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머무는 자리에서
옛날 옛적, 여우를 사랑한 구름은 여우가 시집가자 너무 슬퍼 울었다.
볕이 나 여우비를 맞은 적 있다. 당신은 여우비에 젖어본 적 있나요
햇볕이 난 날, 잠깐 흩뿌리며 내리는 비를 여우비라 한다. 느닷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상당히 묘연한 자연 현상이. 이 비의 생성 원리는 이름만큼이나 독특하다. 아무리 비구름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강한 바람의 힘만 닿는다면 빗방울은 구름이 끼지 않은 맑은 곳까지 내리게 된다. 수박화채를 한 입에 먹기 좋은 계절에 내리는 것 마저 당도를 높이 끌어당긴다. 매 여름마다, 그런 영문 모를 비에 몸을 적셔봤다. 화채에 녹인 얼음보다 시원하고 달콤했다는 건 빈말이 아니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여우비 설화를 넌지시 꺼내본다. 여우를 빤히 보고 있자, 여우를 사랑한 구름은 애틋해서 장면 하나를 보낼 수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화창한 날씨에 빗방울이 맺힌다. 그 바람에 손길 하나 싣어보냈다면, 여우비는 어느덧 봄비가 된다.
봄비를 맞던 날, 시선에 의한 시선을 마주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빛이 머무는 자리에서
빛에 꽤나 관심을 가지고 지내왔다. 다시금 여름을 떠올려 본다. 여름 하면 두 가지 그림이 생각난다. 청량한 바람과 평온한 바다. 서로 다른 상징이지만 두 가지 색채 모두 로맨틱한 분위기를 선사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섬세한 빛은 사진 같은 유화를 탄생시킨다. 이목을 집중시킨다.
대표적으로 지난 7월 첫 한국 전시로 인기를 모은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전시가 있다. 코로나 19로 휴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휴식을 제공하는 좋은 관람 전이었다.
"제가 빛에 특히 관심을 갖는 이유는, 구도에 음영을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빛을 통해 작품에 적합한 구도를 잡을 수 있게 되죠. 또한 빛은 일상적인 이미지를 끌어올려, 특별하지 않은 소재도 특별해 보이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 앨리스 달튼 브라운, 빛이 머무는 자리
어떤 구도에서든 그림을 조각할 수 있다는 건 어린 눈에 매력적이었다. 빛은 달빛도 될 수 있는 법이다. 달빛이 들어오는 날에 여우별가 반짝인다. 궂은날 구름 사이로 잠깐 얼굴을 비췄다 사라져 버리는 것인데, 달빛이 너무나 좋아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여우의 진담이다.
"달빛이 너무나 좋아서 그냥 갈 수가 없네요.
당신 곁에 잠시 누워 있을게요. 잠시만 아주 잠시만"
- 노래 '여우비'
달빛에 광합성하며 몸집을 키우느라 바빴다. 여우별이 홀연히 사라지던 날, 그림자 뒤 사무쳐 배워가느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무턱 댄 말로 시원했다. 사랑했음에도 계절은 혼자만이 무덥지 않았고, 지나온 시간은 내면에 신뢰를 선사했다.
빛을 사랑함으로써 유독 향을 탁월하게 맡게 된다. 어느새 계절 감각이 뛰어난 편이 되었다. 여우비가 주로 내리는 계절, 여름이 아니었더라도 봄비가 내리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다. 달빛이 너무나 좋아 그냥 갈 수가 없었던 기억에, 감추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면 잠시 스며들어본다. 감사한 기쁨으로
"유화 물감을 아주 얇게 펴 바릅니다. 모든 영역에 겹겹이 층을 쌓아 색을 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면 표면에 물리적인 깊이감이 생깁니다. 작품의 주제가 더욱 강조되고 빛이 나게 되죠. 또한 저는 세부사항을 정밀하게 묘사하고자 합니다. 그림의 모든 부분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 앨리스 달튼 브라운, 빛이 머무는 자리
봄비는 흔치 않다. 지나치는 길에 시선을 곱게 붓는다는 것은, 하나하나 층을 쌓는다는 것은 정성이 필요하여 지나갈 법한 일이지만, 노래 여우비에서처럼 '난 당신이 자꾸만 밟혀서 그냥 갈 수도 없네요."
오직 탁월한 향 앞에서만 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파스텔화를 마주하면 하늘에서 봄비가 내린다. 봄비를 섬섬하게 그은 붓이 궁금하여 살며시 끝을 들어 올려 본다. 촉에는 기름으로 갠 유화 물감이 묻어 있다. 그곳에는 여우를 사랑한 구름의 이야기가 배어 있을 테다. 선적 표현을 유려히 하는 유화 물감은 어떤 장면이든 선명히 그린다 하여
살포시 입자가 고운 파스텔을 덮는다. 색채가 아름다워. 그럼에도 색이 잘 변하지 않는 것은, 빚어내는 효과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까닭은, 붓은 또다시 빛이 머무는 자리에서 파스텔화를 그려가
볕이 나 여우비를 맞은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돌아보면 혼자만이 만들어 낸 세상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여우비는 있을 것이다. 인생의 먼 길을 걷다 보면, 우연히 아낌없는 시간을 안겨주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시간은 있는 그대로 만나는 동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그 자리 앞에 오기까지의 농축을 정의하는 바로 결국, 진심이 다다른 사랑이다. 그 사람은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어떠한 관계에서든 성립된다. 주는 사랑은 이어져 빛나는 선을 발견케 하고
여우비가 흩날리고 간 달빛이 머무는 자리에서 시선에 의한 시선을 마주한다. 그래서 지금 만일 내가 B를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더라면 그것은 사실 A가 주었던 사랑이 곁에 남아있는 덕택이다.
여우비와 파스텔화. 당신과 머무르는 이야기는 모두 빛이 머무는 자리에서
이 글을 세상의 여우비와 파스텔화에게 바친다. 사랑이 더 큰 신뢰를 낳는 어딘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