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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Mar 17. 2022

Le Deuxième 에 머물렀던 시선에 가해진 고발

『제2의 성』서평


1949년 출간되어 지금까지도 여성론 분야의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열여덟에 처음으로 접했으나, 제대로 끝까지 읽어본 것은 작년이 처음이다. 이미 수 년 간 여러 페미니즘 서적과 대학에서의 수업, 다양한 지인과의 담론을 통해 여성해방에 대한 가치관이 과거에 비해 훨씬 뚜렷하게 쌓아져 있던 상태에서, 이 책 속에서 논의되는 개념들은 전혀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다른 고전들을 예로 들자면, 실상 몇 백 페이지가 넘는 구체적인 논리적 서술로 뒤르켐이 '자살론'에서 결국 전하고 싶었던 말은 '자살은 절대 개인의 현상이 아닌 사회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현상' 이라는 것으로 간단하게 정리되며, '인간의 조건', '혁명론' 등의 정치철학 고전에서 아렌트가 난해하지만 동시에 정교하게 풀어내는 이야기 또한 '공론 영역을 건설해서 정치의 본질을 회복하자, 그리고 민주주의는 공화국의 건설로 실현될 수 있다' 등 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따라서 보부아르의 '제2의성' 도 마찬가지로 당시 이 책이 고전이라 불리지 못했을 때에 새로운 담론이었던 것이지,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해당 개념 자체가 충격적인 진실들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19세기 참정권 운동부터 시작된 페미니즘사의 두 번째 분기점 정도로 불리는 여성의 해방 논의가 촉발된 것이 보부아르의 문제 제기부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1990년대 이후의 페미니즘이 세 번째 분기를 맞으며 이전의 운동을 계승하면서도 실패를 다시 되돌아볼 때 당연히 이전의 개념을 수용했을 것이기에 보부아르의 논의가 현시대의 누군가를 곤혹스럽게 한다면 본인만 혹시 중세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당시 관습의 전횡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새로운 관념을 도출하는 것도 사상가들이 집필하는 저작들의 역할이 되겠지만, 그 논의가 흐름 중간에 멈춰있지 않고 후대에 고전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를 가지는 것 또한 중요한 직무가 될 것이라 본다. 고전은 온전히 그 개념이 장착되었을 때에도 새롭게 해석될 여지를 남겨둠과 동시에 주제를 단순하게 명료한 문장의 정돈으로 끝내지 않으며 한 문장을 구체적인 사례와 논리적 증명이 수도 없이 반복되는 방식으로 풀어내기 때문에 시간의 경과와 관계없이 규칙적인 숨을 쉬며 살아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마도 이 책이 매번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는 건 바로 여러가지 이론적 배경과 관련하여 기존의 얼토당토 않은 관행(물론 지금에야 내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 아마 본인도 1800년대 사람이었다면 그 어떠한 의심 없이 가부장제에 종속되어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현재의 관점에서 얼토당토않다는 표현을 쓴다.)을 샌드백처럼 두드리는 보부아르의 감탄스러운 논리 반박 구조는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의 구체적인 경험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지점이 이전보다 눈에 띈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여성의 역사고, 여성론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수만 가지 갈래로 다양한 상황에 처한 여성의 상세한 경험을 담론으로 구성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각 챕터마다 때로는 인터뷰 형식으로, 때로는 당시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재구성하는 형식으로 여성의 삶을 풀어낸 이 책이 오히려 그저 '여성해방을 논한 고전' 정도로 담백하게 불리는 것이 꺼림칙해질 정도다. 맞는 말이긴 한데, 좀 더 위대하고 장엄하며 고결하게 표현하고 싶다.


