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유모의 신분과 역할, 관련 역사 이야기까지
아기에게 젖을 주는 것, 즉 수유는 지극히 힘든 일이다. 그 때문에 옛 사회에서는 동양 서양 할 것 없이 신분이 높은 사람은 산모 대신 아이에게 젖을 먹일 존재를 구했으며, 이를 유모라고 불렀다. 유모는 乳(젖 유)와 母(어머니 모)를 결합한 말로 젖어머니라는 말과 동일하다. 食(먹일 식)을 써서 먹여주는 어머니라는 뜻의 식모로 불리기도 했다.
한대(漢代) 만들어진 《예기(禮記)》의 <내칙(內則)>에는 유모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온다.
(제후의 아내가 자식을 낳은 뒤에는) 사의 아내와 대부의 첩을 유모로 삼아 자식을 먹여야한다.
卜士之妻、大夫之妾,使食子。
대부의 자식은 식모를 두지만 사의 아내는 천하기 때문에 스스로 그 자식을 기른다.
大夫之子有食母,士之妻自養其子。(鄭玄謂 : 賤, 不敢使人也。)
이를 통해 선진 시대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만이 유모를 쓰는 쓸 수 있으며, 유모의 신분도 정해두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유모를 고용한 것은 고대엔 의학 수준이 낮아 산모의 사망률이 높고, 또한 산모가 병들어 젖을 먹일 수 없는 일이 잦아서인 것으로 보인다. 또 자식을 먹여주며 대신 기르는 존재이니 교양이 어느 정도 보장된 신분 수준까지 따진 것이다.
시대가 흘러 제후·대부·사의 신분 구분이 없어진 뒤에는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되는 집안이면 유모를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귀족 집안 대부분은 유모를 두었다. 하층민은 유모를 고용하려고 해도 돈이 없어서 서로 돌아가며 아이에게 젖을 먹이거나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전래동화인 <심청전>에도 이러한 풍속이 나온다. 심청이는 어머니가 일찍 죽은 뒤 동네 여인들의 동냥젖을 먹고 자랐다.
<마지막 황졔>라는 영화로 유명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는 유모 왕연수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생각했다. 왕연수는 빈농으로 임신 중 남편이 불행하게도 사망해 버렸다. 막 태어난 젖먹이 딸과 늙은 시부모를 봉양할 방법이 없어 애타던 중 왕부의 유모 공고를 보았다. 왕부는 금전적인 보상금을 약속하되 궁에 있는 동안은 친딸과 연락을 끊을 것을 요구했다. 가족을 굶어죽이지 않기 위해 왕연수는 왕부에 들어가 푸이의 유모가 되었다. 9년 뒤 궁을 나온 다음에서야 자신이 궁에 들어가고 이년 뒤에 딸이 이미 사망했으며, 왕부가 유모의 유즙의 질이 떨어질까 봐 그 소식을 알리지 못하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기본적으로 모유란 아이를 낳아야만 나오는 것이며, 사실상 적혈구만 빠졌을 뿐 혈액과 같은 성분의 흰 피이다. 수유를 하는 여성은 막 출산을 한 뒤 신체가 약해진 상태에서 자신의 피를 아이에게 나누어준다는 부담을 또한 짊어지는 것이다. 거기에 출산을 했다고 해서 모유의 유즙이 무한히 나오는 것도 아니다. 유모를 고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기가 질 좋은 유즙을 먹기를 원하기 사람들이기 때문에 유모의 친자식이 젖을 먹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영아돌연사가 흔하던 시대이니 낳은 아이가 죽었다면 모를까, 친자식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식은 죽을 먹고 남의 자식에겐 젖을 먹인다라. 육체적 부담과 심리적 고통까지 모두 감당하며 유모를 하려는 여성은 당연히 신분이 높을 리가 없었다. 유모는 보통 신분이 낮고 한미한 집안의 여성으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유모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나라의 예법을 다룬 《한궁구의(漢宮舊儀)》에서는 “유모는 관비에서 취한다(乳母取官婢)”라고 나온다. 조선 시대에도 왕실의 유모는 천민 출신이었다.
