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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텔라 Apr 24. 2024

자립여행기(自立旅行記)

내가 떠나야만 했던 홍콩

1506일간의 연애가 끝났다.

햇수로 4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나를 웃고 울리던 사랑을 끊어낸 이유는 그다지 특별하달 것도 없었다. 대학 시절을 내내 함께한 사람과 헤어지자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이 몰려왔다. 단순한 외로움과는 결이 달랐다. 그냥 내 몸 한 편이 뭉텅 떨어져 나간 것만 같았다. 그 조각들에 심장이라도 포함되어 있었는지 가슴이 아프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이틀 밤을 뜬 눈으로 보낸 후 출근하자마자 입사 이래 한 번도 신청한 적 없었던 휴가계를 냈다.


“이렇게 갑자기 휴가야? 왜, 남친이랑 놀러 가게?”

“주말에 헤어졌습니다. 혼자 여행을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의자를 뒤로 젖혀 흔들거리며 내 휴가계를 보시던 팀장님은 화들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으시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괜찮아? 그냥 보내 줄 테니까 머리 좀 식히고 와”

“네, 감사합니다.”


물색없이 나오려던 눈물을 꾹 참고 자리로 와 멍하니 모니터를 보며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했다. 그냥 여기만 아니면 될 것 같은데 너무 멀리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그와의 추억이 있는 곳도 싫었다. 이런저런 조건을 빼고 나니 국내에선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차라리 해외로 가자. 여태 휴가 한 번 못 쓰고, 노비처럼 일만 했으니 나에게도 즐길 권리가 있다 이거야. 멀지 않고, 대중교통이 편리한 나라로 찾아보자. 일본은 얼마 전에 다녀왔고, 대만은 가족여행 가기로 했으니. 그래, 홍콩에 가자!


나의 첫 홍콩 여행은 혼자서 간 최초의 해외여행이자 ‘이별여행’의 탈을 쓴 ‘자립여행’이었다. 옆에서 꼼꼼하게 챙겨주던 사람도 없고, 여행 자체를 급하게 결정한 탓에 내 홍콩여행 일정은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지만 한가롭게 계획을 짤 여유가 없었다. 낮에는 휴가로 인한 업무공백을 메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출퇴근길에서야 겨우 친구가 빌려준 책에서 끌리는 곳을 몇 군데 골라 대충 숙소의 위치를 정할 수 있었다.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며, 숙소를 골라보며, 어떤 곳을 가고 어떤 것을 볼지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나 혼자였다. 항상 같이 있던 사람의 빈자리가 느껴졌지만 하나하나 골라가는 과정에서 그 빈자리는 ‘나만의 취향’으로 채워졌다. 


토요일에 헤어지고

월요일에 휴가 내고

화요일에 비행기 티켓을 끊고

수요일에 숙소를 예약한 후 

목요일 오전까지도 근무하다 허겁지겁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혼자가 되니 또 실감이 안 나 멍하니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서 말을 걸어왔다.


“혼자예요?”

“네, 당신도 혼자예요?”

“아니요, 내 와이프와 아이들은 저쪽에 앉았어요. 따로 앉을 수 있고 비상구석이라 난 여기 앉았지만. 당신은 계속 혼자라서 부럽네요.”

“사실 애인과 헤어져서 혼자 여행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맥주가 빠질 수 없지. 자유를 얻은 기념으로 한 잔 할까요?”


옆자리에 앉은 친절한 외국인 아저씨 덕분에 시원한 맥주와 함께 먹을 땅콩까지 획득했다.

그전까지는 난 비행기에서 음료수만 주는 줄 알았지 술도 주는 줄은 몰랐다. 심지어 안주로 받은 꿀땅콩은 정말 맛있었다. 캔을 따고 건배를 하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혼자니까 이런 경험도 해보고(사실 비상구석에 앉는 것도 처음이었다) ‘자립여행’의 시작치고는 나쁘지 않은데?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공항에서 헤어진 후 나는 짐은 대충 맡기고 유명한 관광지의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혹시 혼자 온 사람 있나요?”

또 운이 좋은 걸!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줄 선 사람들 모두 일행이 있는데 나만 혼자여서 탑승 정원을 채우기 위한 케이블카에 훨씬 먼저 탈 수 있었다. 함께 탄 외국인 관광객들은 혼자인 나를 배려해서 친절하게 사진도 찍어주고, 한국에 대한 질문도 하고 앞으로의 여행 일정도 물어봐주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혼자 하는 여행이라 궁상맞게 보일까 봐 잔뜩 기합을 넣은 보람도 없이 나의 홍콩 여행은 너무나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하찮은 영어 실력 탓에 진땀을 흘리기도 했고, 간혹 2인 이상만 입장 가능해서 그냥 뒤돌아서야만 했던 맛집도 있고, 낯선 곳에서 가끔 오작동하는 나의 방향 감각 탓에 길을 헤맨 때도 있지만 상관없었다. 그것도 재밌었다. 그냥 혼자 하는 모든 게 다 괜찮았다. 

4년여간 쌓인 추억들과 감정들을 고작 며칠간의 짧은 여행에 다 털어내고 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지만, 내 나름의 ‘이별의식’은 치를 수 있었다. 맥주 한 캔을 들고 침사추이의 야경을 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감정을 꺼내보았다. 나쁘고 힘들었던 기억들은 홍콩에 다 버리고 좋았던 기억들은 그냥 가슴에 묻기로 했다. 무심결에 꺼낼 만큼 얕지 않고 그렇다고 영영 못 찾을 만큼 깊지도 않을 딱 그 정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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