Le Deuxième Sexe, 두 번째 성. 프랑스어에서 성을 뜻하는 명사 자체도 남성이라, 여성에 관한 장대한 논의를 풀어놓은 책의 제목조차 온전히 여성형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에도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 어쩐지 발끈하는 기분이 든다. '인간', '성' '인류' 등 성 구분이 없는 낱말 자체가 죄다 남성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유럽어 구조 때문에 프랑스어를 처음 배웠던 열일곱부터도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으나, 이 논의에 관해서만도 따로 여러 편의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한 문단으로 짤막하게 넘어가보도록 한다. 프랑스에서 이것저것 고민을 하면서 나름대로 희망적인 결론을 내려본 것 중 하나는, 유럽어의 성별 구분 때문에 사실 서구권 페미니즘 논의의 발전 중 일정 부분이 저해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언어를 고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일들이 많은 것에 비하여, 우리나라 언어 체계를 자세히 살펴볼 때 생각보다 언어 자체에서 부여되는 성별 간극은 생물과 무생물의 비교보다 크지 않다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어의 경우 여성형과 남성형이 구분되어 있는 직업군과 관련한 단어들로 인해 여러모로 굉장한 사회적 편견이 부여되는 현상이 꽤나 뚜렷했고, 해당 언어가 쓰이기 시작한 9세기 정도 이래로부터 그것이 뿌리깊게 박혀 있으니 이걸 고쳐보자는 논의가 생겨났다. 또한 아직도 프랑스에서 미혼 여성은 Mademoiselle. Horang. 이라 신용카드에 크게 이름이 박히고, 이는 집 문서나 보험 계약 등 온갖 공식 서류 상 등록 이름에서도 마찬가지라, 이렇듯 여성에게만 사용했던 호칭을 없애고 모두를 Madame 이라 부르자는 움직임이 몇 년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개별 단어를 넘어 문법 자체에 부여된 필요 이상의 성 구분 때문에 수많은 언어학자들은 아직까지도 유럽어 성 구분을 쳐다보려는 시도조차 힘겨워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견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적어도 한국어에는 '간호사', '군인', '주부', '기사' 라는 단어 그 자체에 '여성' 혹은 '남성' 이라는 언어학적 기호가 포함된 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언어 자체에서 오는 간극이 적다보니 오히려 더 사회성을 부여하는 것 같기도 하는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는 희망적인 신호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퀴어 문제가 언급될 때 요즘 한창 해외에서는 he/she/they 의 호칭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petit copain, petite copine 라며 본인에게 연애상대가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의 지칭성별을 언급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도 있고, 심지어 프랑스어의 경우 영어보다 더해서 이것을 본인이 글로 작성할 경우에 본인(화자)의 지칭 성별에 대해서도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이슈에 관해 서구권에서는 엄청난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한국어는 '나', '애인' 이라 지칭하면 그만인, 애초에 주어 지칭 경향성이 강하지 않은 언어인데다가 성별 지칭에 대한 대체어도 상당히 많아서, 언어체계가 시민의 관념, 무의식, 교육, 문화, 사회현상 전반에 미치는 비대한 영향을 생각해봤을 때 우리의 페미니즘이 유럽이 몇 백 년 간 진행시켜온 속도에 비해 빠르게 진행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프랑스 체류 시절 간혹 하곤 했었다. 물론 2018년 말부터 2022년 대선의 행태에 이르기까지 약 3-4년 뼛속 깊이 체감했던 대한민국의 여성 담론은 실로 절망스러운 길로 빠지고 있어, 이러한 상상이 점점 터무니없어지는 것 또한 현실이다.


평소에 워낙 여성에 관한 담론을 지인들과 많이 진행하기도 하고, 이제는 그런 논의가 진행되지 않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숨쉬듯 함께 토론하는 주제라 엄청나게 신선하지는 않았다고 앞서 말했지만, 이런 기분이 한정된 주변만이 아닌, 모두에게 전해질  있는 그날까지 열심히 토론하고 공유해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  얘기야? 그거  아는 이야기잖아.' 라는 우리의 이야기가, 광범위한 대중에게도 공유되어 어떤 방송, 언론이든 미디어, 시중의  어떤 텍스트에서도 당연하게 여겨질  있는 그날이  거라 굳게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지겹고 식상한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우리 모두가 이제 여성해방이 이미 진정으로 지나간 과거의 산물이라 느낄  있는(500...)  날이   있을 때까지, 현재 바꿀  있는 것들을 바꿔가면서 말이다. 더이상 '멀쩡하신 분인  알았는데 혹시 페미병 이세요?' (실제로 육성으로 뱉는 사람   있음)   단어부터 마지막 단어까지 다양한 소수자를 혐오하는 지극히 무례하고 멍청한 질문이 없어지는 날까지 말이다. 언제나 독특하게 구별되는 사회적 위치에서 2020년에도, 아마 2050년에도 ' 번째 '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나,  정체성을 인식하고 주체성을 회복할  있을 담론 형성을 끝없이  나가야 하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체성'  대해 읽었던 논문   구절인 '의식 고양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경험의 공통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 의식을 공유하고 성장시키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억압을 반드시 종식시킬 정치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Combahee River Collective 1982, 14-15)  인용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구절을 통해 얻을  있는 감각은 억압을 종식시키기 위해 선행되어야  정체성의 인식이어야  것이라고 본다. 애초에 본인이 욕망하는 것들, 행하는 것들, 경험하고 있는 것들의 근원이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는 상태의 발원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본인의 정체성으로 발현시킬  있는 지성을 갖춘 상태에서 그것이 공유되는 스펙트럼이 점점 넓어지며 페미니즘사의 시간들이 조금씩 흘러가리라 생각한다. 물론 모두에 여성으로의 정체성을 극대화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고 그렇게 해서는   일이며, 그러자는 것도 아니다. 주변의 오랜 친구들만 해도 -이렇게 짧고 함부로 언급할  없는 무거운 주제이지만 장애 정체성, 퀴어 정체성, 종교 정체성 등을 상상할  없는 온갖 편견과 박해와 싸우며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게다가 여성 정체성을 가졌다고 발화하는 사람만이 페미니즘의 '허락' 받는 일도 절대 아니고 말이다. 다만, 여성가족부 폐지를 대선 10 공약에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여성혐오범죄라는 단어는 여성들의 피해망상에서 탄생했을 뿐이며  차별은 더이상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차원이라는  지껄이는 사람이 국가의 원수가  상황에 더이상 연대를 미루면  되겠다는 결심에서 잠시 언급해본 것이다. 레베카 솔닛의 어제자 인터뷰로 서평을 맺겠다.

“It must be terrible for women and for feminists in South Korea right now but one thing that always consoles me is to look at the long-term picture - not how feminism has done in the last five years, but what about the last 50 years.” (Rebecca Solnit, 202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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