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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향기 Aug 06. 2021

불합격을 두려워 말게나

 자격증 시험 합격자 발표날이다.

한국산업인력공단 큐넷 사이트를 열고 있는 커서의 움직임에 심박수에도 긴장이 감돈다.


사실 합격의 확신은 안 섰다. 전력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 양심에 있다.


그런데도 요행을 바라는 건지.. 공부에 매달린 시간만큼은 보상받고 싶다는 미련이 있어 이날을 기다려온 거다.


드디어 합격 결과를 알리는 모니터 화면이 열렸다. 결과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불합격이 떠있었던 것이다. 가슴은 잠깐 철렁거렸지만 본능적으로 다시 안정이 취해진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젠 나이도 들어 시험과 무관하게 살 줄 알았는데 가고자 하는 길엔 어김없이 시험이라는 관문이 도사리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격증 시험 자체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쉰 살 넘은 나이에 시험이라니.. 가당키나 한 일이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우리들만의 리그가 아닌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쉰 살 정도가 아니라 머리 허연 어르신들도 자격증 시험 치르러 시험장에 와 계셨던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시험 감독하러 가서 보게 된 다른 리그의 자격증 시험 장면은 나 역시 선수로 뛰고 싶은 욕망에 불을 지고야 말았.


진작에 못하고 나이 든 선수들 뛰는 모습 보고 반해서 따라 하는 비겁함에 자괴감도 들더라.


여하튼 그렇게 용기 내어 시작한 공부가 불합격 릴레이의 시발점이 될 줄이야.

       

실은 어려서부터 시험에 떨어져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시험 보는 족족 합격했었다. 차려준 일상에서 처절한 쓴맛을 느껴보지 못하고 입맛에 맞게 성장한 거다.


그 시기에 단맛, 짠맛, 신맛, 쓴맛 중에서 쓴맛만 못 봤던 건데 이것은 살아오면서 결코 자랑이 될 수 없었다.


불합격이라는 쓴맛은 성장기의 보약이었지만 그 보약을 못 먹고 자라다 보니 오만이라는 병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 오만함을 고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단맛에 빠져 사는 바람에 치료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은 겸손함의 면역력이 떨어져 세상살이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쓴맛이 보약이었음을 그 당시엔 전혀 알지 못했다. 세상 풍파 겪으며 숱한 세월 지나서야 알게 된 거다. 


나는 알아주는 사람 없는 무명인이라 세상에는 떠들지 못하고 자식들에게만 속삭인다.


"불합격을 두려워 말게나 쓴맛을 보약 삼아 기력을 회복하면 훗날 그것이 최고의 명약이었음을 알게 될 테니..!"       


합격자 발표날이면 브라우저에 싸늘하게 펼쳐지는 불합격 통보가 이골이 날 즈음,


한국산업인력공단 큐넷에서 애타게 보고 싶었던 글자가 기어코 화면에 떴다.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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