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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Aug 29. 2024

반이나 왔네? 반밖에 안 남았네! - 1st

테라딜로스 데 로스템플라리오스 -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카미노 23.3km


바람이 심상치 않다. 금방이라도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하늘이다. 먹구름이 단 한 점의 푸른 하늘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했나 보다. 불안한 마음에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니 비 소식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판초 우의를 바로 꺼낼 수 있도록 배낭 가장 위에 넣어 놓고 출발했다. 어제 만난 독일에서 온 미첼이 눈인사를 하며 나를 빠르게 지나갔다. 게르만 민족은 뼈대와 근육의 힘이 남다른 것 같다.



걷다 보니 오히려 적당한 바람과 구름 낀 날씨 덕분에 걷는 것이 수월하게 느껴졌다. 프리지어 닮은 노란 꽃이 길 양쪽으로 활짝 피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나를 응원하러 나온 것처럼 보였다. 걸어가며 오른손을 뻗어 꽃과 줄기를 손끝으로 느꼈다. 보드라운 꽃들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마치 서로의 손을 마주쳐 하이 파이브를 하는 듯, ‘잘 왔어! 반가워! 환영해! 힘내!’ 꽃들의 응원 소리가 내 손을 통해 마음에 와닿았다.



먼 하늘에 파란 하늘이 보이는가 싶더니, 얼마 안 가 태양이 또다시 길을 달구기 시작했다. 다행인 건 그 무렵 나타난, 일정한 간격으로 빽빽하게 길에 세워진 플라타너스 덕분에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었다. 도로를 끼고 걷는 길이었지만, 차량 통행이 거의 없어서 조용했다. 유럽인으로 보이는 몇몇은 일부러 햇볕을 쬐기 위해 도로로 나가 걷기도 했다. 항상 보긴 하지만 그들의 햇빛 사랑은 엄청나다. 쉴 때 보면 그늘엔 항상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이, 햇빛 비추는 곳엔 어김없이 유럽 사람들이 있다.



숲길을 지나 커다란 건물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순례자를 묘사한 벽화가 눈에 띄었다. 스페인에서는 건물을 가득 채운 벽화를 흔히 볼 수 있다. 어디를 가나 한두 군데는 반드시 있었다. 제법 규모가 느껴지는 소도시처럼 보였고, 기차역도 있었다. 역의 이름을 찾아보니 ‘사아군’. 아! 여기가 소몰이 축제로 유명한 사아군이었다. 그래서인지 도시 곳곳에 소몰이용으로 제작된 철제 안전 기둥들이 빼곡히 세워져 있었다.



소몰이 축제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도시의 모습만 봐도 소들이 뛰어가는 장면이 상상됐다. 천천히 사아군을 구경하며 지나가고 있는데, 두 한국인 어르신과 다시 마주쳤다. 휴대전화로 어딘가를 찾고 계시길래 여쭤보니 ‘중간지점 인증서’를 발급하는 곳을 찾고 있다고 하셨다. 난 그게 뭐냐고 물었다. 순례길 완주를 하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완주증을 거리별로 발급받는다. 그런데 이곳 사아군은 생장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절반을 걸어왔다는 것을 인증해 주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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