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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를말하는사람 Aug 06. 2021

결혼, 그 쓸쓸함의 기록 6

모성애의 고찰

오늘은 아침부터 부엌에서 분주하다.

소고기 국거리를 참기름에 달달 볶고, 미역까지 볶다가 물을 붓고 보글보글 끓인다. 계란을 3개 풀고 명란과 파를 섞어서 계란찜을 전자레인지에 돌린 후, LA갈비를 두줄 정도 굽는다. 밥솥에서는 쿠쿠가 뻐꾹뻐꾹~ 밥이 다 되었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아침을 먹지 않는다. 아침은 보통 아들을 위해 차리기 때문에 계란 프라이나 햄같이 간단히 굽는 것들을 하고, 어제 먹고 냉장고에 보관한 반찬을 꺼내고, 보관용기에 든 밥과 국을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는데, 오늘은 왠지 따뜻한 밥과 국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아들 생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더운 여름에 아들을 낳았구나…

이런 더위에 난 만삭이었고, 힘들었겠다.

몸이 기억하는 건지 오늘 유난히 골반과 그 주변이 욱신욱신거린다. 아이를 낳은 후 생긴 손목 통증은 만성이지만 김치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들고 오는데 손목이 아파 내려놓을 때가 다돼서 놓치고 말았다.


‘힘들었겠다…’ 마치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

나에게 정말 임신은 남의 일이었다.

결혼하던 그 해에 팀 내에 메인이었던, 하고 싶었던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고, 남다른 열정을 쏟아붓던 연극 동호회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역할로 꼭 무대에 서보고 싶었다.


난 당장 임신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저 일들은 꼭 끝내고 아이를 갖고 싶었다.

반면에 남편은 아이가 빨리 생겼으면 했다. 그는 아주 심플했다. 결혼했으니 아이가 생기는 대로 낳는 게 당연하다고 말이다.


내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채 신혼은 흘러갔다. 결혼한 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는 회사고 친구들이고 연말 모임으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임신했다는 걸 안 건, 회사 송년회 날이었다. 회사 셔틀버스를 타고 출장을 서울에서 1시간 거리로 자주 다녔는데, 그날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속이 메스꺼워 너무 힘들었었다. 송년회라 아무래도 술을 마실 거 같은데, 느낌이 이상해서 들어가는 길에 약국에 들러 테스트기를 샀다.


결과는 예상대로 2줄이었다.

“아… 어떡하지…”

나는 그 처음 알게 된 순간의 당혹감을 기억한다. 아이가 생겼다는 기쁨보다는 여러 가지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먼저 밀려왔기 때문이다.


해외출장을 가야 하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예정일이 맡은 프로젝트가 끝나기 전이어서 결국 누군가에게 넘겨야 할 것이었다. 내가 준비하던 연극은 5개월 후 공연인데 아무래도 배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하차해야 했다. 술 좋아하고 모임 좋아하는 나는 이제 더 이상 지금과 같이 생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것은 신혼인 그때 나와 “근본적인 다름의 문제”로 정말이지 매일 싸우고 있는 남편과의 관계가 임신으로 인해 생각할 여지도 없이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에 뭔가 공평하지 않은 관계가 된다고도 생각했다.

한편 내가 아이를 키우기에 금전적으로 충분히 준비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걱정이 되었다. 아이에게 한 달에 100만 원 정도 들어간다면 우리 월급으로 유지가 가능한가? 아이를 낳고 휴직을 하면 어떻게 되지? 계산을 똑바로 하고 이제 자신의 만족을 위해 쓰는 것들을 줄여야 했다.

저 모든 일들이 아… 라는 나의 탄식 1-2초 사이에 머리를 뚫고 지나간 것이다.


‘지워야 하나….’


그 순간 아이를 가진다는 행복감과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찾아왔다.

그 행복이 마음에 자리 잡은 게 아니라 언제나 그 둘은 임신 내내 내 마음에 공존했다.


