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서 오는 자유
타인에게 모욕감을 느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모욕감은 시간이 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끔 자려고 눈을 감고 누워 있으면 그날의 기억이 다시 돌려보는 드라마 장면처럼 선명히 회상될 때가 있다. 무례한 사람을 만난 날의 기억은 어느새 오던 참을 달아나게 하고, 화와 분노감으로 잠을 설치게 하는 날들도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날 중 하루이다.
엄마의 국밥집에서 서빙을 도와준 2020년의 어느 여름날,
건강한 체격의 4명의 남성들이 시퍼런 문신을 한 팔뚝을 테이블에 떡 하기 올리고선 다짜고짜 주문받는 나를 향해 술집 여성 접대부 대하듯 명령한 적이 있다. 거만한 목소리가, 유쾌하다는 듯이 그들이 교환하는 불결한 눈빛이, 다른 손님들의 시선 집중이, 시간이라는 약도 소용없게 그날의 장면은 내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있었다.
그날의 분노감과 모욕감은 벌써 1년이 지났음에도 하필이면 잠들기 바로 직전 가끔씩 회상되곤 한다. 오늘도 과거의 불쾌한 기억은 이내 분노감으로 변해 잠자리를 벌떡 박차고 일어났다.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서재로 향해 급하게 손에 잡히는 책을 꺼내 들었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이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 내려갔다.
...... 그토록 모진 말로 나를 아프게 한 당신을 미워하는 동안 내 마음의 잿빛 하늘엔 평화와 구름 한 점 뜨지 않아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제 당신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심한 욕을 그들의 면상에다 대고 퍼붓는다 해도 이보다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날의 그들이 나를 무례하게 대할 때 이렇게 받아쳐줄걸.
댁 같은 사람들에게 식사 제공 못하니 냉큼 꺼지라고 말해줄걸.
이랬을걸 저랬을걸,
과거의 기억 속에 무엇 무엇해줬을걸 이라는 후회는 불길에 기름이라도 붓듯 나를 더 치욕감과 분노감에 휩싸이게 할 뿐이었다. 다만 용서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상상 속 과거 회상의 시나리오에서는 현실에서 한 것과 일관되게 "무시"로 끝을 맺곤 했었다. 항상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었다. 다만 나 자신은 정작 그날의 기억을 "무시"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용서의 꽃이란 시를 읽으며 "용서"라는 단어에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용서하라.'
나를 상처 준 그리고 나를 분노하게 한 그들을 용서하라는 말은 나를 다시 편안하고 고요한 침대 속으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