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2025)
죽음은 언제나 연구 대상이다. 여전히 죽는 것, 그리고 그 이후의 것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죽어서 하늘 위로 가는가, 땅 밑으로 꺼지는가. 사후세계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다. 미지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 살아 숨 쉬고 움직인 대략 100년의 세월을 보내면 그 이후 억겁의 시간에서 우리가 무얼 하고, 무얼 생각할지 전혀 알 수도 없는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일 테다.
때론 사후를 생각하는 것은 너무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관점을 달리해 ‘현세'에 집중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잘 살아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뜻이다. 후회는 결국 꼬리를 물어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욕망을 만든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일 것이고, 삶과 죽음의 순환을 부정하는 질낮은 의지일 것이다. 결국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리는 삶을 쥔 순간부터 죽음을 마주해야만 한다. 그 죽음을 온전히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비로소 그 삶의 완결성이 현현해진다.
영화 <숨>은 우리가 삶을 쥐게 되면서 자연스레 마주해야 하는 그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죽음에는 다양한 시간이 뒤섞여 뭉쳐진다. 죽음 그 자체를 마주하는 시간,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 살아있는 자들이 그 죽음을 정리하는 시간.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이 세상에 혼자 와서 혼자 가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이 세상에 나고, 다른 인간 덕에 이 세상을 떠나갈 수 있게 된다. 다른 인간들이 죽은 인간들의 시신을 처리하고 애도하는 그 유기적 과정 덕분이다.
그렇기에 <숨>이 죽음과 그 이후를 대하는 태도에 집중하게 된다. <숨>은 장례지도사, 노인, 유품정리사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서 ‘죽음'에 대한 정답 아닌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유재철 장례지도사와 윤재호 감독의 합이 눈에 띈다. 영화 구조만으로는 3명의 인터뷰와 이야기를 각각 챕터별로 나누어 감독의 논리를 전개하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그 핵심에는 유재철 장례지도사가 있다. 많은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고 여러 번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바라보고 있을까. 어떠한 것을 지독히 원하면,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경험이 짙은 사람을 찾아가 보라는 말이 있다. 윤재호 감독은 그 말을 충실하게 이행하고자 했던 것일까? 유 장례지도사를 찾아가 그 궁금증과 결론의 실마리를 좇아보려는 시도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 누가 죽음에는 순서가 있다고 했는가. 유재철 장례지도사가 ‘웰다잉'에 관해 고민하며 아내와 담화 나누는 장면들은 담백하고 사실적이다. 그렇지만 더 죽음의 문턱 가까이에 놓인 노인과의 인터뷰가 삽입되는 순간 그 모든 고민은 우스운 것이 된다. 잘 죽는 것은 중요하다. 잘 죽어야만 삶의 뒷맛이 씁쓸해지고 고약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이 공존한다. 그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는 모른다지만 좁은 방에서 혼자 그 끝을 준비하는 노인을 비추는 카메라는 다소 잔인하게 느껴진다.
그 잔혹함에 대못을 박는 장면들이 뒤를 이었다. 유품정리사는 ‘한때' 빛났지만 혼자 스러져 고독사를 마주해야만 했던 이의 자택을 정리한다. 부패물이 집 온 곳곳을 뒤덮었고, 좁은 집에 뒤엉킨 잡동사니들은 보는 관객의 마음마저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유품정리사는 고독사한 이의 ‘빛나던 과거'를 들추지만,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릴 정도로 의미 없는 안타까움만을 표출해 낸다. 과연 그 고인이 성공하지 못했기에 고독사한 것인가. 한때 빛났던 과거를 들춘 이유는 그렇지 못했을 훗날의 모습이 오명처럼 느껴져야 하기 때문인 것인가. 그런 점에서 <숨>이 고독사를 다루는 모습은 다소 고리타분했고, 보는 이를 불편하게끔 했다.
모두에게 죽음은 두려운 일이다. 사실은 죽어서 어떻게 될지를 알게 된대도 죽음은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은 모든 일의 끝을 두려워하고, 아쉬워하고 끝내 부정하고 싶어 한다. 죽으면 시체가 된다는 것은 이미 저명하고, 심장은 멎고 피부는 창백해지며 나의 의식이 사라진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 됐다. 사후세계의 유무보다도, 현세에서 마주해야 할 ‘죽음'은 이미 추하고 아름답지 못하며 구질구질한 형태를 보인다. 죽음에 대한 관점은 다양하게 존재할 일이지만, 그 다양한 관점 속에서 <숨>은 다소 진부하고 헛헛한 과제를 관객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에 대해 바라보려고 했던 그 날개의 펼침은 눈부셨대도, 이야기를 풀어갈수록 흐릿해지고 칙칙해진 과정은 누가 해결할 것인가.
죽음을 경험하고서 그 경험을 말로 풀어 줄 사람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두기만 할 뿐, 다시 거둬들이지는 못한 채 일종의 ‘방기'하는 형태로 지저분하게 풀어진 것을 놔둬 버린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관객의 몫인가.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이 분명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그렇다더라', ‘그런 것 같더라.'라며 여지만을 남겨둬 버리는 것은 찝찝한 뒤처리처럼 느껴진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둬버리는 것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할 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 의문만이 영화가 끝난 뒤의 상영관 공기를 가득 채워 맴돌았다.
* 이 비평은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시사회를 다녀온 뒤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