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나 Feb 15. 2024

칩워 :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  

(아무튼 마무리는 대만 딜레마)



내가 이 책을 읽게 될 줄이야.



칩워.

반도체.

방대한 분량.

기술사 대잔치.


인 책을.


내 기준, 너무나도 손 안 가게 생긴 책인데.

그런데 나름의 소득이랄까, 즐거움이 있었다.




지정학에서 테크놀로지로


나에게 반도체란, 기술 그 자체라기보다는 내가 읽는 기사나 논문, 다른 책의 소재 또는 배경이었다. 격변하는 미중 관계라든가, 지정학적 현황, 국제 정치 등에는 관심이 있지만 여기에서 주요한 지렛대로 작용하는 반도체에 대해서는 인지도나 이해가 얕았던 것.


그렇다고 반도체의 근본을 이해하겠답시고 많은 노력을 들여서 딥다이브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난 호기심이나 갈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드는 일이니까. 대학원 리포트를 쓰기 위해서 꼭 읽어야 한다든가 하는 강제성이 없는 이상, 그것까지는 무리야.


칩워는 분명 반도체의 근원에 대한 꽤 긴 서술을 포함하고 있고 책도 두껍다. 술술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야. 관련 전공자나 업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매력적으로 와닿은 하나의 큰 줄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 기술에 방점을 둔 사람이 지정학 이야기로 뻗어나간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국제관계, 정치, 외교, 지정학에 전문성을 둔 사람이 이를 깊이 있게 파고 드는 길로 '반도체'라는 주제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반도체 기술은 지정학을 이해하기 위한 디딤돌인 셈이다. 이 플롯의 방향성이 나에게는 중요한 요소였어. 쉬운 말로 하자면 '공돌이가 하는 반도체 이야기'가 아니라 '국제 정세 전문가가 파고 들어간 반도체 이야기'였달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K칩


한국의 반도체 탑플레이어들에 특별히 관심이나 애정을 가진 것은 아니건만, 미국의 교수/저자가 아우르는 책, 세기를 아우르는 대주제의 소용돌이, 그 속에서 한국 기업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좀 새삼스럽다. 한쿡 기업의 명성! 자랑스럽다! 이런 것보다는 - 음, 이런 틈바구니에 한국의 시장과 교육과 채용과 정책이 끼어 있군... 와우, 이런 느낌일지도.


그리고 거의 당연하게도 서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측의 추천사가 들어가 있다. 권오현 전 삼성전자 사장 그리고 송창록 SK하이닉스 부사장. 정말이지 딱 예상되는 지점에 짜맞춘 듯이 그들의 추천사가 들어가서 그 클리셰성이 잠시 웃기도 했지만 - 그렇다고 눈길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장황하지 않고 단촐한 글이었지만 행간을 찬찬히 읽게 되는, 흥미진진한 칼럼 같았지.


삼성과 SK에 이어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이창한 부회장의 추천사도 들어가 있는데 (물론 이쯤 되면 추천사 과다 서적에 대한 경계심도 조금 생긴다) 새겨 들을 말이 있다. 그건 바로 "혜안을 얻는 데에 책 한 권은 너무 싸다"라는 말. 그래, 출판사나 서점들의 홍보 클리셰 같기는 해도 "대중에게 실리콘 시대를 이해시킬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칩워" 류의 찬사가 왜 나왔는지는 알겠다.




페어차일드, 텍사스인스트루먼트, TSMC, 인텔, 그리고...


IT 무지자 그리고 무지성 소비자에 가까운 나는 대중적인 BtC 기업 브랜드 위주로만 알고 그 뒤에 숨겨진 소위 '리얼 플레이어'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냥 어디선가 좀 들어봤고 얼핏만 아는 수준. TSMC를 인지하기 시작한 것도 5년이 채 안 되었거늘. 반도체 시장의 근본 격인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TI도 사실 친구가 다니는 회사가 아니었으면 잘 몰랐을걸.


이 책의 앞부분은 그런 나에게 '시험 전에 이 강의 하나만 듣고 가라' 식으로 반도체 시장의 태동과 발전에 대해서 빠르게 일타강의를 해주는 격이었다. 매번 들여다보게 된다거나 줄줄 외우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한번 내 머리 속을 스치고는 지나갔으니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지. 그게 바로 '어디서 본 건 있는' 상태 아니겠는가. (훗)




목차와 글로서리


책이 간략하거나 짧은 것은 아니지만 이 목차를 보라. 직관적이고 구분이 명백해서 이것은 마치 '목차만 읽어도 책을 읽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런 구성. (물론 아님. 책은 읽어야 됨.) 1장을 읽기 전부터 이런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이런 기획, 속이 다 시원하네. (하기사, 내가 번역과 목차에 집착하는 편이기는 하다만.)


그리고 반도체 초짜 입장에서는 책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할 주요 인물이나 기술 용어들에 대한 눈높이식 글로서리가 있는 점도 몹시 반가웠다. 이것만 들이밀면 마치 시험 전 암기장처럼 부담스럽고 재미없게 느꼈겠지만 - 실로 책을 읽다가 언제든지 다시 들춰볼 수 있는 치트키 같은 서비스. 그리고 책을 완독한 이라면 이 글로서리만 훑어 보더라도 주요 사건 전개들을 떠올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튼 여러 모로 꽤 친절한 책이라니까.




PART VIII 반도체로 숨통을 조이다

Chapter 54 대만 딜레마


반도체의 태동부터 시장의 구축, 다변화, 지정학까지 빌드업이 잘 된 덕인지 가장 내 기억에 남는 건 책 본문의 마지막인 54장 대만 딜레마였다. 그리고 이후에 이어지는 작가의 에필로그의 역자의 말. 아 물론 중간에 적당히 몇몇 챕터들은 뛰어넘은 탓에 더욱 마무리의 임팩트 위주로 남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모든 걸 다 정독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은 내려놓고 읽었다. 내가 모르던 내용,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즐거이 읽고 조금 이야기가 길다거나 지루하게 느껴지면 단박에 마디 점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다, 내용을 다 소화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럼에도 내 안에 분명히 남기고 간 것이 있는 책이었다. 굿바이 칩워. (수요가 있는 책이라서 중간상인 알라딘을 제거하고 바로 당근마켓에 올렸더니 판매되었음 ㅋㅋㅋㅋㅋㅋㅋ 내일 직거래하기로 했지. 어우 후련해.)









매거진의 이전글 연결되는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