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쓰기와 무심한 치킨
오늘은 오랜만에 아들에게 집밥을 차려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요즘 일에 치여 거의 두 달간 끊임없이 배달 음식을 시켜 먹였더니, 뭔가 죄책감 같은것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집에 들어오니 6시. 아들은 6시 20분에 집에 온다. 오늘 수영을 갔다 오는 날이라 분명 배가 고프다 난리일 거다. 제때 밥이 안되어있으면 집에 있는 바나나며 과자며 집어 먹고는 저녁을 차리면 입맛 없어하는 걸 알기에, 집에 들어서자마자 쿠쿠에 쌀을 얹히고, 프라이팬에 고등어를 올려 굽기 시작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그저께 저녁에 내가 먹다 남기고 넣어뒀던 곱창전골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어제 남편이 시켜 먹고 남긴 순대도 있어서, 아깝다는 생각에 둘을 같이 넣어 끓이기로 했다.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음식은 정말 다시 요리해도 왜 맛이 없는지... 내키지는 않겠지만, 이렇게라도 먹고 정리해 버려야지 아니면 아깝다고 넣어놓은 음식들을 결국 그대로 버리면서 그 아까워했던 마음도 아깝고, 그걸 싸서 냉장고에 다시 넣은 정성도 아까워서 그냥 눈 딱 감고 먹기로 했다.
곱창전골은 아들이 먹기엔 좀 매워서, 아들용으로는 명란젓을 꺼내 잘라 참기름을 살짝 뿌렸고, 또 맵지 않은 김치를 썰어 준비했다. 낫또도 하나 뜯어 간장을 뿌려 주었다.
그동안 피자며 햄버거며 떡볶이며 배달 음식을 시켜줄 수밖에 없어 마음이 불편했었는데, 평범하고 별거 없는, 오랜만인 이 식탁 앞에서, 잠시 내가 너무 괜찮은 엄마가 된 것 같은 우쭐한 기분마저 들었다.
저번 달은 유난히 바빴다.
한 달 내내 중요한 보고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분석하고 자료 만드는 것도 만드는 거지만 리뷰하고 고치길 반복한 데다, 보고 일정이 2주가 밀리는 바람에 제때 보고 했으면 안 해도 됐을 수정, 자료 추가를 해야 했다. 할 일이 많았지만 아들 하원해야 해서 야근을 못하니, 집에서 아들 밥 먹이고 재우고 나서 다시 일을 하거나, 아예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피곤은 쌓여가는데, 늘 마음 한편이 긴장되어 있으니 언제나 퀭한 눈으로 아들에게는 의욕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정신이 없기도 없었고, 집에 들어오면 손하나 까딱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어쨌든 보고는 끝났고 오늘은 긴장된 시간에서 드디어벗어나서 그런지 집에 도착해서도 움직일 힘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저녁이 끝나고 아들은 받아쓰기 연습을 시작했다. 나는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꽂고 밀리의 서재에서 읽던 책을 tts 모드로 바꿔서 들으면서 식탁에 남은 그릇들과 식기들을 하나씩 식기세척기에 정리해 넣었다.
한창 이야기에 빠져 집중하고 있을 때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며 남편이 들어왔다.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는데, 펼치는 걸 보니 치킨이었다.
언젠가부터 서로 저녁에 대해 묻지 않고 있다.
그게 언제부터였더라.... 집에 있는 것으로 간단하게 뚝딱 잘 먹는 내 스타일의 저녁을 그는 싫어했고, 그냥 먹자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아보카도 명란 덮밥이나, 낙지젓 비빔밥, 장조림버터비빔밥 같은 것들 말이다. 그는 꼭 고기를 굽거나 고기가 없으면 스팸을 굽거나 여하튼 고기류를 구워야 했고, 그런 게 없으면 피자를 시켜 먹었다.
이게 집에서 내가 집에서 밥을 해 먹는 순간뿐만 아니라, 내가 시켜 먹을 때도 그는 그가 꼭 먹고 싶은 특정 한 걸 시켜 먹어야 했다. 이러다 보니 어차피 마음에 안 들어할 거 알아서 먹으라는 식으로 저녁때에 연락을 안 한 지가 한참 되었다.
그제는 아들과 내가 햄버거를 시켜 먹고 있는데, 남편이 떡볶이와 순대를 사들고 들어와서 따로 먹었고, 어제는 보고가 끝난 기념으로 맥주 한 캔을 따고 싶어서 아들과 치킨을 시켜 먹었는데 남편은 피자를 따로 시켰다.
