빠가 김치 잘 먹잖니."

아빠가 퇴원하면 깨끗하게 새로 도배한 방에서 지내라고 누렇게 변해버린 벽지 뜯어내고 할아버지랑 둘이 도배지 새로 발랐다.

아빠가 입원할 무렵에 소머리 곰탕 먹고 싶다고 했거든.

새로 한 김치랑 주면 아주 잘 먹을 거다.

아빠 퇴원하면 실컷 노래라도 부르라고 노래방 기계도 샀잖니. 압류인지 뭐인지 한다고 해서 너의 작은 아버지랑 할아버지랑 이거 낑낑대고 안채로 들여놓느라고 아주 죽을 번 봤다.

너희 아빠만 잘하면 우리 세 식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데 뭣 놈의 팔자가 이런 지....

아빠가 퇴원하면~이라는 말을 말마다 붙이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티브이 장 위에 곱게 올라가 앉아있는 노래방 기계를 표정 없이 바라봤다.

아빠의 겨울 외투를 찾아 흰 도배지를 바른 아빠 방에 들어가 보니 금방 또 누렇게 변할 걸 왜 흰색으로 하셨나 싶다.

낡은 흙집에 휘황찬란한 무늬 보자기 하나와 금색의 보자기를 두 겹으로 고무줄로 대충 엮어 만든 커튼.

(언젠가 지역 카페에 드림했던 암막 커튼이 야속하게도 떠올랐다. 두툼해서 저것보다 바람은 잘 막아질 텐데. )

가구의 겉면마저 누렇게 변색되게 만든 담배의 위력이 실로 무섭게 와닿았다.

한 칸짜리 장롱 안에서 꺼낸 아빠의 겨울 외투는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짝퉁 영어 마크가 있었고 곳곳이 삭고 곰팡이가 슬어있었다. 바느질은 터질락 말락 담뱃불에 곳곳이 그을린 잠바들.

그중에서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잠바 하나를 골라 내복 두 벌과 함께 담았다.

그 잠바들을 보며 여든을 훌쩍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도 이제는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들일뿐.

아빠의 보호자로서의 구실은 전혀 못하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 역시 술에게 빼앗겨 버린 아빠를 살뜰히 보살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밀려온다.

허름한 옷가지들이 쓸쓸한 아빠의 인생을 보여준다.

할머니! 내과 진료는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아요.

퇴원하면 아빠가 일주일이라도 버틸 수 있을지 나는 너무 무서워.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다음에는 입원 못 받아줄 것 같다고도 했잖아요.

지금 병원도 몇 달 정도만 더 있으면 나가라고 할 것 같아요. 지난여름에 9개월 정도? 있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일단 조금 더 계셔봐야 할 것 같아요.

의사가 술을 안 먹는 기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져야 아빠에게는 좋다고 했거든요. 내가 옷가지를 가져다주면 당장 아빠가 할머니한테 전화할 텐데 어떡하지?

전화받는 거 힘드실 텐데.

너희 아빠는 애처럼 살살 구슬려야 돼.

어떡하겠니?

내가 조금만 더 참고 있다가 나오라고 할 테니 걱정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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