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반드시 다시 온다
며칠 전 늘 오던 환자가 들어오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런, 뭔가 상황이 안 좋구나'라는 생각이 곧바로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평소보다 우울감, 무기력감이 심해졌다고 호소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저만 안 좋은 것 같아요"
라며 말을 시작했다. 그녀는 최근에 회사에서도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져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하는 일마다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아, 세상이 자신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급기야 그녀는 앞으로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선생님, 살아갈 힘이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 또 계속 안 좋은 일들만 가득할 텐데 어떡하죠? 저는 그게 너무 무서워요. 앞으로 인생이 좋아질 수 있을까요?"
10년 가까이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얘기를 듣고 있지만 여전히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든다. 세상이 자신에게만 불행을 준다는 이 믿음은 환자의 증상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며,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상태를 알리는 경보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 이 시기에 내가 하는 말이 환자의 상태를 조금이나마 호전시키느냐, 아니면 오히려 악화시키느냐를 결정짓기 때문에 마치 위태로운 수술을 하듯이 조심스럽게 내가 할 말을 선택하게 된다.
극도로 비관적인 상태의 환자는 앞뒤 맥락에 따라 듣기 원하는 대답이 다르다. 단지 공감을 원할 때도 있고, 지금 상황에 대한 실마리를 같이 찾고자 할 때도 있고,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대답을 원할 때도 있고, 뇌과학적인 대답을 원할 때도 있다. 그리고 며칠 전 나의 환자처럼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을 원할 때가 있다.
"힘들겠죠. 분명히 힘든 일이 있겠죠. 슬프지만 그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또 올라가는 순간도 있을 거예요. 인생이 내려갈 때는 분명 슬프지만 올라가는 것에도 기쁨을 느끼는 게 인생이에요"
라고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말에도 여전히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눈치였다. 잠깐의 말로는 그녀가 세상에 가진 불신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오늘 나는 '폭싹 속았수다'의 마지막 4부를 보면서 그녀의 질문이 자꾸 떠올랐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불행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날까? 이렇게 힘든데 나는 버틸 수 있을까?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거며 앞으로 내 인생은 좋아질 수 있을까? 드라마를 보는 내내 환자가 나에게 던졌던 질문들을 다시 주인공들을 통해 물어보는 것만 같았다.
'폭싹 속았수다'의 4부는 주인공 오애순의 후반기 인생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3부까지 내용과 마찬가지로 오애순의 인생은 끝까지 평탄하지 않다. 아들이 누명을 써서 경찰에 잡혀 가기도 하고, 가족을 키워준 소중한 배를 팔게 되기도 하고, 딸 양금명이 실직을 하고, 부동산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남편 양관식을 병으로 잃기까지 한다. 시청자들은 3부까지 고생을 한 오애순이 4부에서는 힘든 여정의 보상을 받기를 바랐겠지만 감독과 작가들은 여지없이 그녀의 삶에 고통과 고난을 밀어 넣는다.
자신의 인생의 전부이던, 딸보다 자신을 더 우선순위에 두던 남편이 떠나자 오애순은 다시 또 무너진다. 아들 동명이를 잃었을 때처럼. 아마 그때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여의고 세상 외톨이가 된 그 시절이 트라우마처럼 기억났을 것이다. 온 세상이 원망스럽고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드라마가 새드 엔딩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어린 시절 어리광을 부리던 오애순이 아니었다. 세상이 아무리 그녀에게 어퍼컷을 계속 날려도 이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행복을 다시 잡을 줄 안다. 지난 슬픔에 오래 빠져 계속 살아갈 이유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동명이를 잃었을 때는 부엌을 채워주던 이웃의 따뜻한 온정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자신에게는 여전히 사랑하는 아들, 딸, 손자, 친구, 이웃들이 자신의 지게를 조금씩 나눠지고 있음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오애순은 다시 일어난다. 남편이 남겨준 핀을 꼽고 시를 쓴다. 남편은 그녀에게 단순히 핀을 남겨준 것이 아니다. 50년 동안의 삶, 추억, 가족, 사랑을 남겨주었다. 그것이 그녀가 일어날 힘이 되고 시가 된다. 선생이 되어서 어른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오애순은 반드시 다시 봄이 찾아올 것이라 알고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여러 인물들은 오애순과 양관식의 인생을 부러워한다. 아내, 남편을 잘 만나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된다고. 마지막까지 드라마를 본 시청자도 그런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결국 그녀는 목표하던 것을 이루고, 가족들도 있으니 운이 좋은 인생이야. 나도 저렇게 좋은 사람 만나면 행복할 수 있을 텐데'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드라마 속 오애순의 삶이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단지 드라마의 주인공이니 작가가 행복한 결말을 준 것일까?
