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희나의 선택
나비와 희나가 숲을 나오자, 고양이 나라에 어둠이 찾아왔다.
새까만 커튼 같은 밤이 온 나라에 내려앉았고, 하늘 곳곳에 크리스마스 전등 같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나비와 희나는 손을 꼭 잡고 어두운 길을 걸었다.
둘이 함께 걷던 노란 벽돌 길도, 어두워지니 이젠 더는 노랗게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밤이 더 늦기 전에 잘만한 곳을 찾아야 할텐데.
걱정하면서 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 편에 초록 두건을 쓴 고양이가 어린이 고양이와 함께 걸어오는 게 보였다.
다급해진 나비와 희나는 그 고양이들을 붙잡고 물었다.
-실례합니다. 뭣 좀 물어볼게요.
“혹시 이 근처에 하룻밤 묵어갈 만한 곳이 있을까요?”
초록 두건 고양이는 나비와 희나의 질문에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잘 곳이 없으신가요? 이를 어쩌나. 마음 같아선 저희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오늘 집에 언니 가족이 와서 그럴 수가 없네요.
초록 두건 고양이가 미안해하는데, 갑자기 어린이 고양이가 초록 두건 고양이의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엄마. 고양이 신님의 신전에 가라고 해. 그러면 분명 착한 고양이 신님이 재워주실 거야.
-그래. 그렇겠구나. 고양이 신님이 분명 재워주실 거야.
초록 두건 고양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를 손짓했다.
-저기. 저 갈림길로 쭉 가시면 고양이 신님의 신전이 나와요. 온통 하얗고 커다란 돌로 지은 곳이니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곳에서 재워달라고 하면 틀림없이 재워주실 거예요. 그리고 사정을 말하면 고양이 신님이 집도 주실 거랍니다. 아주 따뜻하고 다정한 분이시니까요.
그 말을 들은 나비와 희나는 두 고양이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아니요. 별 말씀을요.
두 고양이도 나비와 희나에게 마주 인사했다.
그렇게 서로 조심해서 가라며 인사한 다음 두 고양이와 헤어졌다.
나비와 희나는 초록 두건 고양이가 손짓한 길로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래 걷지 않아 신전이 나왔다.
초록 두건 고양이의 말대로 온통 하얀 돌로 지은 커다란 건물이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신전은 어두운 거리에서 홀로 은은하고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저기가 신전인가 봐. 얼른 들어가 보자.”
나비와 희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나비와 희나가 신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올려놨을 때였다.
갑자기 신전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그건 노란 줄무늬에 짧은 꼬리를 가진 고양이였다.
-짧은 꼬리!
짧은 꼬리 고양이를 본 나비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나비야! 너 여기까지 왔구나.
나비를 본 짧은 꼬리 고양이도 깜짝 놀랐다. 나비는 짧은 꼬리를 붙잡고 물었다.
-짧은 꼬리. 넌 왜 여기에 있어? 지금껏 어디에 있던 거야?
-네 일을 고양이 신님께 말씀드렸지. 고양이 신님을 뵈려던 고양이들이 너무 많아서 기다리다가 지금에야 말씀드리고 나오는 길이야. 물론 고양이 신님은 네 일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말이야.
도대체 두 고양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희나는 나비와 짧은 꼬리 고양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비야. 무슨 말 하는 거야? 너 이 고양이랑 아는 사이야?”
-응. 얘는 짧은 꼬린데. 얘가 너와 나를 여기에 데려왔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너만 데려왔지. 인간 여자애를 데려온 건 너잖아!
나비의 대답에 짧은 꼬리가 성질을 냈다.
짧은 꼬리는 제 자리에서 펄쩍 펄쩍 뛰며 화를 내다가, 어느 순간 지쳤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아무튼, 얼른 들어가 봐. 고양이 신님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어.
짧은 꼬리의 말에 나비와 희나는 신전의 입구를 바라봤다.
저 안에서 고양이 신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어쩐지 긴장됐다.
희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다음, 다시 한 번 짧은 꼬리에게 물어봤다.
“정말 고양이신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겠니?
희나의 질문에 짧은 꼬리가 다시 한 번 버럭 성질을 냈다.
그러더니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어디론가 바쁘게 가기 시작했다. 나비가 짧은 꼬리에게 물었다.
-짧은 꼬리야. 어디 가는 거야?
-집에 간다! 하루 종일 신전에서 차례를 기다렸더니 온몸이 욱씬욱씬 쑤셔 온다고!
