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 테라딜로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 26.4km
태풍이 온 것처럼 밤새 요란스럽게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졌다. 그 덕분에, 잠에서 깼지만 휴대전화로 근사한 번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아침엔 비가 그치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많은 데다가 그늘이 거의 없다는 말에 일찍 출발했다. 어제 미리 덜어놓은 삼계탕 국물에 즉석밥으로 닭죽을 끓여 아침을 해결하고 나니 속이 든든했다. 마을 중앙에 있는 광장엔 이미 많은 순례자가 분주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앞으로 17km를 걸어가는 동안 마을이 없다. 넉넉한 물과 초콜릿, 조그마한 빵 하나를 배낭에 챙겨놓았다. 시작부터 까마득한 직선의 길이, 순례자들에게 오늘 가야 하는 코스가 만만치 않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오르막 내리막이 거의 없이 길도 평탄하고, 돌도 별로 없는 길이니 순조롭게 걸어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걷기를 두 시간쯤 지나,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은 예전부터 이 모양으로 있었고, 여전히 걸어가기 힘들다. 다만, 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졌을 뿐이다.
가다 보니 뜻밖의 푸드트럭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트럭의 벽에 걸린 사진을 보니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서 영업하고 있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빈집이나 터가 무척 많다. 내가 만난 상당수의 한국인이, 저기서 김밥이나 라면을 팔고 싶다거나, 알베르게를 운영해 보고 싶다는 말들을 한다. 지나왔던 카스트로헤리스에 있던 오리온이라는 알베르게를 운영 중인 분의 말을 빌리면 ‘와서 일단 살아봐’였다. 보기와는 다르게 낭만적이지 않고 행정적인 부분이 너무 답답하다고 하셨던 말이 생각났다.
난 바로 착즙을 해주는 오렌지주스와 또르띠아를 주문하고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있으니,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는 얼굴도 있고 반가운 사람도 보였다. 반갑지 않은 중국인 무리도 도착했다. 난 몇몇 사람에게 인사하고 서둘러 출발했다. 오늘 가는 마을엔 알베르게가 두 군데뿐이다. 만약 저 중국인들이 나와 같은 패턴으로 걷는다면 만날 확률은 반반인 셈이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운명에 맡겨보기로 했다. 내가 고민하고 애쓴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다. 걸으며 생긴 또 하나의 새로운 습관이다.
삼십 분쯤 걸었나? 몇 그루의 나무가 작은 그늘을 만들어 놓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승합차가 보이고 긴 테이블 위에 음식도 보였다. 이것도 푸드트럭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협소하고 별것 없었다. 한쪽에 앉아 있던 하얀 머리 미국인이 나에게 인사하며, 오라고 손짓했다. 난 그냥 인사나 하고 가려고 했는데, 그는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소리를 했다. ‘프리’, ‘노 도미네이션’. 어라? 공짜라고? 기부를 받는 것도 아니라고? 이 사람은 뭔데 몇 가지의 음식과 물, 음료수를 나눠주고 있는 거지? 너무 궁금했다. 그는 그냥 즐기라는 말과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성당에서 순례자를 위해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고, 승합차를 이용해 마을 간 간격이 먼 곳들 몇 군데에서 나눔을 위한 자원봉사를 한다고 들었다. 나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 역시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기에 정확한 사실관계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토록 반가운 나눔의 손길을 남은 여정 동안 두 차례 더 만났다. 지루하고 힘든 길이었지만 이 길을 같이 걷는 사람들과, 이런 따스한 정이 나를 계속 웃게 만들고 지친 발걸음에 힘을 북돋아 줬다.
도착한 알베르게엔 기대와는 다르게, 중국인 무리가 나에게 반갑다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다행인 건 나와 다른 층이었다. 어제 같이 저녁을 해 먹은 어르신 두 분도 이곳에 예약하셨는지, 잠시 후 들어오셨다. 난 마당에서 상그리아 한잔을 마시며 느긋한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어르신 중 한 분이 오셔서 이 음료가 뭐냐고 물으셨다. 와인으로 만든 칵테일 음료라고 말씀드리니 신기한 듯 쳐다보시다가, 잠시 후 한 잔을 사가지고 내가 있는 자리로 다시 오셨다. 내가 이야기를 잘 들어 드렸는지 틈만 나면 내게 오셨다.
PS. 저녁을 먹기 위해 한국인 어르신 두 분과 나는 한 테이블에 앉았다. 마당에서 같이 상그리아를 마시던 분은 나와 같은 메뉴를 주문하셨고, 그걸 보신 다른 한 분은 갑자기 안 먹겠다며 방으로 돌아가셨다. 난 워낙 저 한 분의 성격이 괴짜 같으셔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우리 둘이 계속 같이 있는 걸 보시고 화가 나셨다는 것이다. 친구는 내팽개치고 다른 사람하고만 이야기한다며, 이미 낮에 한바탕 실랑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난 다음에 묵을 예정인 마을과 알베르게를 알려드리고 나서, 두 분의 행복한 순례길 여정을 위해 당분간 떨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 같아진다고 하던데, 어이없기도 하고... 마침 혼자 있고 싶기도 해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Tip. 테라딜로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에는 알베르게가 두 군데인데, 마을 입구에 있는 곳이 시설이나 환경이 더 낫다는 사용자들의 증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