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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별 Jul 27. 2022

나의 어둠을 소개합니다

가족, 그 속의 작은 공허

가족, 그 속의 작은 공허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웠다. 이유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대개는 돈 문제였던 것 같다. 그러나 부부 싸움의 이유 따위보다 훨씬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따로 있었다. 부부 싸움이 벌어지던 순간 내가 느낀 것들이었다. 나는 전등을 끈 방구석에서 점점 높아지는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곤 했다. 훅훅거리는 나의 숨소리가 이불 속을 한바퀴 돌아 귓속을 파고들 때면, 나는 이상한 현기증이 핑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어머니가 우는 것을 두 번 보았다. 한 번은 몇 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였고, 한 번은 바로 이 즈음이었다. 나는 열 살이 안 될 무렵이었고, 그 날의 부부싸움은 아버지는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가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일방적인 휴전을 맞았다. 끝은 없고, 매일매일 재개와 휴전만 되풀이하는 것 같은 싸움이었다. 잠깐의 침묵 뒤에 엄마가 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건 소름이 끼치도록 처연한 곡소리였다.


열 살도 못 된 꼬맹이에게 어른이, 그것도 다른 어른도 아닌 엄마가 울 수 있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세상엔 어떤 법칙이 있고, 모든 것들이 융통성 없이 그 법칙을 따라서만 움직이는 줄 알던 나이였다. 12시가 넘도록 깨어 있는 어린이는 귀신이 잡아가고, 아무리 화장실이 급해도 여자 화장실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는 그런 법칙들이었다. 그 법칙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가 울 때 어른은 달래줘야 한다. 어른은 울지 않으니까’였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라도 그 법칙을 지켜야 했다. 그래서 나는 방에서 뛰쳐 나와 흐느끼는 엄마를 껴안았다. 엄마, 엄마, 울지 마. 나도 울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부둥켜 안고 함께 울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는 장면 중 하나이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항상 위태롭고 우울하기만 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아버지는 좀 괴팍하고 신경질적이셨을지언정 최선을 다하는 가장이셨다. 어머니는 언제나 내 편이었고, 나는 ‘이 집은 막내아들이 딸 노릇을 하네’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정도로 어머니에게 애교를 부리곤 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형은 숫기가 없는 편이지만 나와는 항상 친구처럼 지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이렇게 구구절절 길게 묘사한 것은, 나는 우리 가족의 모습에도 내 어둠의 한 뿌리가 깊이 박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아마 이 글을 쓰면서 앞으로도 몇 번이고 계속 다룰 이야기지만, 다시 나의 외로움에 관한 것이다. 어머니와 살을 맞대고 함께 부둥켜 안고 울고 있는 이 모습에서도 나는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아버지는 권위적인 폭군이었다. 거실 마룻바닥에 엉망으로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든, 아들놈들이 게임을 하는 모습이든 집안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걸 보면 꼭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면 다른 가족들은 똘똘 뭉쳐서 저항했다. 아버지가 화를 내는 당사자가 누구냐는 그때그때 달랐지만, 실상은 언제나 일 대 삼의 싸움이었다. 머리가 조금 크고 나서부터 나는 언제나 세 명의 리더 역할이었다. 아버지와 직접 싸우기도 했고, 어머니나 형과 아버지가 싸울 때는 힘을 보태주거나, 대신 싸우거나, 협상의 다리를 놓아주곤 했다. 그래서 일 대 삼의 싸움은 다시 일 대 일의, 아버지와 나의 싸움이 되곤 했다.


나는 아버지라는 폭군 앞에서 어머니와 형이 무력하고 불쌍한 존재들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아주 어릴 때부터, 얇은 미닫이문 너머로 엄마와 아빠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오면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시절부터 말이다. 말수가 없고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할 줄 몰랐던 형은 아버지의 폭정을 묵묵히 인내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긴 싸움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연약한 두 사람을 지키고 대신 화를 내며 맞서 싸우는 건 오로지 나의 역할이었다.




그건 나를 지켜주기 위해 싸워주는 어른은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아주 어릴 때부터 말이다. 갈등이 발생하면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내가 나서서 싸워 이겨야 했다. 외로운 싸움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났다는 것은 책임감을 늘 버거울만큼 무겁게 받아들이는 나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매사를 그렇게 받아들였던 나는 언제부턴가 기진맥진해 무력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혼자 3인분의 싸움을 싸우는 삶이었으니.


그 영향인지 나의 유년기에서 모성애의 공간은 텅 비어 있다. 내담자로서 상담을 받으며 서른이 넘어서야 발견한 내 안의 공허였다. 어머니는 훌륭한 살림꾼이자 양육자였고, 언제나 나와 같은 편이었으며, 지금도 나의 소중한 친구이지만, 안타깝게도 거기까지였다. 어린 내가 울고 있을 때 어머니는 나와 함께 우는 사람이었지, 나를 달래주고 지켜주는 따스함은 아니었다.


이제 와서 내 우울이 어머니와 아버지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생애 초기에 경험한 양육환경이 우울증을 비롯한 신경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심리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하지만, 그게 내 모든 불행의 책임을 두 사람이 짊어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삶은 얼만큼의 최선만을 다한다면 100점짜리 성적표가 툭 튀어나오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내가 경험한 삶이란, 운이 어느 정도는 따라야 겨우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는 것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최선을 다 했다. 다만 100점짜리 성적표를 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도 나이가 들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나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반지하 전셋집에서 걸핏하면 언성을 높이던 그 때의 나이가 된다. 그건 나의 마음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질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고, 그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나의 우울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은 그 후속 조치를 어떻게 할 지도 내가 정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행복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흔한 격언은 그런 뜻이리라 생각한다. 그 누구도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누구도 나를 행복하게 할 수도 없다. 결국 상처와 행복은 주어진 상황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결국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나는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말은 이토록 냉엄하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조심스레 적는다. 


이제부터 나는, 행복하게 살아갈 작정이다.




'나의 어둠을 소개합니다'는 뉴스레터를 통해 연재했던 에세이 원고를 다듬은 글입니다. 퇴고본이기 때문에 뉴스레터 연재 당시와는 다소 내용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매주 수/일요일 업로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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