짧은 꼬리는 씩씩거리며 대답한 뒤, 이젠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먼 곳까지 뛰어가 버렸다.
나비와 희나는 짧은 꼬리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다가, 결국 다시 고개를 돌려 신전의 문을 쳐다보았다.
무섭고 긴장된다고 여기 계속 서 있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비와 희나는 이제 결심을 해야 했다.
나비와 희나는 잠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곧 손을 꼭 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가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나비와 희나는 천천히 신전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의 문 안은 아주 조용했다. 나비와 희나는 길고 조용한 복도를 하염없이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커다란 방 앞에 도착했다.
열린 문 안을 들여다보니, 그 방엔 커다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 고양이는 너무 커서 앉아 있었음에도 커다란 방의 반을 채울 정도의 크기였다.
일어서면 그 방이 가득 찰 게 분명했다.
고양이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나비와 희나의 기척이 느껴지자 천천히 눈을 떴다.
일렁거리는 황금빛 눈동자가 나비와 희나를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나비와 희나는 머뭇거리다가 그 검은 고양이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무래도 그 고양이가 고양이 신 같았다.
하지만 왠지 기가 죽은 나비와 희나는 차마 그 고양이에게 ‘혹시 고양이 신님이세요?’하고 물을 수가 없었다.
검은 고양이는 나비와 희나를 빤히 쳐다봤다.
인사를 들은 건지, 못들은 건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조용하고 어색한 시간이 지나갔다. 마침내 검은 고양이가 입을 열었다.
-긴장할 필요 없단다. 벌을 주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 고양이가 인간 가족을 여기까지 데려온 건 처음이거든. 그래서 얼굴이나 보고 싶었던 거란다.
검은 고양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이상한 목소리였다.
아주 커다란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 그렇게 크진 않았다.
따지자면 조그만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가슴 깊은 곳까지 울렸다.
아무튼 검은 고양이의 말 덕분에, 검은 고양이가 고양이 신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나비는 얼른 고양이 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빌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건 사고였어요.
-알고 있단다. 누가 일부러 자기 주인을 고양이 나라에 데려오겠어? 두 번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고양이 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고양이 신의 말에 희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희나는 지금껏 자기가 꿈속에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뒤늦게 자신이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꿈이라 치기엔 지나치게 선명했다는 걸 눈치 챘다.
게다가 지금까지 만나온 모든 고양이들은 하나 같이 여기가 꿈 속이 아닌 고양이 나라라고 하고 있었고 말이다.
혹시 여기가 꿈 속이 아니라 진짜 고양이 나라인걸까?
“정말 여기가 고양이 나라인가요? 전 돌아갈 수 없나요?”
희나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물었다. 고양이 신이 희나를 바라보았다.
고양이 신의 황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지더니, 곧 안타까운 듯 쯧쯧,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래. 그렇구나. 너는 여기가 꿈속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구나.
고양이 신은 희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커다란 발바닥이 자신을 향해 오자 희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걱정할만한 일은 없었다. 고양이 신의 부드럽고 도톰한 발바닥이 희나의 볼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희나야. 착한 아이야. 여기는 고양이 나라란다. 생명의 불꽃이 꺼져버린 착한 고양이들이 오는 곳이지. 너는 나비를 따라 사고로 이곳에 오게 된 거야. 원래 인간은 이곳에 오면 안 된단다.
고양이 신의 말에 나비의 코가 창백해졌다. 나비는 뒤늦게 희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설마 희나가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으면 어떡하지?
희나가 영영 학교도 못가고, 가족들도 못 보게 되면? 나비는 희나가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다.
발을 동동 구르던 나비는 어느 순간 더는 참지 못하고 고양이 신의 발에 매달려서 빌었다.
-죄송해요. 고양이 신님.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 희나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나비가 빌고 있는 동안, 희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나비를 쳐다보았다.
희나는 이 사실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꿈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현실이었다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희나는 가만히 주먹만 쥐었다 폈다 했다.
손바닥에 손톱이 닿는 감촉이랑 체온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정말 모든 게 꿈이 아닌 것 같았다.
희나는 잠깐, ‘돌아가지 않으면 뭐 어때’ 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이곳엔 나비가 있었으니까.
희나가 가장 사랑하는, 희나의 제일 친한 친구 나비.
나비만 있다면 여기에 있어도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 같았다.
그 때, 고양이 신이 그런 희나의 마음을 눈치 챈 것처럼 말했다.
