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문장 재해석
<올해 농사가 잘 되지 않은 것은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에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이라는 뉴스를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오늘날 메이저 신문사에서 이런 기사를 내었다면 당장 폐간시키라는 국민청원이 올라올 것이지만, 과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지배자의 덕과 한 해의 농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여겨졌다.
흔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지성(至誠)은 ‘지극한 정성’이고 감천(感天)은 ‘하늘을 감동시킨다’라는 뜻이다. 농사를 지내려면 적절하게 내리는 비가 필수이다. 우리 한반도 위에 존재했던 역대 나라 중 과학 시대와 가장 가까운 조선시대만 해도 국가에서 직접 지내던 기우제를 12단계를 나누어 시행했는데(12제차), 주로 종묘사직과 용 등의 대상들에게 간곡하게 비를 내려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음력 4월~7월 사이에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연례 행사였다. 오늘날은 비가 오지 않으면 그냥 인공강우라는 과학적인 해결책을 통해 해결해 버리지만 고대에는 하늘을 바라보고 비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참고로 중국이 상시로 인공강우를 쏘는 것이 워낙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사용하지 않는 줄 알지만, 우리나라도 태백산맥 등에서 인공강우를 시행하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왕은 통치 기간 중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종종 부딪치며 좌절에 몸부림쳐야만 했는데 그 중의 하나는 개기일식이었다. 세상을 환히 밝히는 해는 왕을 상징하는 존재인데 이 해가 갑자기 사라지다니. 중국 전설상의 왕조 하나라의 건국조인 탕임금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백성들이 폭군 걸왕을 원망하며 “이 해는 언제 망할까? 내가 너랑 함께 망해버리겠다.(湯誓曰 時日 害喪 予及女 偕亡)”고 하는데, 지금 갑자기 푸른 하늘의 해가 없어졌으니 분명 왕의 통치에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조선 왕들은 일식이 일어나면 소복을 입고 일식이 끝나기를 빌며 신하들에게 자신의 죄를 묻고 자아를 성찰하는 시간을 갖곤 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과학기술은 발달하고 있어 어느 정도 일식이 일어나는 시기를 맞출 수 있었다. 다만 왕이 어진 통치를 했다면 예정된 일식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이 당시에 만연했던 게 문제였다, 신하들은 왕을 공격할 수단으로 천재지변의 비극을 쓰곤 했기 때문에 왕에게는 농사 문제만이 아니라 본인의 권위를 위해서도 최대한 하늘의 운행을 읽고 예고할 필요가 있었다. 정조는 즉위 해인 1776년 12월 21일 관상감 제조 박종덕과 권도를 파직해 버릴 뿐만 아니라 다시는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일식과 월식을 5개월 전 보고해야 하는 법이 있는데 깜빡했다고 3개월 전에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왕의 권위 문제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조선 왕들이 일식을 일찍 예측하지 못하는 것을 얼마나 큰 죄로 생각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관상감은 이렇게 일식 등 천문학, 지리학 등을 연구하는 것이 주요 업무인 부서이다. 또한 주요 업무 중 하나가 이렇게 연구한 내용들이 담긴 책력을 만드는 것이다.
책력은 흔히 달력의 옛날 이름이라고 말하지만, 단순히 이렇게만 말하기에는 조금 내용 구성에서 차이가 있다. 오늘날의 달력은 1년간의 날짜와 요일, 주요 기념일 등을 적어놓은 정도지만 책력은 24절기, 해와 달의 운행, 월식과 일식, 별자리, 오행, 일진 등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농사짓기 적절한 시기와 하늘의 움직임 등이 담겨있어 책력은 곧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일반인이 책력을 반포하거나 위조하는 것은 모두 중죄였다.
조선시대가 비교적 최신이기에 콕 찝어 언급했을 뿐이지만 이미 삼국사기 때부터 책력은 존재했다. 이 소재를 활용한 드라마가 ‘선덕여왕’이다. 이 드라마는 화랑세기에 언급된 미실이라는 인물을 재해석해 악녀로서 만들었다. 미실은 신과 소통하는 신녀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인물로 나오는데, 이때 미실이 가진 신성력의 근원은 바로 옛 연인 사다함이 선물한 가야의 책력이었다. 미실은 가장 과학이 발달해 있던 중국의 책력인 대명력을 몰래 입수한 뒤 가야의 책력을 적용해 우리나라에 알맞게 날짜를 변환했다. 이를 통해 신라의 천문학을 담당하는 일관보다 더 정확하게 비가 오는 날짜, 일식 등을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예언하며 권력을 쥔 것이다. 주인공으로 후에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은 대명력에 증광력이라는 새로운 역력의 세차 산법을 결합했다. 이를 통해 미실보다 더 정확한 날짜로 일식을 예언하고 이용함으로서 당당히 맞서싸운다.
