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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영 Oct 09. 2021

전화 공포증인가, 그냥 어려운건가

나가 사는 건 이미 익숙한데 스키장 '시즌방'구하는 건 처음이라

 7살이었던 나는 굉장히 내성적이었다. 동네 마트에 가서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인사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고 그러니 더더욱 찾는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아마도 그 시절에도 MBTI가 유행이었다면 아마 나는 I가 나왔을 거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겪은 이사와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는 원래도 내성적이었던 나를 더 내성적으로 만들었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계속 이사를 반복하다 보니 고등학생 때쯤 내 성격은 정반대로 바뀌었다. 400명에 가까운 학년 친구들 중에 아는 사람이 한 손에 꼽았으니, 나는 외향적인 성격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다행히 고등학교 생활 동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나는 '해야 하는 말'은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성인이 되고 난 뒤에 여러 알바 자리를 떠돌면서 아주 외향적이고, 비즈니스에 능한 '가면'을 쓰는 법을 알게 되었다.

 가면을 쓴 나는 손님이 컴플레인을 걸어도 왜 일하는 우리의 입장을 몰라주냐며 같이 화가 나기보다는 먼저 사과와 함께 양해를 구하며 빠르고 원만한 해결을 유도할 줄도 알고, 갑작스러운 악천후로 예약 취소 전화를 걸어야 할 때도 마치 TTS(Text to speech, 단어나 문장을 입력하면 소리로 읽어주는 프로그램)에 대본을 입력한 것처럼 응대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나의 가면이 종종 고장 날 때가 있다. 익숙한 상황에서는 경험을 토대로 대처할 줄 알지만 그건 처음 하는 일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성격이 외향적으로 변했다고 한들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 내성적이었던 내가 여전히 꿈틀거리면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내성적이었던 그 애는 새로운 걸 너무도 싫어한다. 남들은 내가 도전을 좋아하고 굉장히 모험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난 새로운 맛의 아이스크림에 도전하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 보통 남들이 보는 도전적인 나의 모습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을 혼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사전조사를 마치고 자신감을 가진 나의 모습이다.

 시즌방을 구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리모델링이 되어있고, 가격도 적절한 시즌방을 구하려면 다양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거의 며칠을 검색에 매달렸다. 저번 시즌, 그 저번 시즌까지의 매물과 가격 정보들을 훑어보고 개인이 직접 거래하는 방도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방은 안 본 방이 없었다. 그리고 나의 오랜 사전조사 끝에 내린 결론은 빨리 부동산에 연락하는 것만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라는 거였다. 상대적으로 매물이 적은 이번 시즌에 시즌방을 처음 구하는 그리고 거주지가 먼데 자차가 없어 발품을 팔 수 없는 내가 방을 구하려면 아마 이 글을 읽는 누가 봐도 답은 부동산일거다.

 그래서 그나마 내가 시즌방을 구하려는 아파트의 매물을 많이 올려둔 부동산을 세 개 정도 골랐고, 가장 마음에 드는 매물을 올려둔 부동산에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사장님은 내가 너무도 잘 아는 강원도 무뚝뚝 유형이었다.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강원도 사람이다. 아무튼, 사장님의 대답은 정말 모든 장식을 다 떼어버린 거의 글자 날 것을 그대로 읽는 느낌이었다. 그 사장님은 내게 아주 차분하고 무뚝뚝한 어투로 "지금은 시즌방 매물 없어요 10월 중순은 돼야 나옵니다"라는 말만을 남겼고 나는 당황하다가, 혹시 매물이 나오면 그때쯤 연락을 달라는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네...? 어디 부동산이라고요?


 아마 이 그림 속 모습이 부동산 전화를 받는 나와 비슷했을 거다. 나는 그 전화를 받고 '아 그런가'라는 생각을 하며 딱 하루 정도 시즌방 찾는 일을 멈췄다. 그리고 내가 정신을 차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시즌방을 찾기 위해 자주 드나들던 카페에 갑자기 매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부동산이 한 개인가? 시즌방이 부동산 매물만 있나? 나는 다시 검색에 몸을 맡기고 방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답(=지금의 부동산)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N사 검색에서 내가 모르던 사이트에 올라온 매물들을 찾았고, 거기에는 이미 꽤 많은 시즌방 매물이 올라와 있었다. 내가 계속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찾던 것들이 바로 이거였구나, 보자마자 여기서 방을 구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딱 마침 내가 원하는 조건을 충족하는 방이 적당한 가격에 올라와 있었고, 나는 그다음 날 바로 그 부동산에 전화를 했다. 같은 '여보세요'인데 이 부동산 사장님은 나긋나긋한 강원도 유형이었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목소리에서 상기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 매물은 전보다 적은데 방 구한다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이어지는 문의전화에 아주 당황스럽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자연스러운 스몰톡에 나도 긴장이 조금 풀려서 저층인 게 조금 아쉽지만 그 방에 가계약을 걸고 싶다는 말을 했고, 사장님은 흔쾌히 내 연락처를 그 방에 확실하게 걸어뒀다가 연락을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기분 좋은 전화를 마치고, 가족 카톡방에 '마음에 드는 시즌방을 찾아서 전화로 가계약을 걸었다'라고 자랑을 했다. 엄마는 내가 이 시즌방 구하는데 얼마나 신경을 썼고, 최선을 다 하고 있는지 잘 알아서인지 답장으로도 '잘했어', 집에 오니 부지런히 찾아서 잘 구했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 주었다. 내가 아는 강원도 무뚝뚝 유형 대표주자인 엄마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또 그림 속 모습이 되고 말았다. 잠시 낮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벨소리가 들렸고, 안 받으려고 했는데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라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여기 ㅁㅁ부동산인데요~", 아 부동산이구나. 시즌방 문의가 계속 있어서 계약을 할 건지 결정하고 가계약금을 넣어달라는 전화였다. 찰나의 망설임 끝에 내 직감이 이 방을 계약하라고 해서 계약금을 걸겠다고 했다. 그렇게 자다 일어나 정신도 없는 채로 받은 전화는 끝이 났고 문자가 왔다. 그래, 아이폰이라 통화 녹음은 못해도 문자는 기록이 남으니까 걱정을 좀 내려놔도 되겠지. 제대로 된 계약까지 문제없이 잘 진행할 수 있겠지?


 인생은 늘 새롭고, 어려운 것들 투성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시즌방 구하기에 도전하면서 한 발짝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가 대견할 따름이다. 그러니 나야, 부디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운동도 하고 방도 치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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