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니 뭐니 해도 버릇 중에 최고봉은 ‘술버릇’이 아닌가 싶다. 최근 십 년 동안은 맥주 한잔 이상 술을 마신 적이 없어서 내 술버릇의 최신버전은 확인되지 않는다. 소싯적에 술 좀 마실 때에도 정신력으로 버티다가 집에 오면 긴장이 풀려 쓰러져 자는 재미없는 술버릇이라 패스하고, 내가 왜 술자리에서 필사적으로 취하지 않으려고 했는지 계기가 된 사건을 풀어보려 한다.
지금이야 수학여행을 제주도로도 가고 해외로도 가지만 우리 때는 거의 설악산 아니면 경주였다. 나도 이 두 곳을 한 해씩 번갈아 다녀왔다(3학년 때는 수능 준비를 이유로 절대 이런 야외 행사를 하지 않았다). 사건은 우리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일어났다. 왜 다들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선생님의 눈을 피해 밤새 음주가무를 즐기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짐 구석에 몰래 술을 숨겨서 간 적이.
우리는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한다.’ 작전으로 가기로 했다. 티 나지 않게 적당히 술을 몇 병 감춰두고 소지품 검사 때 선생님들이 의례적으로 “술 가져온 사람 지금 자수하면 봐준다!” 할 때 반장과 부반장이 쭈뼛쭈뼛 술 몇 병을 내놓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는 척을 한다. 그래서 선생님이 다른 가방은 뒤지지 않거나, 검사를 하더라도 대충 하도록 유도하여 빼돌린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자는 것이었다. 다행히 우리의 계획은 성공하여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장 안에 청소도구로 위장하여 숨겨놓았던 술병은 무사히 사수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도 수학여행에 오면 단합을 즐기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간이 무르익기까지를 기다리며 가볍게(!) 점당 10원의 화투를 쳤다. 처음 해보는 아이들이 많아서 단순히 그림 맞추기에만 급급하였어도 우리에게는 경로당 타짜왕인 할머니를 보유한 꼬미양이 있었다. 척척 자리를 맞춰주고 흔들기와 피박, 광박까지 ‘한게임 맞고’ 뺨치게 계산해 주는 꼬미양 덕분에 재밌게 화투를 치다가 밤이 깊어질 때쯤 슬슬 안주와 술을 꺼내 세팅을 시작하였다. 거의 대부분 처음 먹어보는 술에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어른들은 이런 걸 왜 맛있다고 먹나 모르겠다고 떠들기도 하면서 놀았다.
아수라장의 시작은 꼬미양의 외침이었다. “얘들아, 나 토할 것 같아! 우웁!”
화투판 옆에서 조용히 홀짝홀짝 들이키던 꼬미양은 어느새 만취가 되어있었다. 당시 숙소는 예전 군대 내무반 같은 구조였다. 긴 평상을 양쪽에 두고 가운데 복도가 있고 한쪽 평상에서는 술과 화투를 즐기는 아이들, 다른 쪽 평상에서는 자거나 조용히 얘기하는 아이들로 나뉘었다. 꼬미양은 화장실까지 갈 수도 없어 평상 사이의 복도로 입을 막으며 달려갔다. 거기에는 친구들이 벗어놓은 신발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꼬미양은 음식물이 식도를 역류하는 그 긴박한 순간에도 “애들 신발에다가 토하면 안 돼!!!”를 외치며 신발을 뒤로 막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신나게 그림 맞추다 비명과 함께 날아온 운동화 한 짝에 뒤를 돌아보니 숙소는 이미 난장판이었다.
도도한 노노양은 술을 준 사람도 없는데 혼자 언제 그렇게 마셨는지 벽에다 머리를 박으며 “나 안 취했어! 나 안 취했어!”를 외치다 꼬미양이 던진 신발을 맞고 방바닥에 쓰러졌다. 어찌나 힘차게 박던지 머리에 혹이 나는 것보단 차라리 자는 게 나으니 일단 노노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힘차게 내뿜는 꼬미양 옆에서 “나는 괜찮아! 구구단 외워볼까? 이 일은 이, 이 일은 이”를 외쳐대던 강군(여자이지만 대장부라서 별명이 강군)도 구석으로 치웠다. 하지만 굳이 토하는 꼬미양의 단발머리를 붙잡아 준다고 왔다가 자신도 같이 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또 옆에, 그 옆에 줄줄이 분수쇼가 펼쳐졌다. 그나마 꼬미양이 던진 덕분에 신발들은 무사해서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어쩐지... 언니가 이거 꼭 가져가야 한다더라.” 라며 가방에서 주섬주섬 일회용 봉투와 비닐장갑을 꺼낸 쌍둥이들 덕분에 친구들의 흔적을 맨 손으로 치워야 하는 최악의 사태까지는 피할 수 있었다. 도박에 빠져 음주는 멀리한 ‘흔적 처리반’은 우리도 차라리 먹고 취할걸 그랬다며 후회를 하고 또 했지만, 늦었다고 생각했을 땐 정말 늦은 후였다. 휴대용 티슈로는 엄두도 안나 화장실에서 큰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와서 한통을 다 쓴 후에야 광란의 밤을 마무리할 수 있었고 우리는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그다음 날 좀비 오십여 명은 숙취와 수면 부족이라는 각자의 이유로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서울로 올라왔다.
대학에 가서 꼬미양과 강군, 흔적 처리반 몇 명을 ‘준코’에서 만나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그때와 똑같이 단발머리를 한쪽만 귀 뒤로 넘겨 배시시 웃으며 술을 마시는 꼬미양을 보고 데자뷔를 느껴서 잠깐 오한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꼬미양은 알코올 여전사로 거듭나있었다. 오히려 여전히 구구단을 외우는 강군과 “너희들 이번에도 술 취하면 버리고 간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심양(전직 흔적 처리반) 때문에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남이 나의 적나라한 흔적을 보는 것도, 치우는 것도 심지어 그걸 기억까지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첫 술자리에서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나의 흔적은 변기를 붙잡고 웩웩거리는 나의 등짝을 강 스파이크로 내리치는 우리 엄마밖에 보지 못했다(엄마 미안).
적당한 음주는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친목을 도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도한 음주는 생명을 위협하거나, 한순간에 나락으로 빠지게 할 수도 있다. 요즘 이슈가 돼서 사회면과 연예면을 골고루 오르내리는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살포시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