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후,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둘이 지내다 보니 나의 대화 욕구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출산 전에도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고 떠들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편이었는데, 따지고 보면 이 육아라는 것도 지금의 나에겐 업무와 마찬가지인 면이 있어 힘든 일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공감과 위로를 받고 싶어진다. 하지만 육아휴직을 하다 보니 거의 매일 집에만 있어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가 않다. 남편의 배려로 가끔 친구들을 만나더라도 그건 한 달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이벤트일 뿐, 주로 만나는 사람은 남편, 그리고 아기도 볼 겸, 육아에 지친 남편과 나를 도와줄 겸 방문하는 친정식구들과 시댁식구들로 한정된다. 그러니 평소엔 남편에게, 친정부모님이나 시부모님이 방문하실 땐 그분들께 육아에 관한 이런저런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낙이 되었다.
직장생활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받고 싶을 땐 나와 같은 힘듦을 겪고 있는 비슷한 상황의 직장동료에게 힘든 일들을 털어놓으면 제일 기분이 후련해지듯이 나는 나를 키우며, 남편을 키우며 애썼을 부모님들의 고통에 그 어느 때보다 깊이 공감하며, 그분들은 나의 힘듦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겠지 싶어 대화욕구가 더 샘솟았다. 그래서 나는 늘 그래왔듯, 그리고 육아만 하느라 억눌린 대화욕구가 폭발하듯, 그분들께 열심히 매일의 육아 무용담을 펼쳐놓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부모님이든, 친정부모님이든 대화를 하고 나면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가끔은 영 개운치 않은 느낌을 넘어서서 화가 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화가 난다니. 힘든 일을 토로하고 나면 그 일이 해결된 것도 아닌데도 속이 후련해지곤 하는 내가 요즘은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찝찝한 기분이 반복되던 어느 날, 나는 엄마와 시어머니의 말에서 내 말문을 턱 막히게 하고 때로는 나를 화나게 하는 공통점을 찾아냈다.
그건 바로,
"애 키우는 건 다 그런 거야"
"엄마는 당연히 힘든 거야"
"나 때는 더했어"
라는 말들이 시시때때로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힘들었던 일을 하소연하는 사람에게 '그건 당연히 힘든 거야'라고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보통 그런 사람들을 보고 공감능력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힘든 직장생활 이야기, 힘든 친구관계 이야기, 힘든 학업에 대한 이야기 등을 할 때 설사 마음속엔 '그건 당연히 힘든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말을 쉽게 하지는 않는다. 내가 겪고 느꼈던 일들과 그 사람이 겪고 느꼈던 일들은 다르므로, 그리고 그렇게 힘듦을 토로함으로써 공감받고 위로받길 원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위로해주고 싶으므로.
하지만 왜 엄마들은 육아에 대해서는 그렇게 쉽게 말을 할까.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의 수많은 힘든 일들은 내가 그동안 살아가면서 무수히 겪었던 힘듦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나는 매일 놀랍도록 고통스러운데, 그래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음을, 내가 이런 괴로움을 겪고 있음을 토로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큰데 돌아오는 말들은 결국 '엄마는 다 그런 거지' , '엄마는 당연히 힘든 거지'였다. 그건 나도 안다. 엄마는, 부모님 당연히 힘들다. 그건 직장생활도, 학업도, 다양한 인간관계들도 다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심지어 내가 느끼기엔 육아만큼 힘들지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힘들다고 인정해 주고 위로해주지 않는가. 그런데 왜 육아는 힘들다고 하면 '너희 때도 다 그랬어, 애들 키우면 다 그렇게 힘든 거야' 하는 걸까. 우리의 엄마들은 왜 그런 공감능력을 상실해 버린 걸까.
처음엔 그게 화가 났다. 왜 같은 고통을 느꼈으면서, 그래서 지금의 나의 고통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공감해주지 않지? 내가 지금 힘든 얘기를 하는데 왜 본인들 때는 더 힘들었으니 넌 힘든 게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지? 나는 비록 그 시절 엄마들만큼 힘들지 않은 상황이더라도 어쨌든 지금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왜 위로의 한마디를 시원하게 해주지 않지? 육아가 유독 고된 날이면 나는 그 말들을 곱씹으며 나도 이렇게나 힘들다고, 그런데 왜 아무도 몰라주느냐고 외치고 싶어 가슴이 더 답답해지고 무력해지곤 했다.
그러다 우연히 나의 어릴 적 비디오 영상을 디지털화하여 정리하다가 영상 속에 나온 젊은 시절 엄마를 보았다. 지금의 나와 닮은 것 같아 영상 속 엄마의 나이를 가늠해 보니 정말 지금의 나와 나이가 거의 같았다. 엄마는 앳된 얼굴에 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엄마를 보는 게 아니라 나를 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4살의 나와 6살의 오빠를 키우고 있던 35살의 엄마.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두 아이를 출산하고 모진 시집살이를 겪었던 엄마. 세탁기도 청소기도 제대로 없던 시절, 천기저귀를 비롯한 많은 빨랫감들을 손을 빨아가며, 세끼 밥을 차리고 집안을 쓸고 걸레질하며 우리를 안고 업고 먹이고 씻기고 재웠을 엄마. 집안일은 오로지 아내의 몫이고 여자는 출가외인이라 생각하여 그 모든 것들은 혼자 묵묵히, 당연히, 열심히 했을 엄마. 그게 나였다면. 나는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그분들이 하는 그 말들은 그 시절에 공감받지 못하고 쌓아뒀던 울분의 또 다른 모습이었음을 슬프게 깨닫는다.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 정도로 그보다 더 힘든 갖은 시집살이를 함께 겪어가며 공감은커녕 모진 말들을 당연히 감내하며 아이를 키우고 사는 것이 당연했던, 남편은 더 남의 편이라 그에게 작은 공감조차 바랄 수 없었던 우리의 수많은 엄마들. 하루에도 수천번씩 힘들다는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이건 당연한 거다, 엄마니까 여자니까 당연한 거다, 생각했을 우리의 엄마들. 어쩌면 그렇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만 그 납득할 수 없이 쏟아지던 고난들을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시절의 고통에 대해 스스로에게조차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감을 해본 적이 없어 그 고통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법을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러니 '엄마는 당연히 힘든 거야, 나 때는...'을 반복하는 우리의 엄마들에게 필요한 건 진심 어린 공감이 아닐까. 나의 힘든 육아를 공감받기에 앞서, 이제야 늦었지만 나라도 그분들께 먼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너무 애쓰셨다고, 어떻게 그렇게 힘든 일을 해내셨느냐고, 그렇게 괴로운 와중에도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잘 키워낼 수 있었던 것이냐고 말이다.
엄마, 너무 고생 많았어.
나라면 그렇게 해내지 못했을 것 같아.
그렇게 힘들 때 다 놓아버리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버텨 우리를 사랑으로 키워줘서 너무 고마워.
엄마를 존경해.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