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 flower blooms

in its own time

by 유안

나이듦을 두려워했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노인들을 만나면 존경심보단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사회와 소외 사이의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사람들. 지하철 환승통로에서 느릿한 걸음의 그들을 앞질러 가자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갑갑했다. 그들이 열정도, 적응력도, 건강도 잃어버린 것 같아 안쓰러웠다. 그래서일까. 난 노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그런 시선으로 볼테니까. 피부도 쪼글쪼글해질테고, 감기 한 번 걸리면 그게 치명적일테고, 몸이 느려져 바쁘게 살지도 못할테고, 난 원래 바쁘게 사는 걸 좋아하는데 눈이 침침해지고 기억도 잘 안나서 뭘 배우지도 못하고 일도 못하면 삶에 무슨 재미가 있나 싶었다.


그래서 난 노인들의 적극성 회복은 어떻게 가능할까 관심이 많았다. 노년층이 떠안은 문제를 해결하는 세계노년학회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라는 책을 접했는데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됐다. 키케로는 말한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한데, 이런 자질들은 제철이 되어야만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라네." 고전학자 고미숙은 덧붙인다. "키케로의 정리에 따르면, 노년은 결코 하위개념이 아니다. 청춘이 아무리 아름답고 힘차다 한들 거기에서 원숙함은 불가능하다. 원숙함이란 능력이나 재능 따위가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흘러간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나니 내 생각이 대단히 틀렸음을 알았다. 난 노인들은 열정도, 젊음도 없으니 뭔가 결여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열정과 젊음을 되찾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생각이었다. 노인들은 뭔가에 열띠게 참여하는데서 즐거움을 찾기보단 세상을 관조하며 여유를 즐기는 단계였다. 그들은 열정과 젊음은 없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원숙함과 지혜를 가졌던 것이다.


비슷한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얼마 전 엄마는 내게 "저녁 시간을 보낼 소일거리가 뭐 없을까" 물었다. 나는 엄마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쓸 것을 권했다. 엄마는 조심히 "내가 책 읽고 글쓰기엔 눈도 침침하고 좀 그렇지 않을까" 했지만, 나는 "엄마, 배움에 나이가 어딨어" 했다. 새로운걸 익히지 않으면 그 삶은 얼마나 따분할까 하는, 엄마에 대한 걱정의 표현이었다. 며칠 뒤, 서울에 올라온 나는 우연찮게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풀이해주는 교수님의 강연을 접했는데, 내용이 너무 좋아서 꼭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 강연을 카톡으로 보냈는데 엄마는 읽고는 답이 없었다. 잘 들었겠거니 하고 말았다. 다음날, 엄마랑 전화하는데 엄마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깔깔 웃으며 어제 내가 보내준 '짜라투스트라..' 얘길 했다. 그 때 동료 선생님들과 같이 있었는데 선생님들이 "효정이가 아직 엄마를 청춘으로 아네" "젊은 딸 수준 맞추려면 힘들겠어" 이러면서 한참을 웃었다는 거다. 순간 좀 머쓱해졌다. 나야 아직 어리니까 치열하게 고민할 때고, 또 이런 공부가 필요해서 하는거지만, 쉰 한 살의 엄마한테 니체가 무슨 소용이람. 내가 너무 내 위주로 사람들을 보고 있었구나 반성했다. 엄마는 니체는 몰라도, 내가 엄청 어려워하는 인간관계에서의 고민이나 집안일에 대한 요령, 선배나 상사에겐 어떻게 하면 좋은지는 나보다 훨씬 잘 알았다. 그게 지혜이고 원숙함이었다. 내 주제에 엄마가 새로운걸 익히지 않는다고 걱정하다니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되었던 거다.


키케로를 읽고나니 나이듦과 노인을 향한 내 걱정에 다소나마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스물여섯에 켜켜이 쌓인 지혜를 바랐던 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도 돌아봤다. 우리들은 모두 그저 자신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아직 세월의 세례를 받지 못한 내가 원숙함을 바라는 것도, 활약기를 지나온 노인에게 꾸준히 활약을 바라는 것도 어찌 보면 나의 무리한 요구였는지도 모르겠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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