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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훈 Jan 17. 2023

대화의 시작

스물여섯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2

리즈에서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런던이 아닌 리즈에서 어학연수를 시작했다는 게 저는 사실 조금 의아했습니다. 리즈는 런던보다 다소 폐쇄적이어서 인종차별도 좀 걱정되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런던만큼 잘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금방 지루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영어가 잘 늘지 않고, 친구 사귀는 것도 어렵다는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한국에서만 살 다가 어떻게 영국에 갔다고 금방 영어를 잘할 수 있겠어요? 또 영어도 많이 대화를 나눠봐야 늘 텐데, 친구를 사귀어야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있을 테니 이것도 잘 안되고 저것도 잘 안되고, 막막할 것 같습니다. 


저도 제가 살고 있는 런던에 친구가 많지는 않습니다. 함께 일하면 수십 명의 직장 동료들이 있고, 보통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저를 따로 집에 초대한다든가 혹은 사무실 바깥에서 따로 만난다든가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직장과 개인의 삶이 잘 분리가 되어 있다는 것은 좋은 점이 더 많겠지만, 저같이 타지에서 온 사람은 회사 바깥에서의 삶이 다소 고독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대화의 시작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대화의 시작 없이는 관계의 시작도 없는 법이니까요. 대화의 시작은 예상해 볼 수 있지만, 대화의 끝은 어디로 갈지, 또 대화 상대와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영국에 오기 전, 싱가포르에 있을 때인 2019년에 저는 아시아 태평양 (APAC) 지부의 아기용품 (Baby & Child Care) 브랜드의 디자인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저희 팀은 아시아에 있는 크고 작은 많은 나라들의 로컬 마케팅팀과 함께 일을 했는 데, 어떤 나라들과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또 어떤 나라들은 저희 팀과 함께 일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팀은 저희 팀이 중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하면서 이것저것 간섭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희 팀이 보기에, 중국 제품의 패키지 디자인은 여러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가격대가 높은 제품들과 가격대가 낮은 제품들이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소비자들이 제품을 선택할 때 헷갈리고, 또한 소비자들이 가격대가 높은 제품을 왜 사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기 어렵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몇 가지 디자인 시안을 만들어서 중국팀에 공유해보기도 했는데, 중국 팀은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중국 팀과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마침 상하이에 있는 인쇄소에 감리를 가야 할 일이 생겨서 중국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중국 지사의 마케팅 디렉터와 미팅을 잡아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케팅 디렉터는 저와 별로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겨우겨우 30분짜리 미팅을 잡았습니다. 역시나 중국 마케팅 디렉터는 미팅을 하는 내내 제가 하는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미팅이 끝나갈 때 즈음, 중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만들었던 프레젠테이션을 보여줬습니다. 현재 중국 패키지 디자인이 가지고 있는 5가지 문제점과 그 문제점을 중국팀과 함께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프레젠테이션은 중국 마케팅 디렉터의 관심을 끌었고, 30분만 주어졌던 미팅은 2시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저희 계획은 한 달 후에 상하이에 있는 로컬 디자인 에이전시와 시카고에 있는 글로벌 디자인 에이전시를 초대해 일주일 동안 중국 팀과 글로벌 팀이 저와 함께 워크샵을 열어서 짧은 시간에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는데, 2시간의 긴 대화 속에 한 번 해보자는 답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안이 받아들여졌지만,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항상 저를 잘 도와줬고, 이번에도 당연히 적극적으로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던 글로벌 디자인 디렉터는 기존에 했던 디자인 워크샵들이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가리키면서, 워크샵은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다며 부정적인 피드백을 주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워크샵을 계획하고 또 진행하려면 저 또한 디자인 에이전시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제가 주로 함께 일해왔고, 가장 믿었던 싱가포르에 있는 에이전시 파트너는 상해와 시카고에 있는 다른 에이전시와 함께 워크샵을 한다는 걸 부담스러워 했고, 워크샵을 통해서 좋은 디자인 결과물이 나오기는 어렵다며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대화의 시작이 필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글로벌 디자인 디렉터에게는 이번 워크샵 만큼은 로컬 팀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결국 몇 번의 대화 끝에 참여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또한 워크샵 준비를 함께 해줄 새로운 디자인 에이전시 후보들을 만난 끝에 새로운 워크샵을 도와줄 새로운 에이전시를 참여시키고, 그 에이전시의 상하이 팀과 실무미팅을 통해서 구체적인 워크샵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디자인 스프린트라고 이름 지었던 이 디자인 워크샵은 2019년 9월 2일부터 6일까지 나흘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이 나흘 동안, 저희는 단순히 아름다운 디자인을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비자의 다양한 니즈를 반영한 제품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데 먼저 집중하였습니다. 특히 첫날은 글로벌 디자인 디렉터와 로컬 마케팅 디렉터가 워크샵에 참여한 모든 인원들이 저희 브랜드와 중국 마켓의 특징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정보를 주었고, 이 정보들을 토대로 저희 모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제품 포트폴리오를 구성하였습니다. 둘째 날에는 합의된 제품 포트폴리오를 바탕으로 대략적인 디자인 스케치를 하고, 셋째 날에는 둘째 날이 끝날 때 선택된 스케치 시안들을 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디테일을 담아 디자인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넷째 날에는 어떤 안들을 소비자 조사에 포함시킬지를 비롯해 실무적인 계획을 세웠고, 당연히 나흘 동안 수고했던 모든 디자이너와 마케터 분 들과 감사의 인사를 나눴습니다. 이 워크샵에서 시작된 패키지 디자인 리뉴얼은 대성공을 거두어서 중국 시장에서 3등 브랜드였던 저희 브랜드는 1년 만에 1등 브랜드가 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당연히 저희 팀과 중국 팀의 신뢰도 깊어졌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아직도 이런 작은 대화의 시작이 생각지도 못한 큰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것이고, 새로운 대화가 시작될 텐데 그 대화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게 될까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리즈라는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대화를 나눌 지,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그리고 그 경험은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항상 건강하기를 빌며, 또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중국 하기스 패키지 디자인 2019 vs. 2020
중국 마케터로부터 받은 감사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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