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한 이후 줄곧 내 머릿속을 떠다니던 질문.
“아이를 낳아야 할까?”
결혼까지 생각하던 친구 커플은 아이를 가질지 말지에 대한 의견 차이로 헤어지기까지 하던데, 우리 부부는 아이에 대한 고민은 미뤄둔 채 결혼을 했다. 어찌 보면 부부의 삶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고민거리를 손쉽게 미뤄놓고 그렇게 속 편히 결혼이라는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건 우리 둘 다 아이 낳기에 대한 생각은 아직 미정이라는 것 자체가 서로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고민을 거듭해도 나는 그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문득문득 허공을 바라보며 아이에 대한 고민에 치열하게 몰두했다가도, 어쩌면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면 어쩌나 싶어 이 고민 자체가 무의미해 보였다. 특별한 건강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의외로 불임인 경우가 많은 요즘, 그다지 건강 체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내 몸이 아이를 쉽게 가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 둘 다 산전검사나 받아보고 그다음에 이런 고민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당장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난 지금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는데? 그래, 그럼 일단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 고민은 그렇게 늘 결론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맥없이 툭 끊겨버리곤 했다.
그렇게 안일한 나날을 보내다 해가 바뀌고 내 나이를 자각하던 어떤 날, 언제까지나 이 문제를 미뤄둘 수만은 없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지금은 이런 마음인데 나중에 갑자기 아이를 갖고 싶으면 어쩌나. 그때는 나이가 너무 들어 진짜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으면 어쩌나. 그 후회가 너무 깊고 괴로우면 어쩌나. 우리 부부는 지금의 삶이 너무 안정되고 동시에 이런저런 취미생활을 함께하며 매일 새롭게 즐겁지만, 이렇게 둘이서만 언제까지나 즐거울 수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감정이 무뎌져 그동안 신나고 재밌었던 많은 것들이 조금씩 시들해지고 무덤덤해지는 것을 지금도 조금씩 느끼는데 앞으로는 더 그러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낳아 나의 이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당장 뒤흔들어 놓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기 위해 그동안 그렇게 애쓰고 애써 열심히 쌓고 다듬어왔던 나의 커리어, 나의 삶을 갑자기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아이 때문에 나를 내려놓는 삶 속에서 나의 행복은 뒷전이 될 것 같았다. 그건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갈수록 심해지는 지구 환경오염과 불안정한 국제정세,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로 인한 부작용이 인류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상황 속에서 그런 미래 세상 속으로 나의 아이를 탄생시키는 게 나의 아이에게도 불행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다는 나의 욕심만으로 생존을 위한 이 고단한 삶을 아이에게 물려주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지….
고민은 시도 때도 없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답 없는 고민 앞에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이 모든 것을 하늘에 맡겨버리고 싶었다. ‘생기면 낳고 안 생기면 굳이 노력하지 말고 그냥 둘이 재밌게 살면 되지, 뭐.’라고 대충 운명에 맡겨버리는 식으로 생각을 마무리 짓고 일단 신혼 1년은 그냥 보내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미봉책일 뿐이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신체의 기한은 정해져 있기에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결정은 또다시 몇 개월 뒤로 미뤄졌다.
그즈음 사실 나는 아이에 대한 고민 말고도 더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새로 이직한 직장에서 근무한 지 4년 정도 됐을 무렵이었다. 직장생활이 늘 그렇듯 약간의 불만족스러운 면은 있었으나 직장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즈음의 나는 이 직업을 평생 하는 게 맞나 싶은 생각으로 괴로웠다. 이전 직장에 비해 워라밸이 확실히 보장돼 몸이 편했음에도, 늘어난 여유시간만큼 고민이 깊어졌다. 반복되는 일은 무료하게 느껴졌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다지 달라질 것 없는 업무 성과와 굳이 성과를 낼 필요도 없는 업무 특성이 나를 공허하게 했다. 나를 불태워가며 일하다 내 삶을 잃어 괴로웠던 이전 직장에서는 그토록 워라밸을 간절히 외쳤었는데, 막상 워라밸을 찾으니 나를 불태워 몰입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진 이 모순. 이도 싫고 저도 싫으면 도대체 어떻게 살고 싶다는 건지…. 이래나 저래나 불만이 많은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어쨌든 다시 새로운 직장을 찾든 새로운 취미생활을 찾든 새로운 무언갈 찾아 내 인생을 새롭게 손봐야겠다는 최우선의 인생과제가 눈앞에 놓여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신을 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의 모든 고민들은 일시중단 되었다. 뱃속의 아이는 무법자처럼 나의 고민거리들을 마구잡이로 옆으로 밀어버리고 내 삶의 가운데 자리에 벌러덩 대자로 누워버렸다.
