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첫걸음을 뗀 병아리지만 상담심리사로서, 심리검사를 다루고 해석하고 실무에 사용하는 입장으로서 저는 심리검사의 사용과 적용에 한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가 깊어지고 경험이 많아져도 아마 이 생각은 바뀌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대학원과 현장에서 만난 수많은 선배 상담사들도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것이거든요.
"심리검사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규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과, 누군가를 규정하는 일은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특히 MBTI를 위시한 유형화 검사는 더욱 그럴 겁니다. 예컨데 가장 최근에 한 MBTI 검사에서 저는 ENFP가 나왔습니다. 10여년 전 처음으로 검사를 받을 때는 INFJ가 나왔고, 1년 정도 후에는 INFP가 나왔지요. 그러나 그게 제가 소위 '통찰력 있는 선지자'로서 살다가, 어느 순간 잔 다르크 같은 '중재자'로 변신했으며, 요즘 와서는 재기발랄한 '스파크'로 줏대없이 얼굴을 바꿔가며 살아갔다는 걸 말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저 자신이었습니다. 자기 존재를 진정으로 규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알파벳 4개는 아닐 겁니다. 오은영 박사라면 내담자를 자신있게 규명할 수 있을까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데카르트라면 자신있게 답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닐 것 같습니다. 설령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저 스스로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 뿐입니다. '저는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이 말이 제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평생 펜을 놓지 않으리라는 진리의 선포가 아닙니다. 다만 지금의 제게 글쓰기가 중요하다는 마음의 표현이자, 평생 펜을 쥐며 살아가고 싶다는 꿈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20년 가까운 시간을 글을 쓰고 나서야 내비칠 수 있었던, 스스로에 대한 자그마한 소망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펜을 놓는 일이 있을 수 있음을 압니다. 지금의 저로서는 상상조차 끔찍한 미래지만,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 다시 펜을 집는 일이 두려운 날이 올 수도 있겠지요. 상담자로서도 내담자의 비난이나, 혹은 자살을 겪고 상담이란 길을 영영 포기하는 미래가 저를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미래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요, 그런데 말이에요, 뜻밖에도 제게 그 불안한 미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때에는 그 때의 제가 있겠지요. INFJ였던 시절의 낮별에게는 INFJ였던 낮별이 있었고, 지금 ENFP인 낮별에게는 지금의 낮별이 있듯이요. 상상조차 두려운 그 미래에는 그 미래의 낮별이 걺어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행복과 소망이 있을 겁니다.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지요. 작가로서 대성하고, 상담사로서 수많은 생명을 살린 낮별도 절망에 빠져 자살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저는 지금 여기의 제 존재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저라는 존재가 어떤 옷을 입더라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존재의 옷에서 잠시 눈을 떼고 존재 그 자체와 눈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소망하는지보다, 소망한다는 행위 자체가 의미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칼 로저스가 말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고요한 기쁨'이 이런 것이겠지요.
우리는 변화무쌍하기에 우리의 존재를 규명하는 것은 다난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죽는 그 순간까지, 때로는 그 이후까지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한 스스로를 잃지 않습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매 순간마다 갈아입는 옷에 여러 꼬리표를 붙일 수는 있을 겁니다. INFJ니, ENFP니 하는 것들이지요. 그게 의미없지는 않습니다. 그 삶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언어로 설명할 수 있지요. 그럼으로써 우리는 소통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그건 아름다운 일이지요.
그런 우리의, 저의 존재에 가할 수 있는 폭력이 있습니다. 오로지 ENFP라는 이름만으로 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브런치 작가, 문학치료사, 상담심리사, 치성이네 둘째 아들, 이기주의자나 기회주의자... 옷은 갈아입지 못하게 되는 순간 감옥이 됩니다.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저는 정장만을 빼입고 만나야 하는 관계에서 진정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끔은 잠옷 바지에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편의점 앞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낄낄댈 수 있는 친구가 저를 훨씬 잘 이해할 겁니다. 그런 친구라면 제 옷이 아니라 저라는 존재 자체를, 그리고 존재와 존재로서 만나는 시간을 사랑하겠지요.
MBTI같은 유형론만으로 한 인간을 규정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이 될 수도,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지요. 관계에서 ENFP로 규정당한 사람이 그 옷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아니면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다면(잠옷 바지에 늘어난 티셔츠!)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흠씬 두들겨 맞고 그 옷을 다시 주섬주섬 주워 입어야 하겠지요. 아니면 '환불'을 당하던가요. 상대에게 중요한 건 그 사람이 ENFP라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참 부지런하게 서로를 규정하고 서로를 감옥에 가둡니다. 상대가 내가 기대한 그 모습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는 싸우고 때리고 상처받고 손절합니다. 심지어는 그 옷이 제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옷일 때도 있지요. 어젯밤에 제가 그 '환불'을 당했습니다. 상담사, 작가, ENFP로 규정당했고, 그 후에는 위선자로 다시 규정당하고 손절당했습니다. 저는 제가 규탄받아야 할 만큼 비도덕적이거나 비상식적인 언행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상대가 제멋대로 '상담자라면 당연히 이러겠지'라고 기대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지금 저는 간밤에 끓어넘쳤던 분노를 주섬주섬 주워 문장으로 삼고 있습니다. 분노라는 것이 늘 그렇듯 이 분노가 사그라들면 슬픔이 찾아오겠지요. 우리는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하고요. 이해하고 사랑하기에도 바쁜 것이 삶이거늘, 왜 우리는 상대를 가두고 규정하지 못해 안달일까요. 왜 우리는 존재와 존재로서 만날 수 없는 걸까요.
조심스럽게 넘겨짚건데, 아마 세상이 너무 위험천만해졌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예상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저는 웹툰을 보다가 이따금 '학교폭력 피해자에게 트리거가 될 수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같은 문구를 보면 쓴 웃음을 짓습니다. 뒤에 이어질 내용을 스포일러 당한 기분이거든요. 정말 위험한 작품도 심심찮게 있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그리 심각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문구는 허구의 이야기마저도 누군가는 심각한 위협으로 느낀다는 것을 넌지시 말해줍니다. 이야기 속 미지를 탐험하는 것보다 안전하게 규정된 길을 따라가는 것이 필요한 분들도 있다는 것이겠지요.
허구의 이야기마저도 위협으로 느끼는 분들이 있는데, 현실의 우리가 마주하는 인간관계는 오죽 위험할까요. ENFP로, 상담사로 저를 규정하고 그에 걸맞는 행동만을 기대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껴지겠지요. 그 '걸맞는 행동'의 기준이 철저히 자의적이어서, 정작 ENFP이자 상담사인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더라도 말이지요. 관계에서 마음을 크게 다친 적이 있다면 누구나 더 안전한 관계를 갈구하게 될 겁니다. 하다못해 저도 성범죄자 꼬리표를 달고 있는 사람을 만날 일이라면 어떻게든 피하려 애쓸테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분들이 자신마저도 어떤 존재로 규정하고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리라는 것도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카렌 호나이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도 우울증을 비롯한 신경증의 가장 큰 원인으로 융통성 없는 자아상을 지목합니다. 새장 밖에서 상처받은 새가 새장을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 새가 설령 몇 만 리의 창공을 자유롭게 누빌 힘이 있더라도, 치유받지 못한 경험은 스스로의 자유를 빼앗고 맙니다.
누군가 이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 친구에게 제가 그 용기를 줄 일은 없겠지만, 누군가는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러진 네 날개는 다 나았단다. 너는 그 어떤 위험과도 싸워 이길 힘이 있어. 이제, 함께 미지의 땅으로 날아보지 않을래? 하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