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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텔라 Jul 10. 2024

행운의 날씨 요정

나는 사실 날씨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는 타입은 아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혹은 전날 저녁마다 날씨를 확인하는 이유는 아이들의 등굣길 옷차림이나 우산을 챙겨야 할지 말지와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맑은 날이라고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벼운 것도 아니며, 첫눈이 온다고 마음이 간질간질한다거나, 비가 온다고 옛 추억을 떠올리며 감성에 젖는 일도 극히 드물다. 


 하지만 날씨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는 날이 있으니! 바로 여행할 때다. 특히나 해외여행 때는 더욱 민감해지는 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찾은 재미난 그림을 하나 가져왔다.

 백여 개의 댓글들이 ‘번역봇’이 최고라느니, 무조건 ‘데미지 힐러’라느니 하며 저마다 자기 의견을 내세웠지만 나는 보자마자 외쳤다. “당연히 ‘날씨요정’이지!”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전혀 아니다. 파란 하늘이 보이는 맑고 쾌청한 날씨! 여행할 때는 모름지기 이런 날씨를 만나야 한다. 그래야 이동도 편하고, 내 여행 역사에 길이 남을 인생 사진을 건질 확률도 급속도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배경의 구 할은 날씨가 차지하며, 배경이 좋으면 모델의 부족함 마저도 커버가 된다. 이런 사소하지만 중요한 이유로 나는 짐을 쌀 때부터 맑은 날씨를 바라며 출발 일을 기다린다.


 200X년 가을, 학교에서 ‘중국문화기행’을 갔었다. 북경, 상하이, 연길 등을 답사하고 토론 활동을 하는 4박 5일의 일정이었다. 만리장성, 자금성, 이화원 등 유명한 관광지도 방문했지만 내가 제일 기대했던 일정은 ‘백두산 천지 등정’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참석했던 대부분이 학생들이 다들 그러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그 백두산. 천지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그 백두산. 바로 그 백두산을 직접 오를 수 있다니! 

 하지만 답사 때문에 이미 세 차례나 백두산을 방문한 적이 있는 총 위원회장 오빠가 희망적이지 않은 말을 했다. 백두산은 날씨가 백 번 바뀌어서 백두산이라며, 갔던 중에 두 번은 날씨가 너무 험해 아예 정상까지 오르지도 못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은 아닌지라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행 길에 올랐다. 


 여기저기를 신나게 탐방하고 드디어 백두산 근처 마을에 도착했다. ‘아직까진 날씨가 좋은데 괜찮겠지.’ 생각하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운전하는 지프를 타고 백두산을 향해 내달렸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덜컹이는 차에서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대는 이유가 기대감 때문인지 사고 날까 봐 무서워서인지 모를 정도였다. 

정상 근처에 다다라 차에서 내리자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 쨍하니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고비를 넘어 정상에 발을 디딘 순간!

 파란 하늘이 데칼코마니로 찍어낸 것 마냥 땅에도 있었다. 말문이 막혀 ‘우와, 우와!’ 감탄사만 연달아 터트리게 만든 파랗고 장엄한 천지의 모습이었다. 쉴 새 없이 디지털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고 눈으로는 그 멋진 모습을 담고 또 담았다. 가이드는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천지의 자태를 보며 자기가 더 뿌듯해했다. 민족의 정기가 담긴 산이라 그런지 쉽게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며 삼대(三代)가 덕을 쌓아야 천지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천지를 보고 싶어서 열 번이 넘게 온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해도 못 보는 사람은 절대 못 본다고, 천지를 보면 적어도 칠 년은 재수가 좋다고도 했다. 나를 위해 차곡차곡 덕을 적립해 주신 우리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아빠께 감사의 절이라도 올려야 할 것 같았다. 


 어느덧 내려가야 할 시간이 되어 아쉽게 뒤돌아섰는데 영험한 신령님이 배웅이라도 나온 것 마냥 갑자기 몰려온 구름이 순식간에 천지를 뒤덮었다. 정말 내 발끝도 보이지 않아서 다들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갈 정도였다. 

 우리 뒤에 온 관광객들이 올라오면서 천지를 봤냐고 물어봤을 때, 우린 당당히 봤다고 자랑을 했고 이제는 구름이 껴서 안 보인다고 했다. 단 15분 차이로 생긴 희비(喜悲).

나의 앞으로의 모든 ‘여행지 맑은 날씨 운’을 여기에 다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는 천지에서 기념 삼아 가지고 왔던 돌멩이도, 장백폭포에서 떠왔던 물도 서너 번의 이사를 거치며 어느새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를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천지의 그 웅장했던 모습만은 아직도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백두산과 천지를 만나게 해 준 삼대의 덕! 이번에는 외가 쪽과 날씨요정의 크로스를 살포시 기대해 보는 건 너무 큰 욕심이려나? 욕심쟁이라고 욕먹어도 좋다. 다시 한번 그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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