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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텔라 Oct 16. 2024

손가락으로 키운 딸

얼마 전 나의 시선을 끈 펀딩이 있었다. 나의 90년대를 간접육아의 길로 이끌었던 그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가 시대의 흐름에 맞춰 AI의 손길을 받아 돌아온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이 게임을 접한 게 30년 전이고, 마지막으로 정식판이 발매된 지도 벌써 17년이 넘었다니!

초등학생 때 사촌오빠를 통해 '삼국지'를 접하면서 컴퓨터 게임을 알게 된 후, 수많은 게임들이 내 손을 거쳐 갔다.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시리즈, '버블버블(보글보글)'도 있지만 내 가장 최애 게임은 바로 '프린세스 메이커(이하 프메)'였다.

'프메' 시리즈는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게이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1탄이 나왔던 1991년 이후로 정식판은 5탄까지 나오고 외전 게임도 여러 개가 출시되었다. 외전 게임은 안 해봤지만, 처음 프메를 접한 2탄뿐 아니라 나머지 정식판은 다 해봤다. 그래도 역시 제일 먼저 했던 '프메 2'가 가장 기억에 남고 애틋하다.

프린세스 메이커 2의 초기화면

'내가 키운 딸이 어떻게 되는가?'가 게임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지금에야 많은 육성게임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다소 생소했던 게임 방식이었다. '용사'였던 나(게이머)는 하늘에서 내려온 아이를 10살부터 18살까지 키우게 된다. 친딸도 아닌 아이를 엄마도 없이 혼자서!

시리즈에 따라 '집사'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어쨌든 주양육자는 아빠뿐이다. 심지어 돈도 별로 없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독박육아의 무서움을 아는지라 용사의 앞날이 가시밭길임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처음에는 예쁜 그림과 아기자기한 게임 내용에 홀려서 시작했지만 '왕자비 만들기(프린세스 메이커)'라는 목표를 향하는 도중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과 퀘스트들을 수행하는 과정은 나의 취향을 저격하였다.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계속 쉬기만 해도 (치트키의 도움을 받아) 엔딩을 볼 수 있지만 하나하나 파고들어 열심히 게임을 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엔딩들이 나온다. 지금 찾아보니 '프메 2' 엔딩은 무려 예순여섯 가지나 됐다. 처음에 혈액형과 생일을 설정하는 것에서부터 '프린세스'가 되는 조건이 시작된다. 내가 원하는 엔딩을 얻기 위해 중간중간 저장을 하고 실패할 경우 저장파일로 되돌아가 욕하면서(!) 능력치를 키우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마지막에 엔딩만 모아놓은 앨범이 있어서 가끔 쳐다보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못깨본 엔딩 갤러리를 채우기 위해서만 게임을 하기도 했는데 결국 다 채우는 것은 실패했다. 애초에 예순여섯 가지나 됐으면 작정하고 게임만 해도 어렵긴 했겠다.

프린세스 메이커 상태창

실제 육아에 있어서도 단순히 돈과 사랑만 퍼준다고 아이가 잘 크는 게 아니듯이 내 2D딸도 키우기가 만만치 않았다. 특히나 능력치 조절에 실패하여 가출을 밥 먹듯이 한다거나, 아파서 아무것도 못할 때는 슬픔을 넘어 짜증까지 유발했다. 처음에는 그냥 열심히만 하면 될 줄 알았다가 시시한 엔딩만 되풀이되자, 사촌오빠에게 SOS를 보냈다. 아마 심부름을 몇 번 해주기로 하고 오빠가 정기구독 하던 게임잡지(공략법과 엔딩이 나와있는)와 악필로 적힌 공략법을 받았던 것 같다. 공략법대로 해도 돌발 이벤트가 발생한다거나 조금만 어긋나면 결국 기대와 다른 엔딩이 되곤 했다. 치트키를 써서 돈도 안 줄고, 능력치를 몽땅 높였다고 해서 왕자비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공부도 가르치고, 아르바이트도 시키고, 다정한 말도 건네고, 여행도 가끔 보내주며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애지중지 키워야 겨우겨우 원하는 엔딩을 얻을 수 있었다.


초반에는 잘 몰라서 헤매기도 했지만 게임을 하면서 나의 모성애(여기서는 아빠니까 부성애이려나?)는 수직 상승하였고, 마지막에 엔딩을 보며 감동의 눈물까지 줄줄 흘리게 했던 '프메'는 단순히 모니터 속의 2D 딸이 아니었다. 예쁜 이름으로 짓기 위해 책을 뒤져 마음에 드는 이름도 찾아 헤맸고, 친구들과 함께 공략 방법을 논의했으며, 게임 게시판을 기웃대며 어떤 엔딩이 있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치트키의 힘을 빌리지 않고 드디어 왕자비로 만들었을 때의 그 희열감이란!! 하지만 나의 비뚤어진 심리 탓인지 왕자가 생각보다 멋지지 않아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왕자비 엔딩보다는 마왕 엔딩이 더 좋았던 것은 비밀이다.



시간이 흘러 실제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당연하지만) 2D딸과는 많이 다르다. 내 나름 최선의 방식으로 사랑을 주며, 공략집(각종 육아서)도 참고하며 키우지만 역시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그걸 이미 30년 전에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더 많은 걸 바라는 내 욕심은 어찌해야 할까. 실제로는 게임처럼 능력치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저장하고 다시 돌이킬 수도 없으니 손가락뿐만 아니라 온 마음과 온몸을 다 써서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프메의 엔딩에서 잘 키운 딸이 아빠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성인이 되어 내 품을 벗어날 때 엄마가 준 사랑을 기억하며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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