-진정해라. 나비야. 희나를 돌려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다만,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희나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희나를 위해서, 앞으로 고양이 나라에서 사는 게 더 좋은 일이 아닐까?
-네? 하지만 사람이 고양이 나라에서 살아도 될까요? 여기는 희나의 가족도, 학교도 없는 걸요…….
-그렇지만 이곳엔 나비 네가 있잖니. 너는 희나의 둘도 없는 단짝 친구잖아.
-하지만…….
나비는 쉽게 어쩌자고 말할 수 없었다. 물론 희나가 고양이 나라에 살게 되면 나비는 좋았다.
하지만 그건 나비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희나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였다.
나비와 고양이 신의 시선이 저절로 희나에게 향했다. 고양이 신이 희나에게 물었다.
-희나. 네가 말해보렴. 고양이 나라에서 사는 건 어떠니?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물어보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여긴 나비도 있고 다른 고양이들도 귀여웠다.
하지만 나비의 말처럼, 부모님도 학교도 없었고, 지금껏 살아왔던 인간 세상과 달리 굉장히 낯선 곳이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게 되어버렸다.
희나는 무언가를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았다. 희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둘 중 어느 곳도 고르지 못하겠어요. 나비가 없는 것도 싫고, 다른 가족들이 없는 것도 싫은 걸요.”
-하지만 선택해야해.
고양이 신은 다정한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희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희나는 입을 다문 채 계속 고민했다.
희나가 계속 망설이기만 하자, 고양이 신이 나긋한 목소리로 희나를 설득했다.
-들어보렴, 희나야. 나는 알고 있단다. 지상은 힘들고 괴로운 곳이지. 하지만 고양이 나라에선 힘들고 괴로운 일이 없어. 매일 고양이 친구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단다. 게다가 이곳에선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너희 부모님처럼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들도 없고. 넌 학원 대신 매일 들판을 뛰어다니며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어. 어때? 돌아가는 것보단 이곳에 계속 있는 게 나을 것 같지 않니?
고양이 신의 말에 희나의 마음이 흔들렸다. 부모님은 가끔 희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했다.
부모님이 이래라 저래라하는 게 진절머리 날 때도 있었다.
가족 중 나비 말곤 아무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나는 엄마와 아빠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들을 다시 볼 수 없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상으로 돌아가면, 나비와 헤어져야만 했다.
나비, 나의 나비. 착한 내 고양이. 희나는 나비와 함께 했던 모든 날들을 떠올렸다.
우는 희나의 곁을 지켜주던 나비, 나비가 없으면 슬픈 밤엔 누가 희나의 옆에 있어주겠는가.
그런 사람은 나비 말곤 아무도 없었다.
희나가 치열하게 고민하던 그때, 고양이 신이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양이 나라에 살려면 네가 먼저 해야 하는 게 있단다.
해야 할 일이라고? 도대체 그게 뭘까? 희나는 갑자기 초조해져서 손가락으로 입술을 두드렸다.
뭔지는 몰라도 벌써부터 좀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양이로 태어나 고양이로 마지막 숨을 쉬어야만 고양이 나라에 올 수 있거든. 그러려면 너는 인간의 몸을 버리고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야 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요?”
-인간의 몸을 버려야 한다고요?
고양이 신의 말에 나비와 희나는 너무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양이 나라에 오기 위해선 인간의 몸을 버리고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야한다니.
그건 너무 부담스러운 조건이었다.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대가로, 너와 나비의 기억을 받아야만 한단다.
“하지만, 하지만 그럴 수가, 그건, 그건…….”
나비와 희나의 기억을 받아간다고? 희나는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희나가 계속 더듬거리자, 고양이신이 다시 말했다.
-기억을 잃더라도, 고양이 나라가 좋은 곳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 또 이전 일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너와 나비는 고양이 나라에서 다시 만나 사이좋은 친구 사이가 될 거야. 어때? 기억을 잃는 건 아쉽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니?
희나는 혼란스러웠다. 기억이 없어져버린다니.
아기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 고양이 나라에서 살 자격을 얻는 대신 희나의 소중했던 기억들은 모두 없어져 버린다.
부모님은 물론 나비에 대해서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희나 뿐만 아니라 나비도 모든 걸 잊어버려야 했다.
기억이 없어진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아니, 어쩌면 아무런 느낌도 없을지 몰랐다.
애초에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어쩌면 고양이 신의 말대로 다시 태어나는 게 좋을지 몰랐다.
