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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자 Apr 09. 2024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괴물>

틀에서 벗어나 ‘나’와 타인을 수용하기


‼️ 스포있음 ‼️

​​​​​


영화를 보자마자 바로 썼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무슨 말부터 적어야할지 모르겠다. 기록해두고 싶은 말들이 휘발되기 전에 지금이라도 적어야겠다는 생각이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최근에 이런 의문이 들었는데, 여기서부터 시작해보고 싶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내가 했던 경험,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바탕으로 타인을 해석하고 판단하여 수용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내가 구성한 판단은 타인에 대한 온전한 이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괴물’에는 이러한 현상이 만연하다.

첫 번째 시점에서 사오리(미나토의 엄마)는 호리 선생님이 자신의 아들을 학대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 판단은 사오리가 주변으로부터 호리 선생님이 걸스바에 다닌다는 소문을 들음으로써 강화된다. 사오리의 시선에서 교장 선생님 역시 답답하게 비춰진다. 학교 전체가 사오리의 문제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 듯하다.

나는 사오리가 보내는 타인을 향한 많은 판단들 중 미나토를 향하는 시선에 주목하고 싶다. 처음 영화를 볼 때, 사오리의 시점에서 미나토는 문제아처럼 보였다. 무슨 문제를 겪고 있는 게 틀림 없는데 말도 하지 않고, 기이한 행동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나토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그 장면들을 다시 보니 미나토는 그저 평범한 어린 아이로 보였다. 결국 미나토에게 문제가 있다라는 판단은 그저 사오리의 주관, 그리고 사오리를 따라가는 관객의 주관에 불과했던 것이다.

또한 사오리가 엄마로서 미나토를 걱정하는 것은 미나토를 위하는 행위이기는 하지만, 미나토를 이해하려는 행위는 아니었다. 오히려 마지막에 아이들의 입장이 드러나며, 평범하게 결혼하면 된다는 사오리의 말을 비롯한 세상의 시선은 미나토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압박하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두 번째 시점은 호리 선생님의 입장이다. 호리는 걸스바에 다닌다는 소문에 휩싸여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 또한 타인을 자신의 입장에서 평가한다. 특히 호리의 시점에서 구성된 정보에 의하면 미나토는 요리에게 학교 폭력을 저지르는 문제아다. 이 판단에 의해, 학급 친구의 ‘미나토가 죽은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미나토가 고양이를 죽였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 시점에서 관객들은 결국 누구도 문제아는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모두 다른 입장에 놓여 있다. 타인에게 내리는 괴물이라는 판단은 그저 ‘나’의 입장에서 구성된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이는 역으로 ‘나’ 또한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괴물로 비춰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괴물>은 타인에 대한 내 판단이 항상 진실과 동일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시사점이 타인과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극단적 주장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앞서 제시했던,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하여, 나는 <괴물>에서 이러한 답을 읽는다.

결국 호리 선생님이 미나토에게 잘못이 없다고 말해주었듯, 타인을 언제나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 나와는 다른 타인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행위 자체에 가치가 있다. 타인에 대한 내 판단이 항상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한다면, 타인을 향해 좀 더 관대한 시선을 갖고 존중할 수 있다.

부끄럽게도 나 또한 그런 관대한 시선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만 해도 나는 등장인물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나의 입장에서 그들의 행위를 평가했다. 미나토와 요리의 거짓말을 비난하고, 교장 선생님의 행동을 재단하고, 호리 선생님의 행동을 답답하게 바라보고, 사오리의 대처에 의문을 가졌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영화를 잘 납득할 수 없었던 것 같다. ​

(여전히 <괴물>의 등장인물들이 흠결 없는 완벽한 인간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현실의 인간상과 더욱 맞닿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괴물>은 전형적인 선인이 아닌 어찌 보면 다소 납득할 수 없는 완전하지 않은 등장인물을 내세움으로써,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자신의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판단해버렸던 실수를 관객들도 똑같이 저지르게 한다. 관객은 관람 이후 능동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영화의 시점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 각각의 입장을 깨닫고, 마침내 그들을 수용하고자 노력하면서 영화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영화가 시사하는 것처럼 관대한 시선을 가지고 등장인물을 나와는 다른 타인으로 수용하고자 노력할 때, 마침내 <괴물>이 전하고자 하는 가치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타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의 입장에서 타인을 판단하여 진실로 믿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기 보다는,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세심한 시선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그 행위에 가치가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나토와 요리는 비로소 타인이 보내는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해 달리는 것 같다. ‘다시 태어난 걸까?’라는 요리의 의문을 미나토가 부정하기도 한다.

우리는 때때로 나를 판단하는 타인의 시선을 읽고, 이를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에 가둬버리곤 한다. 그 시선이 1명의 개인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온 것이라면 더욱 강력하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나의 본질부터 변화시켜야만, 즉 다시 태어나는 행위를 통해서만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미나토의 부정을 통해 <괴물>을 보는 관객들은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타인과 사회로부터 만들어진 기준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진정한 자유를 향해 달릴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지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이 타인을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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