온통 임신은 축복이다. 아이를 가져서 너무 행복해요. 아이가 세상의 전부예요. 등등 임신에 대해 내가 생각한 이미지는 경외감 그 자체였는데, 난 내 모습이 마치 괴물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에게도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심지어 임신하지 못하고 있는 내가 모르는 다른 엄마들에게까지 미안한 것이다.


그 당시 이런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이해받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난 가까운 누구에게도 저런 내 마음들을 말할 수 없었다.

‘저 생각들을 입밖에 내면 사람들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 은근히 걱정이 됐다.


모두 나의 임신을 두고 내가 당장의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그리고 삶이 바뀐다는 것에는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사회적 시선으로 엄마가 가져야 하는 감성을 얘기했고, 아이가 있을 삶에 대해 갓난아기 때의 수고로움, 그리고 그 후에 올 행복함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었다.


남편은 아이가 태어날 것에 대해 매우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삶은 어느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모임을 좋아하는 그는 나의 임신 후에도 술을 먹고 새벽에 들어올 수 있었으며, 나와 같이 하던 연극 동호회의 작품이 하나 끝나기 전에 또 다른 작품 연습에 들어갔다. 주말에 사회인 야구 또한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건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같았다.


몸의 변화와 생활에 변화가 없는 그는 내 상태를 전혀 공감하지 못했고, 공감해야 할 필요도 못 느끼는 듯했다. 그는 그가 하고 싶은걸 하고 사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임신 중에 남편의 취미생활, 술 먹고 늦은 귀가 등으로 우린 참 많이도 싸웠다.

“임신해서 네가 술 못 먹고 연극 못한다고, 나도 못해야 하는 거냐? 이런 거에 공평한 걸 주장하는 게 꼴페미들이 하는 짓이야”


한 번은 싸우다가 남편이 매우 억울해하며 이런 말을 했다. 그 말은 나를 너무 이기적이고 치사하게 느끼게 만들었고, 내가 다른 여자들과 생각이 너무 다른 꼴페미라서 이 사람을 괴롭히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여자니까~ 임신했으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애가 태어날 거니까 엄마가 참고 견뎌야지”

“남자들은 다 그래~ 이해해야지 어쩔 수 없지”


임신하는 동안 나의 전부인 일, 취미 생활 모두 잃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했다.

난 임신하는 동안 상당히 우울해하며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감정 들에 비하면 아직 태어나지 않을 아이에 대한 모성애는 매우 작았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비로소 난 오히려 내 몸속에 아이가 없어짐에 대해 자유로움과 함께 해방을 느꼈다. 사람들이 모성애라고 부르는 그런 마음도 저 연약한 생명을 눈으로 보고 귀로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샘솟았던 것 같다.


‘ 아… 드디어!” 모성애라는 걸 실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는 임신한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받아 안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

“엄마 ~ 심심해 놀아줘~~”

내가 밥을 하는 동안 생일 선물로 사준 현미경이 지겨워진 아이에게 여러 가지 다른 샘플을 올려주고 초점을 맞춰주면서 아이가 좋아하는 가지 튀김을 했다. 남편은 9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방으로 가보니 자고 있기에 아이 생일인데 미역국을 같이 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깨웠다.


평소엔 깨우지 않지만 그래도 아이 생일이라 휴가까지 냈는데 아침 미역국은 같이 먹는 게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편도 어느 정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평소 같으면 안 먹는다고 할 미역국을 그래도 앉아서 한 그릇을 먹고는 맛있다고 했다.


지금 난 그의 삶이 부럽다. 그는 안정적이고, 평온하고, 그가 하고 싶은 것들을 여전히 즐기며 살고 있는 것과 같이 보인다. 늦잠 조차 말이다.

그에게 물어보면 그는 포기한 부분이 많다고 했다. 남들에 비해 본인이 아이에게, 그리고 집에 하는 일이 너무 많다고 했다.

