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미스타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19.0km
갑자기 방 안이 환해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눈을 살짝 치켜뜬 채 침대 아래를 내려다보니 중국인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보였다. 사람들이 말하던 것이 이런 거였구나. 다들 자고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있다. 이미 잠이 깨버린 난 흔들거리는 침대를 부여잡고 내려와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다들 외국인의 눈에 나도 중국인으로 보일까 걱정이 되었다. 내 짐을 한 아름 끌어안고 밖으로 나왔다.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떠나고 나니 조용해진 알베르게. 난 어제 준비해 둔 아침을 챙겨 먹고 해도 뜨지 않은 길을 나섰다. 새벽의 프로미스타는 어슴푸레한 푸른빛이 가득해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하늘엔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구름이 잔뜩 낀 것이 보였다. 일기예보에도 간간이 비 소식이 있었다. 걷기에는 불편하지만 그동안 너무 가물었기에 땅에는 비가 절실해 보였다.
구름이 더 짙어지고 바람도 거세졌다. 태양이 내리쬐면 구름이 가려주길 바라고, 오늘처럼 잔뜩 흐린 날엔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그리워진다. 더우면 바람이 불어주길 바라고, 추워지면 세상을 타 태울 것 같던 태양이 그립다. 변덕스럽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 시간 남짓 걸었을 때쯤 마을이 나타났다. 출발하면서 아침도 먹었기에 다음 마을에서 쉬기로 하고 지나치고 있었다. 옆 골목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나더니 내 앞으로 그 중국인 무리가 나타났다.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떠들썩한 그들의 중국어가 내 귀를 괴롭혔다. 상쾌하게 출발했는데 채 한 시간 조금 지난 지금은 정신이 하나도 없다. 한 사람씩 이야기했으면 좋겠는데, 각자 자기 말을 들으라며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사람이 많다 보니 조금 빨리 걸어도, 조금 늦춰 걸어도 그 무리 속에 갇혀 빠져나갈 수 없었다. 머리가 슬슬 아파지기 시작할 무렵, 한 중국인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손짓한다.
각자 떠드느라 가야 할 이정표를 지나쳐 한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그들 속에 걷다 보니 별생각이 없었다. 아니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중국인들을 따라 원래 가야 하는 길까지 다시 돌아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난 걸음을 멈춰 섰다. 앞질러 가기에는 내 걸음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고, 무리를 하며 도망치듯 걷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저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을 가다듬고, 잠시 쉬면 될 일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도로를 따라 쭉 뻗은 길이 끝없이 펼쳐졌다. 오늘 가야 할 곳은 한 번도 굽지 않는 이 길의 끝에 있었다. 가끔 비가 왔지만, 우의를 입을 만큼 많이 오지는 않았다. 양옆으로 펼쳐진 윈도우 배경 화면 같은 장면들은 이미 너무 익숙해져 버려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중간에 쉴 곳도 마땅치 않은 데다 지루하고 단조로운 길이라 쉼 없이 걸었더니 점심 무렵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여기를 선택한 이유는 이층침대가 아니라 단층 침대였기 때문이었다.
짐을 풀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오리온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어르신 두 분이 침대를 안내받고 계셨다.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난, 어제 이곳에서 먼저 묶었던 한국인 부부의 추천으로 근처에 있는 냇가로 향했다. 근처라 쉽게 찾은 냇가 옆의 푸른 풀밭 위엔 하얀 민들레 꽃가루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청둥오리 한 무리는 물가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가니 귀찮다는 듯이 천천히 일어나 흐르는 물에 들어가나 싶더니 이내 돌아 나와 다시금 털썩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은 그만 가라는 표정을 한 채 말이다.
다시 돌아온 알베르게에서는 두 어르신이 길을 나서고 계셨다. 나에게 혼자 저녁 먹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씀과 함께 어디론가 가셨다. 불과 삼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두 분은 양손 가득 장을 봐 오셨다. 오늘 저녁은 삼계탕과 연어샐러드를 만들어 먹자고 하시며 무척 즐거워하셨다. 까마득히 어린 난 가만히 얻어먹기가 죄송해서 뭐라도 도와드리려고 주방에 갔지만, 설거지나 하라는 엄명과 함께 매우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숙소로 올라갔다.
분명 한식인데 스페인 요리 같은 삼계탕과 연어 참치샐러드를 맛있게 먹었다. 2유로에 사셨다는 닭다리와 날개는 그 양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다. 약속대로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미처 보지 못했던 아이스크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한 저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어르신 한 분은 피곤하다며 올라가시고 남은 둘은 맥주 한 캔씩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어르신은 암이 사라지고 난 후의 여행 이야기를 한참 동안 이어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