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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텔라 Jul 17. 2024

우산 순환설

비 오는 날 아침은 언제나 내 맘을 설레게 해.
우연히 내 우산과 똑같은
빨간 우산을 쓴 소녈 봤어
                                           (빨간 우산 / 김건모)


비가 오면 생각나는 노래가 많지만 지금 쓰는 내 우산이 '빨간 우산'이라서 그런지 제일 먼저 생각나는 노래다. 엄마가 골라주는 대로 쓰던 초등학생 시절을 지나, 내 마음대로 우산 색깔을 고를 수 있었던 중학생 때부터 노란 우산을 즐겨 쓰다가 어떠한 사건에 휩싸이고는(이 이야기는 바로 다음 편에 공개할 예정이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더 이상 노란 우산은 쓰지 않는다.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색상의 우산을 전전하다 마침 사은품으로 크고 튼튼한 빨간 우산을 얻은 이후로는 이게 나의 애정 우산이 되었다. 나는 흔히들 많이 쓰는 검정 우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도 내 물건을 잘 챙기는 스타일이지만, 검정 우산을 쓸 때는 나도 모르게 몇 배나 더 신경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수인분당선'이고 청량리가 종착역이지만 예전의 분당선은 선릉이 종착역이었다. 집에 가려면 서현역에서 타서 선릉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도 꽤 오래가야 하는데 갑자기 중간쯤부터 사람들이 흠뻑 젖거나, 우산을 들고 타는 게 아니겠는가. 오랜만에 해 떠 있을 때 퇴근한다고 좋아했더니만 재수도 없지. 이쯤 되면 야근이 내 운명인가 싶었다. 같이 사무실을 탈출하여 나보다도 먼 길을 가야 하는 선배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기예보에는 비 온단 얘기 없었는데 밖에 비 많이 오나 봐요. 저희 둘 다 우산 없어서 어떡하죠? 노트북 때문에 비 맞으면 안 되는데.”

선배는 의기양양하게 걱정할 것 없다고 하더니 귓속말로 속삭였다.

"선릉역에 도착하면 이 칸에서만 최소 우산 두 개는 얻을 수 있어."

"어떻게요?"

"두고 보면 알아."


종착역인 선릉역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내리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며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고, 우리 둘만 자리에 앉아 늑장을 부렸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텅 빈 객차 안에는 정말 선배 말대로 주인 잃은 우산이 여럿 있었다. 맘에 드는 걸로 골라보라던 말에 내가 주저하고 있자, 덩치가 컸던 선배는 검정 장우산을 집어 들고 나에게는 휴대할 수 있는 작은 검정 우산을 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남의 우산을 막 가져가도 괜찮아요?"

"‘우산 순환설’ 몰라? 원래 우산은 돌고 도는 거야! 나도 여러 번 잃어버렸어."

"저는 잃어버린 적 없는데요."

"그럼 일단 쓰고, 너는 내일 역무실에 습득물로 맡기던지."


원래 그렇게 하면 정말 안 되지만, 모든 정보가 들어있던 업무용 노트북을 비에 젖게 할 수 없던 나는 검정 우산의 탈을 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결국 그 우산을 쓰고 집까지 무사히 간 후, 다음 날 더 일찍 출근하여 선릉역사무실에 들러 분실물 습득 접수를 했다. 어제 내린 시간과 차량의 몇 번째 칸 인지까지 정확하게 써서.

그 우산이 주인에게 잘 돌아갔는지는 모르겠다. 습득물이 ‘아무것도 안 쓰여있는 검정 우산’이라는 얘기에 “어차피 찾아가지도 않을 텐데.” 하며 신고서를 건네주던 역무원의 태도를 보아 아마 그럴 가능성은 희박할 것 같았다.


회사에서 이 얘기를 했더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주운 우산’을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특히 남자들은 애초에 ‘자기 우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다 검정 우산을 쓰고 있었다.

그 이후로 우산에 약간의 집착 같은 것이 생겼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우산을 놓고 가면 꼭 불러서 챙겨주고, 사무실에도 여분의 우산을 두었다. 그리고 비슷한 게 많고 내 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것 같은 검정 우산은 잘 안 쓰게 되었다.  

회사 복도의 우산들. 대부분 검정 우산들이다.


오늘도 예보 없이 퇴근길에 내리는 비로 당황해하는 직장 동료에게 여분의 투명 우산을 하나 쥐어주고 나는 빨간 우산과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어느새 빗물이 내 발목에 고이고
참았던 눈물이 내 눈가에 고이고 I cry.
그대는 내 머리 위에 우산
어깨 위에 차가운 비 내리는 밤
내 곁에 그대가 습관이 돼버린 나
난 그대 없이는 안 돼요 alone in the rain

                            (우산 / 에픽하이 feat.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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