‘남들에  비해……’


그에게 남은 누구일까.


그의 앞에 지금 앉아있는 ‘남’은

임신하면서 하던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넘겼고, 전시 출장 준비를 고생해서 하고서는 다른 선임이 전시장에 출장을 가서 수고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육아 휴직 후 직장에 돌아갔을 땐, 원래 내가 있었던 할 포지션에 다른 사람이 있었고, 일을 잘 해내고 있었다. 나와 같이 팀 업무를 하던 선배들도 후배들도 다 다른 곳으로 떠난 뒤였다. 이전에 일했던 업무 히스토리는 하나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히스토리는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빨리 트렌드가 변하는 세상에 히스토리는 회사 서버가 기억하고 있지 내 기억이 필요나 있을까. 난 팀 내에서 이전과 같이 내 자리를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난 이직 또는 다른 부서로 전배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새로운 환경이니 다른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랑 뭐가 다를 것인가. 여기서 어중간한 포지션을 취할 바엔 정확히 어떤 업무가 필요하다고 하는 곳에 가면 적어도 지금과 같이 겉도는 기분은 없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취미 생활은 언감생심이었다. 너무 하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남편이 임신 후부터 출산하는 그 순간까지도 취미생활은 계속해왔기에, 나도 하고 싶은 취미는 할 것이라 굳게 다짐하고 업무 복귀 후 연극을 하나 준비했다. 그때 막 부서를 옮긴 참이라 일이 너무 많았다. 주중에 야근도 하는데, 주말의 한나절을 비우니, 남편은 내가 취미 생활을 하는 동안 나의 부재에 화가 항상 나있었다. 그 당시가 아이가 아빠랑 자겠다고 떼쓸 그 시기였다.

그러는 그때도 그는 일주일에 주말 한나절은 취미생활을 하러 나갔다. 남편은 취미생활을 계속해도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 그는 “나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 아이를 보잖아. 너는 일도 많으면서 취미생활을 하는 게 엄마로서 자격이 없다” 고 말했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으로 치자면 그보다 적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임신 때는 생각 못한 복병도 있었다. 바로 나의 몸 상태다. 운동이라곤 연극 연습 때 동선 연습 빼고는 안 한 몸이라 그런지, 출산 후 거의 1년간을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발바닥을 바로 딛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발바닥 발목 골반까지 이어지는 통증이 있어 몇 번을 절둑거리고 나서야 걸을 수 있었다. 골반은 아이 낳고 100일 때까지는 한번씩 생리통 같은 통증에 밤에 자다 깰 정도로 지속되었다. 지금도 조금 피곤한 날이나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해야 해서 조금 오래 서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아프다. 관절이 약해져 있다고 아이가 봐주지 않는다. 손목은 힘을 주는 동작마다 뼈마디가 아프다.


직수가 흔치 않아 사무실에 정수기 물통을 갈아 쓰던 시절, 여사원들은 모두 남자사원들에게 부탁할 때, 지나가던 내가 물통을 번쩍 들어줄 정도로 힘이 세던 내가, 이제 김치통 하나 드는데 손목에 무리가 와서 손목을 한번 털고 꾹꾹 눌러 줘야 한다.


생활 패턴은 어떠한가. 원래 학창 시절부터 올빼미 파여서 밤을 많이 새웠다.

밤에 아이디어와 감성이 샘솟고, 집중도 잘 되었다. 맞다. 그래서 그런지 술도 밤부터 새벽까지 잘 마시는 나였다. 그래서 난 언제나 늦잠 자는 걸 즐겼다. 임신 전에는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친구들과 놀았고, 주말에는 어김없이 오후 1-2시까지 자곤 했다. 난 잠을 많이 자야 하는 사람인데, 아이가 아주 신생아 때는 어차피 잠이란 걸 제대로 못 잤고, 큰 후에도 아이가 새벽같이 6시 전에도 깼기 때문에 일찍 자야 했고, 일찍 일어나야 했다. 육아가 아닌 내 일이라도 좀 볼라치면 더 일찍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남들보다 내가 훨씬 많이 하는데, 넌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칭찬도 안 해주고”


