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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별 Jul 24. 2022

나의 어둠을 소개합니다

기억의 시작으로부터


어버이날입니다. 저는 메일 발송 예약을 걸어두고, 곧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입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카네이션과 조그만 선물을 들고 올 생각입니다. 차 한 대를 가족들이 돌려쓰다 보니 불편한 감이 있어서, 이번엔 스마트키를 선물해드리기로 며칠 전부터 말씀을 드려 두었습니다.


어머니는 기념일에 무덤덤한 가족들에게 자주 서운한 표정을 보이십니다. 아들만 둘이 있는 집이라 더 그러시겠지요. 카페에서 글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의 입술이 비죽 나와 있습니다. "넌 오늘 어버이날인 것도 몰랐지?"라는 잔소리는 덤이었구요. 엄마, 말씀 안 해도 어련히 알아서 챙겨드릴텐데... 아들도 괜히 섭섭한 마음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맞는다는 게, 평생을 함께 살아 온 가족끼리도 참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머니가 원하는 건 거창한 선물이 아니라 아침나절에 자그만 꽃다발을 받아들고 웃으며 하루를 시작하시는 것일 텐데, 그게 뭐라고 이 아들은 아들의 방식대로만 사랑을 표현하려 하고 있네요.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해 주고,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의 사랑을 받더라도 그 마음을 알아주기. 좀 더 성숙한 사랑이란 무엇인지, 화두를 뜻밖에 받아들게 됩니다. 여러분의 어버이날은 어떠셨나요? 여러분은 좀 더 성숙하게 사랑하는 하루를 보내셨기를 바라며,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기억의 시작으로부터


까마득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나의 가장 오랜 기억은 이 어둠이라는 친구와의 첫 만남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이 무렵의 기억들은 단편적이고 그다지 선명하지 않다. 아마 너덧 살 무렵이 아니었을까. 그 때 나는 처음으로 혼자 집을 보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었고 집은 슬금슬금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이 집을 빈 틈 없이 집어 삼켰을 때, 나는 새삼스럽게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때 거실에는 LP판과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는 전축이 있었다. 우리 형과 나는 망가뜨릴 수 있는 물건은 모조리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말썽꾸러기였는데, 그 전축은 가장 만만한 희생양 중 하나였다. 우리는 전축의 버튼이란 버튼은 죄다 잡아 뽑고, 카세트테이프를 넣는 문짝을 반대로 꺾어 부러뜨리고, 몇 안 되는 LP판은 오물오물 씹어서 이빨 자국을 한가득 남겨 놓았다. 덕분에 그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던 기억은 거의 없지만, 우리가 기어코 망가뜨리지 못한 전축의 기능이 하나 있었다. 빨간 숫자가 반짝거리는 디지털 시계 기능이었다. 


집이 어둑어둑해지자 나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이미 나는 목청만큼은 남달라서 동네에서 제일 가는 울름보였다. 거실에 홀로 남은 다섯 살짜리 꼬맹이는 그 때도 세상이 떠나가라 요란하게 울어댔다. 엄마, 어엄마, 어디 갔어, 나 엄마 보고 싶어…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그 전축의 디지털 시계였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도 디지털 시계의 액정에는 빨간 숫자가 나를 노려보는 눈동자처럼 쉼없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어둠을 찢고 송곳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빨간 숫자를 떠올리면 팔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상담사들은 내담자들에게 “가장 오래된 기억이 뭐예요?” 하고 물어보곤 한다. 아들러라는 아저씨에 따르면 그 최초의 기억이 정말 사실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단다. 혼자 집을 보다 엉엉 울어버린 저 기억은 사실 엄마가 집 앞 슈퍼에 다녀온 5분 사이에 일어난 일일지도, 어쩌면 내가 낮잠을 자다 꾼 무서운 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기억을 내 의식의 시작점으로 삼기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그건 의식적이라기보단 무의식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그 최초의 기억으로부터 어떤 감정을 엿볼 수 있는지는 내가 내 삶을 어떤 것으로 이해하느냐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내게 내 삶의 시작은 외로움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여진다고 말하곤 한다. 한 사람의 삶을 역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저 말은 우리의 삶에도 똑같이 통용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삶은 감정과 관점의 전쟁터다. 나의 삶은 외롭지만 언제나 외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울보지만 우는 날보다는 웃는 날이 더 많았다. 나는 내가 너그러운 편이라 생각하지만 잘 나가는 친구들을 보며 질투심에 불타던 때도 물론 있었다. 이토록 다채로운 우리의 감정 중, 우리의 무의식은 하나의 승리자를 원한다. 나의 무의식은 삶을 외로운 것으로 이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우울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놀랍게도 그건 실제로 내 삶이 얼마나 외로운지, 우울한 사람들의 삶이 실제로 얼마나 우울한지와 어느 정도는 별개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울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겠지만, 고난을 이겨내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반대로 남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기는 일에도 누군가는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곤 한다. 그건 그저 누군가는 삶을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고, 누군가는 우울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승자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역사만을 남긴다. 내 무의식의 승리자인 외로움은 과거를 돌아보며 내 삶에서 외로운 기억을 추려내고, 그런 기억들로 내 삶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그 시기의 나에게는 말썽꾸러기 형과 함께 오래된 전축의 LP판을 꺼내 잘근잘근 씹으며 꺄르륵 웃었던 일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저녁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일이 매일은 아니더라도 자주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외로운 나’에게 어울리는 기억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첫 기억은 혼자 집을 보다 울어버린 것으로 남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내 삶을 외로운 것으로 보려는 마음이 승리자였지만, 그게 이 승리자가 무패 행진만을 거듭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승리자와 다른 패배자들과의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우울의 토사 아래에는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행복의 기억들이 잠자고 있다. 그래서 상담사들은 기억을 탐험하는 광부가 되어 내담자들과 함께 그 보석들을 캐내는 모험에 나서곤 한다. 그걸 이해할 때 나는 비로소 외로움에 가려진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글쓰기가 있었다. 나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를 찾지 못해 대신 펜과 종이를 앞에 두고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는 내 삶에 두 가지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하나는 글쓰기를 통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내가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받는 악필 편지를 연재하기 시작한 데에는 외로움의 몫이 컸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외로움이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을 읽는 당신을 만나게 해 준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생각을 객관화하는 작업이라고 나는 믿는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텔레파시를 할 수 없어서, 우리의 생각에 언어라는 옷을 입혀야만 타인에게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글쓰기는 나의 생각을 남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글은 치열한 자아성찰을 필요로 한다.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읽기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글을 쓰며 어둠의 시야를 이따금 벗어던질 수 있었다. 내 삶이 내 생각만큼 외로움과 우울만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님을, 눈을 들면 나의 세상에도 반짝이는 아름다움이 충분하다는 것을 글쓰기는 알려 주었다.




'나의 어둠을 소개합니다'는 뉴스레터를 통해 연재했던 에세이 원고를 다듬은 글입니다. 퇴고본이기 때문에 뉴스레터 연재 당시와는 다소 내용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매주 수/일요일 업로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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