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홀로길에 Sep 19. 2024

추억의 스페인 하숙집

폰페라다 - 비아프랑카 델 비에르소 23.6km

‘삑- 삑-’. 시설이 현대적인 것이 다 좋은 건 아니었다. 침대 옆에 있던 개인 사물함은 자신의 객실 카드를 가져다 대면 ‘삑’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다시 닫으면 두 번의 소리가 더 났다. 소음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알베르게가 위치한 곳은 폰페라다의 가장 번화한 시내에 있었다. 창문은 닫혀있었지만, 도로에서는 물청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청소용 차량이었지만, 그 소리가 꽤 컸다.



어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아침부터 분주한 시내 풍경이었다. 많은 사람과 차가 거리를 채웠다. 알베르게 앞에 있던 회전교차로에는 빙글빙글 길을 찾아 돌아나가는 차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운전석에 앉아 끼어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의 긴장감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폰페라다의 월요일 아침은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난 서둘러 시내를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출발한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지만, 도로 옆 인도를 계속 걷고 있었다. ‘폰페라다’가 끝나는 경계에는 다시 ‘콜룸브리아노스’라는 작은 소도시가 시작되었고, 그곳을 벗어나자마자 ‘푸엔테스누에바스’라는 소도시가 시작됐다. 다음에 이어지는 ‘캄포나라야’를 지나야 비로소 산길로 접어들었다. 조금 가다 보니 길에서 체리를 봉지에 담아 2유로에 팔고 있었다. 난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봉지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 것 같아 포기하고 그냥 지나쳤다.



목이 말라왔다. 아까 그냥 지나친 체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 거짓말처럼 내 앞에 체리 나무가 나타났다. 빨간 체리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손을 뻗어보았지만, 너무 높아 닿지 않았다. 손이 닿을만한 곳은 이미 다 따가고 없었다. 등산스틱으로 쳐보려 하는데, 문득 이 나무의 주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졌다. 가파른 경사에 심겨 있던 그 체리 나무의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포도밭이었다. 하마터면 도둑이 될 뻔했다.



‘카카벨로스’란 마을에 도착했을 무렵, 점심시간이 되었다. 골목 한 귀퉁이에 ‘한식’이란 한글이 보였다. 난 홀린 듯이 그곳을 향했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옆 가게에 있던 사람이 그곳은 당분간 장사를 하지 않는다고 얘기를 해주었고, 난 어쩔 수 없이 돌아 나와야 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식당이 있어서 그럭저럭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 식사 후 마을의 골목길을 지나고 있는데 작은 성당이 보였다.



성당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정면에 보이는 예수님과 성모마리아상은 조명으로 인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긴 의자에 앉아 기도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난 잠시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실까? 궁금했다. 그때 수도승으로 보이는 분이 내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한국인이냐고 물은 그는,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 “한국인들은 모두 바빠 보인다. 이 순례길은 빨리, 멀리 가려고 하는 곳이 아니다. 부탁이니 너는 이 길을 즐기길 바란다.”



오늘의 종착지는 ‘비아프랑카 델 비에르소’라는 마을이다. TV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하숙’에 등장해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곳이다. 차승원, 유해진, 배정남 이렇게 세 명이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나도 꽤 관심 있게 봤던 기억이 있다. 화면 속 한국 연예인들을 통해 알게 된 마을이라 그런지 묘한 친근함이 느껴졌다. 난 짐을 풀자마자 그 당시 운영했던 알베르게 마당을 찾아갔다. 내가 알던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은 그들의 흔적이 지워졌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유해진의 장난스럽고 멋쩍은 미소를 볼 것만 같았다.



PS. 카카벨로스에서 만났던 수도승과 헤어지고 난 후, 한동안 잊고 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왜 여기에 오고 싶어 했을까? 왜 내 돈 들여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내가 정말 이곳에 오고 싶어 한 게 맞나? 답을 찾지 못한 채, 하루하루 습관적으로 걸은 지 어느덧 한 달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성경 마태복음 6장 31절에 있는 말씀 구절이다. 하지만 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걱정하며 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과연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얻어낸, 구원이라는 찬란함이 내게 와닿아 있는가? 나 스스로에게 던져지는 수많은 질문의 답을 언제 찾을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그저 오늘도 계속해서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 수도승의 말처럼 길을 즐겨보려 하지만, 육체의 고단함은 나를 점점 단순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어쩌면 난, 이 고된 길을 걸으며 나를 온통 뒤덮고 있던 가식의 굴레를 하나씩 벗겨내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Tip. 비아프랑카에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이 있다. 한국 라면과 소주를 판매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