기억을 잃는 슬픔은 아주 잠깐 뿐이니까…….
하지만, 정말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이 소중한 추억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희나의 기억 그리고 나비와의 행복한 기억들을 정말 포기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은 생각을 하니까 머리가 아팠다.
초조하고 괴로운 마음 때문에 희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비죽 삐져 나왔다.
그때, 나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희나를 불렀다.
-희나야.
“나비야.”
-희나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모르겠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비는 앞발을 뻗어서 희나의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었다.
앞발에 닿은 눈물은 나비의 발바닥으로 쓰리게 스며들었다. 그 감촉이 나비를 가슴 아프게 했다.
나비는 희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희나의 솜털같이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숯 조각 같은 검은 눈썹, 인형같이 작은 코를 몇 번이고 다시 살펴보았다
. 왜냐면 희나의 모든 걸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이 지났다. 나비는 마음을 굳세게 먹고 다시 입을 열었다.
-희나야. 만약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비의 입으로 들으니 새삼 더 충격적이었다.
희나가 괴로운 표정으로 나비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비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천천히 희나를 끌어안았다.
희나는 나비의 보들보들한 털가슴 안쪽에 안겨있었다. 그건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동안은 나비가 희나의 품에 안겼었다.
고양이 나라에 와서 희나가 작아졌기에 나비는 이렇게 희나를 꼭 끌어안고 있을 수 있었다.
희나는 그동안 나비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생각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품 안이 정말 아늑하고 기분 좋았다.
희나의 머리 위에서 나비가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희나야. 이것만은 기억해줘. 만약 우리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우리의 추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다는 걸.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동안, 계속해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우리를 기쁘게 해줄 거라는 걸.
끌어안은 가슴을 통해 희나는 나비의 심장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두근두근. 그 심장 소리와 함께 나비의 진심도 그대로 희나에게 전해졌다.
나는 너를 사랑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나 자신보다도 더 사랑해.
희나는 왈칵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눈물을 꼭 참았다. 왜냐면 희나도 나비를 사랑했으니까, 나비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희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나비는 눈물의 의미를 모르는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
동안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나비는, 희나의 슬픔을 늘 곁에서 묵묵하게 지켜주고 있었던 거였다.
희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울지 않기로 결심했다.
희나는 나비를 꼭 끌어안았다. 나비의 따뜻한 품속에서 희나는 그제야 결정은 내릴 수 있었다.
슬프지만, 그래도 자신이 가장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희나의 머릿속에 나비와의 행복한 추억들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마지막 생일날까지의 기억들. 하나같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이었다.
“우리의 행복한 기억이 다 사라져버린다면,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비야. 난 너를 절대 잊고 싶지 않아. 그래서……. 그래서 지금 너와 헤어져야 할 것 같아.”
갑자기 비눗방울과 함께 보았던 샴 엄마의 추억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결코 변하지 않는 기억. 영원히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기억.
샴 엄마는 아기 고양이와 헤어졌어도, 결코 영원히 떨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왜냐면 샴 엄마가 아기 고양이를 기억하니까. 아기 고양이도 샴 엄마를 기억할 테니까.
그리고 그건 나비와 희나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나비야. 나는 괜찮아. 지금껏 위로해줘서 고마워. 네 위로가 없어도, 그래도 힘낼게. 힘든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기계 벌레를 발명하는 고양이들도 떠올랐다.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행복을 솔직하게 좇는 고양이들.
그 고양이들은 아주 행복해보였다. 희나도 그 고양이들처럼 용기있게 모든 것에 부딪쳐보고 싶었다.
희나는 나비의 가슴에서 고개를 들었다.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나비를 마주보았다.
눈앞에 나비가 보였다.
예쁜 뾰족 귀, 단추 같은 분홍 코, 호수 같은 파란 눈.
백 번, 수천 번을 본 얼굴인데도 오늘 같이 예뻐 보인 날이 없었다.
희나는 나비의 예쁜 얼굴을 보면서 크게 웃음 지었다. 나비의 코에 코를 부비며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사랑해준 덕분에, 나는 계속 힘을 낼 수 있어.”
나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몇 번이고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럼. 네 말이 맞아. 희나. 네 말이 정말 맞아.
나비와 희나는 다시 서로를 끌어안았다.
둘 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포옹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둘은 괜찮았다.
이 따뜻하고 다정한 포옹을 영원히 기억할 테니까. 마지막이라도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