이때의 심정은 마치 남편에게 냉장고에 넣어놓은, 저번에 먹다 남은 카레를 찾아 달라고 했을 때, 한참을 찾다가 못 찾고는 스테인리스 통에 나물이라고 적인 통 밖에 없다고, 냉장고 안에 대고 짜증스럽게 얘기했을 때와 마찬가지의 답답함이었다.


내가 아무리 남편에게 나에겐 이런 엄청난 일들이 저쪽 창고에 있으니 찾아봐줘.라고 말을 해도,

남편은 창고에 가서 “엄마로서 당연한 것들”이라고 이름이 써져있는 자루가 있다. 는 것만 발견하고 남편은 그런 자루가 있다고만 얘기하는 것이다.

열어 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아니 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이 자루는 남편이 나에게 씌운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의 부모님, 아니 그의 부모님은 그 부모님, 그 부모님의 부모님, 그들의 조상, 조상의 조상이 살던 그 세계부터 앞으로 태어날지도 모르는 나에게 씌워졌는지도 모르겠다.


그 세계가 언제 적 세계인데… 세상이 바뀌지 않았을까. 아니다. 고작 그 자루에서 의식 있는 누군가에 의해 몇 개만 꺼내어졌을 뿐, 자루는 아직 이름이 붙여진 채로 씌워져 있다.


남편의 잘못만으로 덮어씌우기에 남편은 그저 이 시대에 이 사회에서 남자로 교육받았을 뿐, 그에게 너무 가혹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남편은 ‘여성인 아내의 직업, 삶, 몸의 변화, 육아의 전념은 당연하다. 아내는 거기에 대해 생각할 것도 없다.’는 정의에서부터 출발했기에 우리의 대화는 점접이 있을 수가 없었다.


“남자 말 맞다 해주고, 칭찬해주고 여우같이 해야지”

나이가 조금 있으신 여자분, 아니 나의 또래들도 결혼의 지혜를 통달한 듯한 뿌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조언을 했다.


난 심각하게 고민해보았지만 결국 그들의 조언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도 나의 생각이 있는데, 남편 말이 맞다 인정하며 산다는 건, 남편의 정의 아래 모든 것이 판단되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남편의 정의 아래에선 난 언제나 하고 싶은걸 못하는 순간에도 일을 해서 육아를 다른 집처럼 못하는걸 미안해야 했고, 남편은 원하는걸 다 하고 살아도 언제나 다른 집 보다 더 하는 것에 대해 고마움과 칭찬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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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아이 생일은 엄마에게 감사해야 하는 날이라고 했다. 이 말을 출산의 산고 때문으로만 가볍게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 더 자신을 포기해야 했던 우리 시대 이전 어머니들, 자신의 삶은 없이 모성애란 이름표 하나로 살았던, 그녀들의 희생과 수고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똑같다. 우리 어머니 세대는 집안일을 직업으로 삼을 만큼 여유가 있는 편이었지만, 그 전 세대들은 아마 대부분 여자들이 경제를 위한 노동을 같이 해왔을 것이다. 아! 변한 것도 있다. 남편이 술 마시고 때리는 것이 나쁜 행동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는 정도…


난 남편이 정의하는 모성애와 다른 선으로 평행선을 달리기로 했다. 남편의 잘못이라 딱 잘라서 말할 수 없는 이 문제에 대해, 적어도 아들이 아빠보단 나은 모성애의 개념을 갖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할거 같았다. 그래야 그 아들의 아들의 세대는 지금 이 세대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성애라는 관념이, 마치 지금 술 마시고 때리는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우리가 얼마 전에 깨달은 것처럼, 한 인간에게 터무니없는 요구였던 것을 겨우 인지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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