오늘같이 고등어와 명란젓 같은 조합이면 말해봤자 싫다고 피자를 시켜 올게 뻔했기에 얘기도 안 꺼낸 것이다.
분명 이게 가족으로서는 괴상한 장면이 맞는데, 그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해 보였다. 그는 이어폰을 두 귀에 꽂고 유튜브에 몰두한 채 치킨을 뜯기 시작했다.
아들은 받아쓰기 연습을 마치고 모의시험을 항상 보는데, 아빠에게 시험을 봐달라고 부탁하려고 아빠를 불었다. 그러나 남편은 “아빠는 밥 먹어야 되는데 어쩌지? “ 라며 아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나를 흘깃 봤다.
나는 속으로 ’ 나라면 저녁 먹으면서도 해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으면서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를 보는 것과 밥 먹으면서 문장 몇 개 불러주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에너지 소모의 차이가 있을까.
언제나 남은 일이 있어 업무를 하면서 아이 숙제를 봐주고, 먹은 그릇을 치우거나 빨래를 개면서 아이랑 같이 놀고, 저녁은 언제나 아이와 함께 먹으며 옆에서 가지를 발라주고 흘린 거 닦고.... 이런 내 모습이 씁쓸해졌다. 그의 생각이 맞다면 나는 잘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가 맞다면 나도 맞게 행동해야 하나. 그런 맞는 행동을 하면 아이는 어떻게 케어할 수 있지?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는 무는 생각들... 내 생각은 현실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내가 아들의 받아쓰기 시험을 불러줘야 했다. 식기세척기에 정리할 그릇이 더 남았지만 고무장갑을 벗고 문장을 불러주고, 틀린 문장을 다시 봐줬다.
시험을 마치고 나서 나는 다시 남은 그릇을 정리하러 장갑을 꼈고 아들은 아빠를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아빠! 내일 레고 수업 전에 저번에 만든 레고 해체해야 하는데 아까워서 핸드폰으로 동영상 찍고 싶어!”
여전히 이어폰을 낀 채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는 남편은 아들의 부름에 반응하지 않았다. 아들은 다시 한번 아빠를 불렀지만, 그는 여전히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결국 아들은 한 번 더 큰소리로 불렀는데, 남편은 보고 있던 핸드폰을 주기를 머뭇거렸다.
나는 얼른 장갑 한 짝을 벗고 내 핸드폰을 꺼내 아들에게 건넸다.
“엄마걸로 찍으면 되지~ 이걸로 찍어.”
아들은 활짝 웃으며 내 핸드폰을 받아 들고 레고를 동영상에 담기 시작했다. 아들이 웃으면서 동영상을 찍고 있고... 남편은 여전히 이어폰을 끼고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나는 잠시 서서 그냥 둘을 번갈아가며 봤다.
한숨이 난다거나, 기가 찬다거나, 불만의 감정이 생긴다거나... 이런 감정들의 소용돌이는 진작에 어느 시점엔가 지나갔다. 그래도 다시 바람이 불 때면 충치를 깎아낸 치아 위로 블로윙건을 쏘는 것처럼 기분 나쁜 시림 같은 게 느껴졌다.
치킨을 다 먹은 남편은 아무 말 없이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치킨 박스와 콜라 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도 남은 치킨은 냉장고에 넣어놔서 다행이랄까. .
내가 회사일이 바빠 집안일에 소홀해서 미안하다던가,체력이 안되어 그의 것까지 매번 못챙기는 것이 내탓이라던가,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밥도 안 차려 주고 매번 배달시키는거 맘이 안좋다는 진부한 말 같은 걸로만 이 집안 풍경이 설명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같이 나를 누르는 무거운 피로 감들, 그 속에서도 일상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고단함. 그리고 분명 둘이 있는데, 이상하게 나 혼자만 있는것 같은 고립감이 나를 짓누른다.
내가 하는 노력들.... 과연 의미가 있을까?
보고가 끝나서 여유로우니 이런 생각할 시간도 있다며, 스스로에게 사치라고 되뇌었다.
나에겐 그런거 골똘히 생각할 시간이 사실 회사일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없다. 이제 아들이 양치를 다했다고 나를 부르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총량은 언제나 같다. 회사일이 많으면 아들과 집에 가야할 에너지가 회사일로 가고, 적당하면 아들과 집에 더 갈뿐이라 나에게 남는게 없다.
이제 치실을 해주고, 머리를 말려준다. 자기전 같이 책을 읽은 후 더 늦지 않게 자도록 해야 한다.
내일은 내일의 온갖것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