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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훈 Feb 12. 2023

협업으로서의 디자인

스물여섯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4

바르셀로나에 여행을 다녀왔다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바르셀로나의 이국적인 풍경이 당신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지 궁금합니다. 런던에 와 있는 대학 친구가 젊은 아티스트들과 함께 전시를 하는 것도 도와주고 왔다구요. 저는 살면서 전시회에 참가해 본 건 대학교 졸업작품전시회 밖에 없지만, 생각보다 고민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었던 기억이 납니다. 바르셀로나의 젊고 열정적인 아티스트들은 전시를 어떻게 준비하던가요? 바르셀로나라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좋은 추억을 갖고 돌아왔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2주 동안 참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지난번에 잠깐 이야기했지만 다양한 나라에 있는 100 명 정도 되는 저희 팀이 런던 근교에 있는 윈저라는 곳에 모여 2박 3일 동안 워크샵을 했었거든요. 저도 브랜드라는 주제로 1시간 정도 발표를 해야 했는데, 처음 5분 정도는 무척 긴장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발표를 듣는 동료들이 호응을 잘해줘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고 유익했다는 피드백도 많이 받아서 기뻤습니다. 발표를 해야 했던 것 외에도, 사실 이 워크샵 기간 동안 저희 디자인팀과 포장팀이 함께 모여서 함께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 또한 많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포장팀은 공장에서 저희 제품 패키지가 규격에 잘 맞게 나올 수 있도록 패키지 도면을 설계하고, 공장 생산라인에서 제품이 패키지에 잘 담기는지, 또 제품이 소비자에게 전달이 될 때까지 패키지로 인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패키지의 재질 및 구조 등을 관리하는 팀입니다. 최근에 저희 제품 패키지가 도면, 인쇄, 규격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았는데, 이 문제들은 디자인팀 혹은 포장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어떤 문제들은 책임소재가 명확하지 않다 보니, 논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비난만 하다가 대화가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두 팀 모두 최근 문제들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또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을 많이 내서 무척 생산적인 미팅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디자인이라는 업무는 여러 사람들과의 협업을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협업의 퀄리티가 디자인 결과물의 퀄리티를 결정할 때도 있습니다. 


11월 11일은 우리나라에서는 빼빼로 데이지만, 동남아 국가들에서는 가장 큰 할인 행사가 열리는 날입니다. 거의 모든 쇼핑몰들과 브랜드들이 앞다퉈 할인을 하는데, 그날 하루의 매출만도 엄청나다고 하네요. 제가 싱가포르에 있던 2019년도에, 싱가포르의 가장 큰 인터넷 쇼핑몰은 “라자다 (Lazada)”였는데, 그 해에는 특별히 라자다가 11월 11일 할인 행사를 위해 여러 카테고리의 브랜드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마케팅 아이디어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아이디어가 선택이 된 브랜드는 라자다 쇼핑몰의 메인 페이지에 무료로 광고도 실을 수 있는 등 큰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저희 브랜드가 선택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했지만, 공모작을 제출하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2주밖에 없었습니다. 


저희의 아이디어는 싱가포르 지사의 브랜드 매니저로부터 나왔습니다. 주어진 2주 동안 뭔가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기보다는, 그 브랜드 매니저가 몇 년 전에 보았던 한국 지사의 플레이박스 (Playbox)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한국 지사에서 나왔던 아이디어는 하기스 기저귀 제품의 박스를 아이들의 소꿉놀이 장난감으로 쓸 수 있도록 오븐이나 냉장고 같은 형태로 만든 것이었는데, 먼저 한국 팀에 기존 디자인 아이디어의 사용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다음에는 냉장고에 달린 문을 열면 냉장고 안에 음식이 보인다던가, 컬러를 더 추가해 조금 더 발랄한 느낌을 부여하는 등 기존 디자인을 조금 더 발전시켰습니다. 라자다는 이 스페셜 패키지 아이디어를 무척 좋아해서 기저귀 카테고리에서는 하기스가 11.11 할인 행사의 파트너로 선정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디자인 컨셉 단계의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하는 일이었는데, 마찬가지로 실제 생산까지 4주라는 짧은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먼저 이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박스 생산 업체를 찾고, 그다음에는 말레이시아 공장의 포장팀, 태국에 있는 저희 회사의 패키지 테크놀로지 전문가, 그리고 한국의 “푸른 이미지”라는 저희 디자인 에이전시 파트너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프로타이핑 (prototyping) 미팅을 통해 디자인을 발전시켰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노력해서 결국 4주 만에 생산에 착수했고, 11월이 되기 전 납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아이디어는 무척 성공적이었습니다. 전년도 라자다 쇼핑몰의 11.11 할인 행사 때와 달라진 건 이 박스 패키지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전년도 대비 저희 제품은 170 퍼센트 더 많은 매출을 올렸습니다. 또한, 아시아 이커머스 어워드 (Asia Ecommerce Award)의 소비자 제품 카테고리에서 베스트 캠페인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기뻤던 건 저희 소비자들의 아이들이 이 박스를 장난감으로 가지고 노는 수백 장의 사진과 영상을 소셜미디어에서 볼 수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소꿉놀이 박스 디자인의 성공에 힘입어 두 번째 시리즈로서 축구 및 농구 골대로 변형이 가능한 박스 디자인을 출시했을 때에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급격히 퍼지고 있던 시점이라,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바깥에 데리고 나가지 못하고 집 안에서 아이들을 즐겁게 해줘야 하는 부담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소비자들이 하기스 플레이박스가 이런 부모님들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디자인을 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은 순전히 디자이너, 마케터, 패키지 전문가 & 엔지니어, 박스 생산업체, 또 기존에 아이디어를 냈던 한국팀까지 많은 사람들의 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 협업의 과정이 정말 즐거웠습니다. 


앞서 졸업작품 전시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지만, 저는 졸업반 당시 협업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실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4학년 복학생이었던 저는 저보다 1-2살 어렸던 후배들의 얘기를 잘 듣지 않았던 것 같고, 어떤 때는 저의 생각에 갇혀 너무 독선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좋은 디자인을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서, 디자인 작업을 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기보다는 저 혼자서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졌던 것 같습니다. 결과도 당연히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유럽에 있는 디자인 스쿨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들었는데, 그럼 영어공부도 해야하지만 디자인 포트폴리오도 준비 하겠지요? 준비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또 작업 중인 디자인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기도 하면서, 쉽지는 않겠지만 협업으로서의 디자인을 경험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틀림없이 디자인 작업물의 결과도 더 좋아질 거고, 그리고 무엇보다 영국생활이 더 의미 있고, 덜 외로워질 거라고 믿습니다. 언제나처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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