낮은 신분 때문에 유모가 고용주에게 살해당해도 고용주에게는 별 제약이 없기도 했다. 남북조 시대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진(晉)의 혜문황후 가남풍의 가족사가 실려 있다. 가남풍의 아버지인 가충에게는 가여민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유모가 여민을 돌보고 있을 때 아버지인 가충이 나타났다. 여민이 아버지를 기뻐하자 가충은 어린 아들이 사랑스러워 유모의 품속에 있는 채로 입을 맞췄는데, 이 모습을 가여민과 가남풍의 생모인 곽씨가 보았다. 곽씨는 남편과 유모가 친밀해 보이는 것이 질투가 나 유모를 죽여버렸다. 여민은 다른 유모의 젖을 거부하고 원래 유모를 찾아 울다가 죽어버렸다.
《진서(晉書)》 가충전(賈充傳)에 의하면 그 후 다시 곽씨는 아들을 낳았으나, 역시 유모와 남편의 사이를 의심해 유모를 살해하고 만다. 이번에도 아들은 유모를 찾다가 죽어서 결국 가충에게는 아들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두 번이나 유모를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곽씨는 처벌을 받지 않고 다시 가남풍을 낳은 뒤 세 번째 유모 서의를 들인다.
앞서 언급된 푸이 황제는 유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제도가 만들어낸 많은 엄마가 있었다. 생모도 마찬가지였다. 함께한 기억이 없다 보니 얼굴을 마주해도 어색했다. 자살로 삶을 마감했을 때도 담담했다. 내게 영원히 잊지 못할 엄마의 정을 베풀어준 사람은 유모 왕연수가 유일하다. 그의 품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푸이의 일화와 가남풍의 남자 형제들이 유모를 그리워하다 죽어버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어린 시절부터 키워준 유모에게 아이는 애착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유모는 단순히 젖만을 먹이고 마는 게 아니라 아이가 젖을 뗀 뒤에는 교육도 담당하며 오래도록 함께 있어 어머니에 버금가는 존재였다. 이 때문에 유모는 유즙의 질 외에도 덕성과 품성도 함께 고려해 뽑았으며, 보호해주는 존재라는 의미의 보모(保母)나 두 번째 어머니라는 뜻의 아모(阿母)로도 불렀다. 이는 황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한 안제는 방계였음에도 등태후가 지목해 13세에 황제가 되었다. 재위기간이 20년이었지만 대부분이 등씨 일가가 천하를 주도하는 이른바 허수아비 황제였다. 재위 15년 차에서야 겨우 등태후가 죽고 권력을 쥘 수 있었으나 이후에는 환관과 자신의 유모 왕성에게 휘말려 나라를 말아먹다 사망했다. 안제는 유모 왕성을 아모라고 여기며 사랑했는데, 국고를 털어 그녀의 집을 크게 수리해 주기도 했으며 야왕군(野王君)으로 그녀를 봉했다. 유모를 얼마나 그가 극진히 사랑했는지 유모의 말에 따라 태자를 폐위시키기도 했다. 곧 유모에 의해 차기 황제가 바뀐 것이다. 그의 사랑은 유모의 가족에게도 옮겨져 유모의 딸 백영이 궁궐을 출입하며 간사한 짓거리를 한다고 사도 양진이 상소했으나 이를 묵살하기도 했다. 왕성의 일화는 조선왕조 연산군이 왕이 된 뒤 자신의 유모를 봉보부인으로 봉작하고 노비 등의 재산을 하사했을 때, 지나치게 과하게 포상했다며 올라온 상소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물론 항상 유모나 그 가족이 황제에게 악영향만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유모는 어린 황자가 살벌한 궁 안에서 무사히 생존해 황제가 될 때까지 보호해주며 때로는 정치적으로도 활약했다. 강희제의 유모 손씨의 아들인 조인은 강희제가 믿고 일을 맡길 만한 든든한 신하가 되기도 했다. 다만 지배자의 유모는 일종의 외척이 되어 정권을 휘두르는 일이 잦아 연산군의 일화처럼 사대부는 유모를 경계했다. 황제의 유모가 정치에 크게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이외에도 후한 순제 때의 송아, 후한 영제 때의 조요, 명 희종 때의 객인월 등이 대표적인 일화로 칭해진다.
