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실라 데 라스 무라스 - 레온 18.8km
창가에서 잤던 외국인이 밤새 창문을 열고 자는 바람에 조금 쌀쌀했다. 잠결에 여기저기에서 기침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거나 항의하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와 배낭을 체결하는 클립 소리, 걸을 때마다 바지가 닿아 나는 바스락 거림. 새벽을 깨우는 어수선한 소리에 살포시 눈을 떴다. 밖은 아직 어둡다. 오늘은 길고 지루했던 메세타 평원이 끝나고 드디어 레온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걸어야 할 거리도 비교적 짧은 데다 연박을 하기 위해 호텔을 예약해 놓은 상태라 여유를 부렸다. 침대에 누워 사람들이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잠에서 깼다. 분명 잔적이 없는데 잠에서 깨어나 어리둥절한 채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방에 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조용한 알베르게에서 여유 있게 준비하고 나오니 1층 Bar에 아직 몇 명의 사람들이 남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도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앉으려는데,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간호사 출신 미국인 제인이었다.
다른 곳에서 잠을 잤던 제인은 출발하며 이곳에서 아침을 해결하려던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다며 나와 같은 테이블로 와 앉았다. 늘 있는 대화를 이어갔다. 어디서 잤니? 오늘은 어디까지 가니? 어제는 어디서 출발했니? 누구 봤니? 무릎은 어때? 몸은 괜찮아? 등등. 순례자들끼리 만나면 대개 이런 대화를 나눈다. 아! 처음 본 사람에겐 질문이 추가된다. 어느 나라에서 왔니? 어디서 출발했니? 어디까지 가니? 네 배낭의 무게는 얼마나 되니?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주문한 샌드위치를 먹으려는데, 너무 딱딱했다. 입을 크게 벌려 한입 깨물면 입안에 남은 것보다 바스러져 접시 위로 떨어지는 게 더 많았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한 숟가락 떠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힘들게 샌드위치를 처리하고 휴대전화로 가야 할 길을 점검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우테르가에서 만나 북핵 문제에 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던 미국인 론과 그의 딸 마야가 활짝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 명의 미국인 틈에 끼어있던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부엔 까미노’를 외쳤다. 마법과도 같은 이 인사는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를 축복하며 보내준다. 태양은 이미 뜨겁게 공기를 달구고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오는 동안 순례자도, 마을주민도 없었다. 마치 세상에 혼자 남은 것 마냥 조용하고 적막했다. 마을 끝에 있던 오래된 돌다리를 건너며 비로소 힘차게 흐르는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점심시간쯤 긴 언덕이 이어지는 마지막 마을의 끝자락에서 길을 잘못 들어 조금 지체했다. 다시 가야 할 길로 돌아와, 도로 옆으로 난 언덕을 넘으니 멀리 레온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도심이 가까워질수록 시내버스도 보이고, 도로에 차가 많아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도시가 반갑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길 건너로 한국에서도 보기 어려운 KFC 매장이 보였다. 스페인 시골길에서 볼 수 없는 광경들이 계속해서 내 눈을 즐겁게 했다.
도착한 호텔은 레온 대성당에서 불과 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온라인 예약사이트에서 한국인의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기에 믿고 예약했다. 리셉션에서 만난 사람은 마르고 매우 키가 컸다. 차분하고 일정한 톤의 낮은 목소리로 내게 여러 가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환영하는 의미로 선물을 준비했다며, 뒤쪽에 진열되어 있던 라면을 가리켰다. 신라면과 캔에 담긴 김치였다.
한국에서는 본 적 없는 특이한 신라면도 몇 종류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판매하는 제품인 듯했다. 난 단숨에 ‘Red’라고 외쳤다. 그 사람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가더니 빨간색 신라면 컵라면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더니 한국인은 전부 이걸 골랐다며 웃었다. 나도 따라 웃으며 라면과 객실 열쇠를 받아 들고 가볍게 손 인사를 했다. 새로 생긴 호텔답게 깨끗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일주일 만에 다시 혼자만의 공간을 가졌다. 너무 좋다. 샤워가 끝날 때까지 수도꼭지를 다시 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보통 알베르게의 샤워 시설에는 한국의 대중목욕탕에서 볼 수 있는 수도꼭지를 사용한다. 누르면 얼마간의 시간 동안만 나오는 수도꼭지 말이다. 가끔은 계속 누르는 게 귀찮아서 뒤돌아 등으로 누르고 있었던 적도 많았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니 천천히, 이 기분 좋음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한국인 부부 순례자의 추천으로 문어 요리를 맛보기 위해 레온 대성당 앞으로 나갔다. 순례길을 걸으며 너무 많은 성당을 봤던지라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대성당 앞에서부터 식당들이 즐비했다. 아마 레온에서 가장 번화한 곳일 거라 생각됐다. 한참을 찾아간 식당은 30분 전에 영업이 끝났다. 찾아보니 저녁에는 영업하지 않는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구글 리뷰가 좋은 식당이 있어 들어갔다. 문어 요리인 ‘뽈뽀’와 가리비요리인 ‘잠부리나스’를 주문했다.
뽈뽀를 먹다 보니 문어숙회가 생각났고, 잠부리나스를 먹을 땐 을왕리에서 먹던 조개찜이 생각났다. 역시 먹거리는 한국이지. 남은 맥주를 마저 비워내고 대성당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눈에 담았다. 스페인 사람들에게도 이곳 레온은 관광지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모여 사진 찍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사람 중 유독 눈에 띄는 무리가 있었다. 귀에 꽂히는 한국말이었다. 이십대로 보이는 친구들 여러 명이 이렇게 저렇게 자세를 잡으며 즐겁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멀찌감치 떨어진 채 그런 그들의 사진을 찍었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