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홀로길에 Sep 03. 2024

고마해라 배고프다 아이가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 - 만실라 데 라스 무라스 26.3km


몸이 적응해서 그런지 새벽녘이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해가 지는 밤 열 시쯤 잠이 들고 새벽 다섯 시가 조금 지나면 일어나는 생활이, 나도 모르게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어제저녁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은 아침이 되니 더 차가워졌다. 출발한 지 40분 정도 되니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해가 뜨려는 모양이다. 항상 알베르게에서 나오면 해가 떠오른 후가 많았는데 오늘은 일출을 볼 수 있다.



지평선 너머 한점 붉은 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내 눈이 부실 정도로 떠오른 태양은 가야 할 방향의 나무와 길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물감으로 이런 색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명 세계와 한 발짝 떨어져 지내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이런 일상적인 풍경들조차 특별해지는 감동으로 다가오는 순례길의 매력으로 인해, 몇 번이고 다시 오는 사람이 생기나 보다. 차갑던 바람도 태양이 뜨고 나니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플라타너스가 심겨 있어서 다행이었다. 단조롭고 지루한 길이었지만 가로수가 계속 그늘을 만들어 주어서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었다. 오늘 가는 길에는 마을이 두 군데뿐이다. 그 말인즉슨 마을마다 쉬며 물과 음식을 보충해야 한다. 첫 번째 마을에 들어서니 식당이 한 군데 보였다. 난 순례길 초반에는 이렇게 처음으로 나타나는 곳은 가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항상 기다려야 하고 앉을자리도 마땅치 않을 때도 있었다.



예상대로 줄을 섰다.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문이 열릴 때마다 아는 사람이 들어오는지 쳐다본다. 나도 배낭을 비어있는 자리에 내려놓고 줄을 선 채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상당한 시간을 걸어왔는데 여전히 처음 보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다. 안면이 있는 몇 명과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줄은 쉽사리 줄지 않고 있었다. 주문을 하는 사람이 스페인 사람인지 주인과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다. 배고프다. 적당히 해라.



경험상 대부분의 식당 주인이 아시아인과는 길게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영어권 사람들도 비슷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물론 너스레 많은 사람은 예외겠지만, 프랑스와 가까운 동쪽에서 산티아고가 있는 서쪽 갈라시아 지방으로 갈수록 영어가 소외된다고 느꼈다. 대체로 사람들도 거칠어지고, 지형도 거칠어진다. 영어로 물어보면 스페인어로 대답한다. 영어를 모르는 게 아니다. 그저 무시할 뿐이다. 


 


도로를 따라 계속 이어진 순례길은 메세타 평원의 막바지에 접어들어서인지 별다른 풍경이랄 게 없었다. 며칠째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도착 전 마지막 마을인 산타스 마르타스에서 잠시 쉬어가기 위해 멈췄다. 그때 얼마 전 보았던, 말을 탄 순례자들을 다시 만났다. 말을 주차? 주마? 하고는 드럼통처럼 생긴 야외테이블에 셋이 앉아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마치 중세에 온 기분마저 들게 했다. 내가 그들을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자, 매우 만족해했다.



만실라 데 라스 무라스. 오늘 머물 곳에 도착했다. 체크인 전인데 이미 스무 명 정도가 대기 중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빨리 걷는 것인가 이 사람들은. 잠시 후 호스트가 출근해 순서대로 침대를 배정받고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니, Bar는 일요일이라 영업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정원으로 나갈 수 있도록 문은 열어줬다. 벽 쪽에 그늘진 곳의 푸른 잔디에 앉아 있으니, 천국이 여기인가 싶었다.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세계 여행 중인 한국인 부부였다. 그들도 오늘 이곳에 도착해서 나에게 연락을 해보았다고 한다.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하고, 미리 알아두었다는 식당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마을 구경도 할 겸 조금 일찍 알베르게에서 나왔다. 그늘 하나 없는 길을 십여 분쯤 걸었을까, 저만치 앞에 낯익은 두 사람이 보였다. 뒷모습이 흡사 미녀와 야수 같다. 앞모습은 더 그렇다. 남편분의 풍성한 긴 머리로 인해 더욱더 그렇게 보였다.



일요일이라 영업하는 곳이 없었다. 몇 군데 찾은 곳은 모두 간단한 또르띠아나 타파스 정도의 가벼운 안줏거리뿐이었다. 처음에 가려고 했던 식당으로 다시 갔다. 그곳은 시에스타 시간이라 영업하고 있지 않아서, 배가 고팠던 우린 다른 곳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결국 식당이 다시 문을 열 때까지 Bar에 앉아 맥주로 허기를 달래보기로 했다. 백 년쯤 된 건물의 내부는 옛 모습을 최대한 살려놔서 그 자체로 최고의 분위기를 만들어 줬다.



PS. 마을에서 처음 나타나는 식당엔 늘 사람이 붐빈다. 그래서 두 번째 나타나는 곳을 가려고 그냥 지나쳤다가, 식당이 영업하지 않거나 아예 있지도 않아서 낭패를 당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런 시행착오를 겪고 나니 무조건 처음에 나타나는 곳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문득, 마치 나의 인생도 이렇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삶의 어느 순간에 스쳐 지나갔을 기회를 생각해 보며 후회했던 기억들이 있다.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이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놓쳐버린 기회들. 한번 시도조차 하지 않아 그것이 옳았는지 잘못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시간. 순례길을 끝낸 지금의 난 달라졌을까? 아마 도전하는 데 주저함은 없을 거란 확신이 있다. 실패가 두렵기보다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