역대 중국 왕조에서 특히 북위(北魏)는 유모의 존재가 특히 두드러지는데, 바로 ‘자식이 귀해지면 어머니를 죽인다’는 자귀모사제(子貴母死制)’ 때문이다. 무슨 이런 비인륜적인 말이 있단 말인가? 이는 북위의 시작부터 함께한다.
북위를 개국한 도무제(道武帝) 탁발규는 외척을 염려해 태자 탁발사의 어머니인 유씨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태자 탁발사는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받아 가출해버렸지만, 아버지 탁발규가 이복동생 탁발소에게 살해 당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그는 탁발소를 제거한 뒤 북위의 2대 황제인 명원제(明元帝)가 되는데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받았으면서 어처구니없게도 자신 역시도 태자 태무제의 어머니를 죽여버린다. 이때부터 태자의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북위의 문화로 내려온다.
명원제가 10세 때, 그 아들 태무제가 12세 때 어머니가 자귀모사로 사사되었다. 황자의 나이 5~10세 즈음일 때 태자로 책봉되어 대대로 총 9명의 황후와 후궁이 죽었다. 아들이 태자가 되는 것은 곧 그 어머니의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후궁들은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낙태약을 몰래 먹기도 했다. 한 번 태자가 되면 견제 없이 안정적으로 황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애착을 얻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 사람의 이치라는 듯, 황제들은 유모에게 집착하다 못해 태후로 책봉해 높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유모면서 태후가 된 것을 '보모태후'라는 뜻의 보태후라고 하는데 오직 북위에만 있는 지위였다.
북위의 역사에서 보태후는 딱 2명이었는데 하나는 태무제의 유모 혜태후 두씨, 또 하나는 문성제의 유모 소태후 상씨이다. 두씨는 원래 식구의 죄 때문에 노비로 궁에 들어왔다가 태후가 된 것이다. 둘은 후에 추존되어 황태후로 아예 높여졌다. 이렇게 황제가 총애한다면 유모의 가족들에게도 혜택이 없었을까?
탁발규가 의도했던 것과 달리 자귀모사는 외척을 막지 못했다. 북위는 계속 황제의 유모가 큰 권력을 휘두르던 것이 문제가 된 나라이다. 생모가 없더라도 어차피 어린 태자를 키워줄 여성들은 계속 존재했고 그들은 권력을 쥐게 되었다. 특히 5대 황제의 문성제의 황후 풍씨는 총애를 다투던 이귀인의 아들인 탁발홍을 일부러 태자로 책봉되게 만들어 자귀모사에 따라 죽게 만들었었다. 그리고 태후로서 탁발홍의 유모를 자처하며 키워 권력을 누렸다. 탁발홍이 자라 6대 황제 헌문제가 되었을 때 정치적 충돌로 둘의 사이가 벌어졌다. 헌문제는 5살 어린 아이인 효문제에게 황위를 넘겨줘 버리는데 풍태후는 헌문제를 독살한 뒤 다시 효문제의 유모로서 권력을 쥔다. 황제의 외척이 정사를 어지럽힐까 봐 생모를 죽였지만 결국 유모가 활약하기에 애꿎은 생명만 목숨을 잃은 셈이었다.
여담이지만 북위는 점점 나라의 혼란과 함께 후궁들이 임신을 하려들지 않아 황손의 씨가 말라갔고, 결국 8대 왕 선무제는 어렵게 아들을 얻은 뒤 자귀모사제를 폐지시켰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렇게 간신히 살아남은 호태후는 후에 아들 효명제와 정치적으로 충돌한 끝에 아들을 독살해버리고 만다.
자료 출처
漢魏六朝的乳母(李貞德, 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 1999.06.)
유모인 ‘왕엄마’ 쫓겨난 뒤 포악해진 마지막 황제(김명호, 중앙선데이, 2014.08.03.)
https://www.joongang.co.kr/article/15430517#home
保太后 https://www.wikiwand.com/zh-cn/保太后
아들이 태자에 책봉되면, 생모는 죽어야 하는 잔인한 제도
https://m.blog.naver.com/sdcsh/221617267767
子貴母死
https://zh.wikipedia.org/wiki/子貴母死
북위 궁중의 피바람: 아들이 태자가 되면 생모는 죽인다
https://blog.daum.net/shanghaicrab/16152879
子贵母死制
https://baike.baidu.com/item/子贵母死制/2653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