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이다.
작가 지망 3주 차 만에 벌써 시련이 닥쳐왔다.
초보 작가들에겐 주제 고르는 게 어려운 일이라 선생님이 떡하니 "6월" 이라고까지 정해주셨는데 당최 생각나는 게 없다.
이게 어떻게 잡은 펜인데.. 벌써 절필할 수는 없다.
머릿속 폴더들을 하나하나 뒤지고 있는데 사각사각. 타닥타닥. 다른 사람들은 벌써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있다. 역시 에세이 계의 은둔 고수들이었던 건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무심결에 다리까지 떨고 있다.
첫 과제 때 선생님이 가장 좋았다며 칭찬하셨던 글을 쓴 짝꿍님이 “다음 주에 봬요” 하며 상큼하게 웃으시며 나가자 나는 그만 펜을 놓아버렸다.
짧지 않은 생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왜! 내 6월은 (비어있음)인 것인가!
나에게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초, 중, 고 12년을 지각, 결석 한 번 안 한 K-학생 DNA를 가진 내가 매년 받아왔던 가정통신문 속 첫 문구와 같이.
글 쓴다는 사람이 어찌 이리 무드 없는지! 싶어도 어쩌겠나. 6월만 되면 ‘순국선열에 대한 글짓기’, ‘6·25 전쟁 XX주년 기념 반전 그림 그리기’가 먼저 생각나는 것을.
게다가 요즘 한창 한국 근현대사에 빠져 6·25 전쟁과 북한, 미국, 중국, 일본에 대해 수시로 물어보는 첫째 아이와 같이 책을 읽다 보니 그래도 ‘6·25 전쟁’이 첫 번째로 떠오른 거 보단 낫지 싶다.
교복을 벗고 난 후에 6월에는 특별한 일이 있었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역시 없다.
매년 하는 결심이 리셋되어 이번에는 반드시 계획을 지켜보겠다고 좀 열심히 사는 1월
마지막을 지켜드리지 못한 할머니 생각에 눈물부터 나는 2월
애틋했던 첫사랑과 수줍던 첫 키스가 생각나는 3월
하마터면 병원 가는 차 안에서 출산한 뻔 한 사랑둥이 둘째를 만난 4월
계절의 여왕답게 여행도 많이 다니고, 그만큼 추억도 많은 5월
처음으로 혼자 떠난 홍콩 야경의 기억이 맥주 한 캔의 안주가 되어주는 7월
금강산의 경치와 백두산 천지, 나와 이름이 같은 동생이 있다던 북한군인 아저씨의 미소가 생각나는 8월
태몽처럼 보석 같이 귀하고 예쁜 첫째가 태어난 9월
어느 멋진 날, 결혼식을 올리고 인도양의 풍경을 즐겼던 10월
오래전이지만 아직도 수능 시험 날의 추위와 떨림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11월,
크리스마스가 있기에 항상 설레는 12월.
어떤 달은 순식간에 한 바닥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추억과 인연이 많은데, 왜 6월 만은 나에게 어떠한 감흥도 남긴 것이 없을까?
인생은 살기 어렵지만 시는 쉽게 쓰셨다는 그 분과는 달리 나는 범인(凡人)이라 인생도 어렵고 에세이도 어렵다. 여태까지 살면서 6월에 대해 생각한 시간보다 이번 글쓰기를 위해 생각한 시간이 곱절은 많다. 그런데도 생각나는 게 없다니. 사놓기만 하고 쓰지 않아 빛이 바랜 A4 지와 같은 나의 지나간 6월들에 심심한 사과를 해야 할 판이다.
그러면서 다짐해 본다.
2023년 6월의 폴더는 꽉꽉 채워 보겠다고. 기왕이면 초여름 날씨처럼 찬란하고 반짝반짝한 기억들이면 더 좋겠다. 하지만 이르게 온 장맛비처럼 우울하고 힘든 기억으로 채워지더라도 그것 또한 나의 6월일지니. 어떻게 채워갈지는 오롯이 내 몫이다.
조바심 낼 필요 없다.
나의 에세이도, 6월도 이제 시작이다.
작년 5월에 글쓰기 수업을 시작한 후 받은 두 번째 과제의 주제는 '6월'이었다. 고로 이 글은 내가 쓴 두 번째 에세이다. 역시나 작년 6월도, 반쯤 지난 올해 6월도 별다른 일은 없다. 똑같이 회사 다니고,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하고, 글도 가끔 쓰면서 지내고 있다.
일 년이 지난 후에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 보니 '굳이 무슨 일이 있었어야 하나?' 싶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평화로운 일상들이 어쩌면 더 소중한 게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