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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Feb 07. 2022

샤넬'백'보다 더 든든한 내가 가진 '빽'

소머리 국밥집 둘째 딸

나는 부유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장 시절에는 부모님도 IMF타격을 받으셨고, 그나마 부모님이 모아 둔 돈은 형제들 보증으로 집까지 넘어가 5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월세 살이로 네 식구가 살았다. 


그것이 나의 학창 시절이었다. 


대학에 가서도 나는 다른 친구 동기들처럼 술을 마시거나 대학생활을 만끽하기보다는 장학금을 받아 고생하는 엄마에게 어떻게든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때의 기억이 얼마나 가련한지 지금도 이 글을 적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면 자동적으로 눈물부터 핑 돈다. 


엄마는 시장에서 김을 구어 장사하셨다. 그날은 오후 수업만 있는 날이라 아침부터 장에서 엄마를 도왔다. 엄마가 숯불에 김을 구우면, 나는 포장하고 손님에게 돈을 받는 역할을 했다. 그날따라 장사가 너무 잘 되었지만 마냥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오후 2시 수업을 들어가려면 시장에서는 적어도 1 시간 30분 전에는 나와야 하는데, 자꾸 손님이 밀려오는 것이다. 엄마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속으로 5분 만을 몇 번이나 생각하다, 결국 오후 수업은 4시가 다 돼서야 도착했다. 버스 안에서 학교까지 가는 그 시간이 너무나 길었고 초초했다. 


성적장학금은 과에서 3명까지만 지원이 되었다. 상위 세명 안에 들기 위해서는 모든 과목을 완벽한 학점으로 채워야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하루 지각한 부분이 성적에 영향을 미칠까 걱정되어 그 해는 더 열심히 공부했야 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할까 봐 발생한 두려움과 초조함은 한 학기 그리고 성적 발표까지 내내 지속됐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야 말로 대학생의 신분이었던 내가 시장에서 고생하는 엄마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육체노동을 하는 엄마에게 조금만 하게 심리적 위안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엄마는 머지않아 시장 안에 있는 국밥집을 인수하셨다. 

천만다행으로 엄마의 음식 솜씨로 국밥집은 날이 갈수록 손님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국밥집 생활도 늘어갔다. 




금수저가 아니어도 좋아. 



금수저에 대한 부러운 시선이 사회 곳곳 가득하다. '저 사람 금수저야'라는 말에는 "우와"라는 리액션부터 나온다. 부러움, 갈망, 심지어는 존경의 목소리까지 들린다. 소셜미디어에서 "금수저"란 단어가 들어가면 조회수나 팔로워가 늘어가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번역일을 하나 보니, 자택 근무가 가능하였기에 엄마에게 있어서 나는 자연스럽게 필요할 때면 가게 후보 종업원으로 취급되었다. 축구로 치면 대체 선수 같은 역할이다. 국밥집 대기조 1번이다. 나도 직업을 가졌기에 엄마가 갑자기 펑크 낸 종업원의 부재에 대한 의무를 나에게 요청할 때는 짜증과 화가 올라왔다. 


엄마 가게에서 주말 장마다 어김없이 엄마를 도와준지는 벌써 5년이 넘었고, 학창 시절부터 엄마를 도와준 것을 모두 치자면 10년 이상의 경력이 쌓였다. 

나는 주말에 스케줄을 잡을 때는 항상 장이 서지 않는 날을 자연스럽게 선택하여 살아온 지 오래되었다. 지인들은 이제 주말장이 서는 날에는 알아서 약속시간을 잡지 않는다. 


가게에서 서빙할 때마다 꼭 한 번씩 있는 거친 손님들을 마주칠 때는,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화가 날 때가 많다. 씨앗 같았던 화의 불씨는 어느새 커져가 내 안에 분노로 활활 타오를 때도 있다. 고백하자면 도대체 나는 왜 엄마 딸로 태어난 걸까 라는 생각을 국밥집 경력기간 동안 수 십 번, 수백 번 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10년 동안 찾아 헤매다 최근에 들어서야 답을 찾았다. 


시장에서는 각층의 사회 계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흙이 잔뜩 묻은 작업복과 작업화를 신고 만성 피로에 찌든 얼굴을 한 일용직 작업자들부터 굉장한 부자들도 과거의 향수로 방문하는 곳이 바로 국밥집이다. 


나는 국밥집에서 사람을 배우는 중이다. 험한 말, 불쾌한 표현, 성희롱 인지도 모르고 뱉어내는 무지한 자들의 웃음 섞인 싸구려 멘트들, 꽥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감정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 따뜻한 국밥 한 끼를 보약으로 생각하고 여러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아름다운 미소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 들까지. 


내가 국밥집 딸이 아니었다면 겪을 수 없는 값진 삶의 경험들이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서 나는 성장했고,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다. 

금수저가 아니라서 부모덕에 호화로운 생활을 경험하진 않았지만, 나는 엄마를 통해서 값진 삶의 교훈을 배웠다. 


배운 게 있다고 해서 방자하고 교만하게 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국밥집에서 서빙을 할 때마다 모든 한 사람을 동등하고 소중한 국밥집 손님이란 자세로 바라보며 사회적 계급과는 상관 없이 항상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장국밥집에서 일한 굵은 잔뼈로 나는 실패가 두렵지 않다. 인생의 역경에 처하더라도 식당에서 설거지를 해서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굳은 자신감이 있다. 식당 설거지부터, 서빙과 손님 응대까지 나는 뭐든 잘 해낼 수 있다. 10년 경력 자니까. 


그래서 나는 금수저들이 그들의 부모에게서 받는 방대한 "부" 보다, 나의 엄마에게 받은 보이지 않는 부의 가치를 더 소중히 생각한다. 나는 이 보이지 않는 부의 가치가 앞으로 나를 어떠한 가시밭길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게 만드는 든든한 "빽"이 돼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그 어떤 금수저들도 갖지 못할 내가 받은 값진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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