초음파로 처음 아기집을 확인하던 날, 나는 마치 아이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불쑥 눈물이 났다. 내 삶에 갑자기 침입한 이 무법자가 어쩌면 미울 법도 한데, 나는 이상하게 감동으로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이 낳기에 대해 그렇게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 그 자체가 실은 아이를 낳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낳게 되면 나에게 닥쳐올 고통, 희생, 책임감 등이 두려워 차마 용기 있게 아이를 낳겠다고 내 입으로 단언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거기에 더해 아기를 낳기로 결정을 했지만 혹시나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어서 어쩔 수 없이 아이 낳기를 포기해야 된다면 그 이후에 내가 받을 상처가 두려웠던 것 같다고.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운명처럼 아이가 찾아오길 내심 기다렸던 것 같다고.
그렇게 ‘아이를 가져야 되나 말아야 되나’에 대한 고민은 아이가 생김으로써 갑자기 해결이 되어버렸지만, 나의 진로 대한 고민은 해결되지 못한 채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덩그러니 놓여있게 되었다. 대학원 진학, 이직 등을 고려해 보던 나의 향후 1~2년에 대한 계획은 일순간 무산되었고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대한 계획으로 채워졌다. 하루아침에 인생이 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뱃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커나가는 아이를 보며 신비롭고 설레는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불안감이 저 깊은 곳에서 꿈틀대고 있음을 모른 척하기 어려웠다. 앞으로 아이를 키우며 다시 나의 진로에 대한 고민과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을까? 하더라도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할 수 있을까? 그냥 이렇게 내 삶은 아이를 키우는 게 전부인 삶이 되어버리는 걸까? 이렇게 살아도 내가 행복할까?
사실 나는 아이로 인해 내가 지금 열정을 쏟고 있는 소중한 것을 바로 내려놓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의 내 일을 그다지 사랑하지도 않고,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행복할지, 내가 사랑하는 일은 무엇 일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 열심히 고민 중이었지만 떠올리는 것마다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소소한 새로운 시도를 해보아도 열정이 솟지 않았다. 이걸 열심히 해서 뭐 하지? 나는 남들한테 인정받고 성공하는 일을 하고 싶은 걸까? 그런데 결국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무엇을 해도 그런 식의 헛헛한 뒷맛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인생의 목표를 잃어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가 뱃속에서 하루하루 커갈수록 그 헛헛한 마음이, 무언가로도 채워지지 않던 그 마음의 빈 공간이 채워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아도 채워지지 않던 마음이 대체 무엇으로 채워진 것인지 나는 내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를 채운 그것은 아이를 잘 키워내고 싶다는 마음,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동안 나는 내 진로, 내 꿈에 대해서 내 안에서 정답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내 안에는 안개가 내려앉은 듯 희뿌예져 자꾸만 길을 잃었었다. 그런데 아이를 잘 키워야겠다, 아이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부모가 되어야겠다 생각하니, 안개가 걷힌 듯 모든 게 뚜렷해진 것이다. 아이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 위해 나는 조금씩, 지금의 직장에서 최대한 보람을 찾아보려고 전보다 더 애쓰고 싶어 졌고, 내 안에 머물러있던 작은 꿈들을 실현시키기 위해 더 열심히 도전하고 싶어 졌고, 육아에 대해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졌다.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열심히 내 꿈을 찾아서 뭐 하지? 애써서 뭐 하지?’ 싶었던 그 공허함에서 벗어나,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 더 좋은 부모가 되어야지, 내 아이를 잘 키워내야지‘로 바뀐 것이다. 평생을 찾아 헤맨 삶의 의미, 인생의 목표를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찾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이를 잘 키워내는 것을 내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아이에게만 몰두하고 오직 아이를 키우는 것에 내 인생을 바치겠다는 마음이 아니다. 아이에게 내 인생을 희생해 바칠수록 아이의 인생은 나로 인한 부담으로 괴로워지고 나도 아이로 인해 희생당한 내 인생을 보상받고 싶어질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잘 양육하는 것을 넘어서, 아이로 인해 뚜렷해진 내 삶의 목표, 그로 인해 솟아오르는 삶의 의지를 원동력 삼아 더 좋은 부모,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아보려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의 일환으로 이렇게 글을 쓴다. 아이로 인해 내 안에 잠들어있던 글쓰기를 다시 떠올리고 열심히 도전해 볼 용기를 낼 수 있음에 감사한 요즘이다.
뱃속에 아이가 생기고 하루아침에 인생이 달라졌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등 생활하는 모든 것에서부터 앞으로의 인생 계획, 삶에 대한 태도까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렇게 달라졌는데, 태어나고 난 이후에는 얼마나 엄청난 일들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변화가 힘들고 괴롭기도 하지만, 심지어 앞으로 더 힘들고 괴로워질 테지만, 흔들리지 않고, 아니 흔들리더라도 계속 열심히 나아가고 싶다. 그리하여 더 좋은 부모, 더 좋은 인간이 되고 싶다. 괴롭더라도 그렇게 되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고 싶다. 내 인생의 행복은 아마도 그 안에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