인간의 기억은 참 짧아 마무리가 행복하면 그동안의 과정도 행복한 것처럼 느낀다. 실제로 인간의 뇌는 고통의 총량을 측정하기보다는 마무리가 어떤지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오애순의 인생에서 조금 뒤 돌아가보면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모두 여의고, 작은 아버지 집에 얹혀살며 눈치 보고, 고등학교를 잘리고, 혼자 동생들을 돌보며 양배추 장사를 하고, 좌판에서 해산물을 팔고, 남편까지 0.0025%의 발병률을 가진 다발성 골수종으로 보낸 그녀의 인생이 행복하다고,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녀의 인생이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나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인생이 매우 평범한 인생, 수많은 평범한 인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인생이 어떻게 평범한 인생이냐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직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수많은 인생사를 들어본 정신과의사는 안다. 모든 인생은 각자만의 파란만장한 굴곡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는 사실을. 오애순의 인생만큼의 슬픔이, 또 그녀의 인생만큼의 행복이 각자의 드라마에서 상영되고 있다.
나는 이 드라마의 감독이 '열심히 살고, 덕을 베풀다 보면 다 돌아오게 되어있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라는 진부한 이야기만을 전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훨씬 더 넓게, 인생과 인생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고찰을 전해주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계속 바다에 비유한다. 가족을 모두 뺏어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주는 바다. 바다에게 의도는 없다. 그냥 늘 그렇게 위험하면서도 잔잔하게, 잔인하면서도 풍요롭게 존재할 뿐이다.
바다 옆에서 흘러가는 오애순의 인생처럼 우리 인생도 세상에 표류하고 있다. 세상이 주는 고난과 행복에도 의도는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완전히 밝혀내거나,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오애순과 양관식처럼 부지런히 노를 젓는 것 밖에 없다. 노를 젓는다고 배가 빨리 간다는 보장은 없다. 파도와 바람이 거세게 불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안 좋은 날도, 좋은 날도 분명 끝이 있고 또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것.
누군가 진료실에서 '왜 삶을 살아야 하는지?' 혹은 '삶이 좋아질 수 있는지'라는 질문을 한다면 나는 '폭싹 속았수다'를 추천해주려고 한다. 그만큼 이 드라마는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오애순의 삶으로 훨씬 더 잘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드라마의 마지막에 나오는 그녀의 대사가 이 모든 얘기를 관통하고 있다.
인생 진짜 고해봐야 하는 거지. 중간에 때려치웠으면 어쩔 뻔했어. 살아보기를 천만다했지….인생이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가는 줄 알았더니 아니야. 그냥 때때로 겨울이고, 때때로 봄이었던 거 같애. 수만 날이 봄이었더라. 반짝반짝한 순간들이 너무 많았어.
올해 마지막 추위가 왔다.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봄이 왔다. 그렇게 봄은 반드시 온다. 몇 번이고 겨울이 오지만 몇 번이고 다시 꽃은 핀다. 추운 겨울도 외롭고 쓸쓸해 보여도 고개를 들어 둘러보면 같이 버티게끔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그게 인생이다. 그런 당신에게도 '폭싹 속았수다' 라는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