이처럼 고대 사회에서 책력은 중요했다. 중국의 왕을 하늘의 아들, 즉 ‘천자’라고 일컫는 것은 주나라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천자가 정말로 하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하늘의 뜻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어야만 했다. 주나라의 천자는 매해 겨울 끝 섣달에 이르면 다음 해 12달의 초하루가 표기된 책력을 제후들에게 반포했다. 책력은 신의 뜻이 담긴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제후들은 이를 신성하게 받들었다. 조상들의 사당에 보관하고 있다가 매달 초하룻날에 한 마리의 양을 제물로 사당에 바치고 난 뒤 다음 초하루까지의 일정을 책력에 따라 시행했다.
참고로 고대에는 동서양 할 것 없이 양을 귀하게 여겨 제물로 많이 사용하였다. 상나라 때 갑골문을 보면 군사의 기동성과 관련된 말은 제외하고 코끼리나 악어까지 대체로 중국에서 구할 수 있는 동물들은 거의 다 제물로 사용되었는데, 이 중 양이 제일 신성하게 여겨졌다. 고기는 물론 먹을 것까지 제공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때문에 한자에서 양(羊)이 들어가는 경우는 祥(상서롭다 상), 善(착하다 선), 美(아름답다 미)처럼 대체로 좋은 뜻으로 사용된다.
책력을 만드는 것은 많은 힘이 드는 일이었다. 주나라는 천자의 권위가 추락한 춘추시대에 접어들면서 더는 책력을 반포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오래되었는데도 공자가 살던 시기, 그 고향인 노나라에서 관리들은 여전히 관습에 따라 양을 제물로 사당에 매달마다 바치고 있었다. 공자의 애제자 자공은 무의미하게 양이 낭비되는 것이 안타까워 이 예법을 완전히 폐지하려고 했다. 공자가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했다.
“너는 그 양을 아까워하느냐? 나는 그 예법을 안타까워하느라.(賜也爾愛其羊我愛其禮)”
논어 제3편 팔일의 17번째 구절이다.
앞서 말한 고대 제도를 초하루(朔 : 삭)에 조상의 묘에 아뢰며(告 : 곡) 희생(餼 : 희) 제물인 양을 바친다고 하여 ‘곡삭의 희양’이라고 한다. 자공은 무일푼에서 장사를 통해 막대한 부자가 되어 공자의 생계를 책임졌던 인물로, 실정과 효율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연히 더는 책력을 사당에 바칠 필요도 없는데 매달 불필요한 양을 사당에 바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이 상황에서 공자가 예법을 이유로 폐지를 반대했다. 실리의 관점에서 보면 공자는 고리타분한 옛날 것에 집착하는 늙은이로 보인다. 그러나 공자는 무조건 옛날 것이 옳다고 하기보다는 시대에 맞는 예법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공자가 곡삭의 희양을 폐지하는 것을 반대한 이유는 경제적 관점보다는 당시 시대상과 맞닿아 있다.
언제나 없애는 건 쉽고 되살리기는 어렵다. 또한 어떠한 예법이나 규칙이 존재하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곡삭의 희양 제도에는 천자의 권위를 존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춘추시대는 제후의 권력이 강해져 각종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던 시대였다. 하극상을 꿈꾸는 움직임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져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다. 공자는 이러한 문제점이 해결되려면 원래의 완전한 질서가 잡힌 사회로 회복해야 한다고, 즉 천자의 권위가 다시 바로잡혀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공자는 천자를 높이 받들며 양을 바치는 제도를 없애버리면 끝내 천자의 권위가 완전히 잊혀져 사회의 혼란이 끝나지 않을 것을 두려워했다. 다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비효율적인 낭비가 있을 지라도 천자를 받드는 예법이 남아 있으면 그런대로 예법의 원형을 간직할 수 있다. 왜 이렇게 양을 바치는 걸까, 어디서부터 이런 예법이 시작한 걸까 누군가가 궁금해서 원래의 뜻을 알아보게 된다면 천자가 다시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뭣이 중한디!”라는 영화의 대사가 있다. 공자는 양을 바치는 문제에 있어 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정신적 관점으로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헤어진 옛 연인, 인연 끊긴 친구의 물건 같은 것들을 추억이라고 간직해야 할까, 아니면 버려야 할까. 곡삭의 희양처럼 그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으면 ‘아 이런 일이 있었지’하고 가끔 추억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그 물건을 없애버리고 나면 가끔 기억하던 일조차도 멈추고 만다. 항상 옛 기억을 끌어안고 살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추억을 잊고 싶지도 않은 인간에게 항상 돌아보게 되는 문장이다. 인생은 채우고 비우는 것의 반복이다. 좋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면서도 내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출처
이성규, <한 하늘에 나타난 두 개의 해>, 사이언스타임즈 2009
조운찬, <책력>, 경향신문 2008
https://www.khan.co.kr/article/200804011814135
한국고전종합DB, <신역조선왕조실록, 신역정조실록, 정조즉위년 병산, 12월 21일>
대전시립박물관, <2018 이달의 문화재_12월> 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